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콘라딘 (문단 편집) == 상세 ==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일원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왕]] [[콘라트 4세]]와 [[비텔스바흐 가문]]의 엘리자베트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1256년 아버지 [[콘라트 4세]]가 27세의 나이로 요절하자 [[슈바벤]] 공작, [[시칠리아]] 왕, [[예루살렘]] 왕의 작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왕|후계자]]로 선출되지 못했다. 후계자 선출을 놓고 제후들의 의견이 갈리며 [[신성 로마 제국]]은 [[대공위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콘라딘은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왕]]위와 함께 부여되던 이탈리아 왕위 역시 물려받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 [[콘라트 4세]]는 [[교황]]이 아들을 보호해주리라 믿었지만, 교황들은 콘라트 4세의 믿음을 배신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4세]]와 후임 [[알렉산데르 4세]] 및 제후들은 어린 콘라딘이 당주로 있는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영지를 나눠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1258년 콘라딘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자 시칠리아를 대리 통치하고 있던 콘라트 4세의 이복 동생 [[만프레디]]가 시칠리아 왕위에 올랐다. 콘라딘이 죽었다는 소문은 거짓이었지만 만프레디는 왕위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동생이자 훗 날 카를로 1세로 즉위하게 되는 앙주의 샤를 (Charles d'Anjou)이 만프레디를 제거하려는 교황의 지원을 입고 나폴리로 처들어왔다. 1266년 만프레디가 전사하자 10대 소년왕 콘라딘은 시칠리아에서의 지배권을 회복하기 위해 외삼촌 루트비히 2세의 지원을 받아 [[슈바벤]] 공국을 담보로 군자금을 마련하여 시칠리아를 침공했다. 그러나 1268년 탈리아코초 전투에서 시칠리아의 국왕, [[카를루 1세]]로 즉위한 앙주의 샤를에게 포로로 잡혀 나폴리에서 참수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