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쿠데타 (문단 편집) == 공산권 국가들 == 의외로 [[냉전]] 시절의 [[공산주의]] 국가들, 정확히는 [[소련]]을 위시한 [[제2세계]] 국가들의 경우에는 쿠데타가 거의 벌어지지 않았다. 당시 공산주의 국가들은 [[정치장교]] 제도를 기반으로 한 [[문민통제]]가 매우 튼튼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산 세력 내의 권력 투쟁도 무력을 동반한 쿠데타보다는 형식상 합법적인 정치 투쟁 및 숙청으로 행하였다.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쿠데타는 소련의 [[8월 쿠데타]]와 [[폴란드 인민 공화국]]의 친위 쿠데타 정도인데 보면 알겠지만, 일반적인 군부 주도의 쿠데타는 아니다. [[공산주의]] 국가들은 공산당이 통제하는 '''하나의 거대한 병영'''이라는 개념은 그리 틀린 개념은 아니다. 소련을 제외한 대부분의 [[공산권]] 국가들은 사회안정을 확립하지 못했기에 기율과 군을 통한 사회를 통제해 왔다. 하지만 소련의 경우에는 통제를 통해 국가를 운영했지만 군을 이용하지는 않았다. 이는 소련이라는 국가 자체가 사회적으로 안정이 되었으며, 상대적으로 유복했기 때문이다. [[폴란드]], [[중국]], 북한 등의 국가들은 수많은 대중적인 저항에 직면했고, 이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해야 했다. 하지만 소련의 경우에는 제2세계의 [[패권국]]답게 사회가 안정화되어 있어서 군의 중요성이 많이 떨어졌었다. 특히 소련의 [[브레즈네프]] 시기는 비록 임금이 서구에 비해서 열악했지만 물가가 미친듯이 저렴해고, 맞벌이가 국책사업이었기에 가처분소득은 비슷했다.[* 소련사회에서 여성도 노동자의 한 명으로 노동을 해야 했다.] 소련사람들은 당시 [[서구권|서구]]에 비해서 많은 부분이 열악했지만, 기다리면 일자리와 집, 차, 별장을 국가에서 지급해 주었다. 이러한 보장이 있었기에 많은 것이 열악하고 부족해도 소련 사람들은 참고 지냈다. 예를 들어 신혼부부에게는 3인 가족용 아파트가 지급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물량이 부족해 10년 후로 밀렸지만 그냥 1인 아파트에서 가족이랑 살았다. 어차피 자신들이 살 아파트가 나올테니까. 이러한 믿음은 소련사회가 많은 것이 부족하고 문제점이 촉발되는 지점까지 소련을 버티게해주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소련]] 사회는 사회적 안정도가 매우 높았고, 그 결과 군에 의한 쿠데타는 현실화되기 어려웠다. 쿠데타는 사회불안을 틈타 발생하는 것이지 사회안정도가 높은 나라에서는 성공하기가 어렵다. 실제로 [[8월 쿠데타]]의 경우만 해도 장병들이 쿠데타를 거부했고, 시민에 합세했다. 하지만, 소련이 아닌 공산권 국가는 이와 달랐다. 동구권이나 북한은 소련의 [[괴뢰 정권]]이었기에 대중적 저항이 강했다. 중국은 독립적으로 성취했지만 이후 국가 운영에서 여러가지 병크로 인해 대중적 신망을 상실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산당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은 바로 군사력이다. 그래서 동구권을 비롯하여 북한, 소련은 군을 강화했으며, 군사력을 동원하여 이러한 대중적 봉기를 진압하고자 했다. 실질적인 예로 [[프라하의 봄]], [[천안문 사태]]가 있다. 중국의 경우에는 중국의 [[최고지도자]]는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의 주석으로 군통수권을 쥐고 있다. 북한은 이런 와중에서도 더욱 특이하게 군을 특별히 우대하는 [[선군정치]]를 하고 있다는 점이 이례적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