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쿵샹시 (문단 편집) == 생애 == 1881년에 중국 [[산시성(산서성)|산시성]](山西省) 진쭝시(晋中市) 타이구현(太谷県)에서 출생. [[공자]](孔子)의 75대손으로 태어나, [[청나라]]의 관리이며 [[유학]]자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어릴적부터 유학을 배웠다. [[기독교]]로 개종한 후 미국으로 유학을 가 1905년에 [[오하이오주]]의 오벨린 대학을 졸업한 후, 다시 [[예일 대학교]]에서 광물학을 공부하여 1907년에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와 아이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고 있던 중 [[신해혁명]]을 맞게 되는데, 이때 고향의 유지들과 함께 지역의 질서를 잡는 조직을 만들어 운영했다. 1912년 영국의 아시아각패화유공사(亞細亞殼牌火油公司)로부터 산시(山西)성의 등유 전매권을 따내어 돈을 벌었다. 1913년에 일본의 초빙으로 재일본 중국기독교 청년회의 총간사로 취임했다. 도쿄에 주재할 당시 [[쑨원]](孫文)이 이끄는 중화혁명당의 경비제공과 쑨원의 문서처리 임무를 관할하다가, 쑨원의 영어비서로 일한 [[쑹아이링]](宋靄齢)을 알게 되었다. 1914년에 일본에서 [[쑹아이링]]과 결혼하고 이듬 해 산시성으로 돌아가 이전처럼 교육과 상업에 투신하였다. 동시에 산시의 [[군벌]]이던 옌시산(閻錫山)의 막하로 들어가 사업을 더욱 확장시켰다. 그 후 산시독군겸 성장(山西督軍兼省長)이던 [[옌시산]](閻錫山)의 추천으로 등용되어 1923년에 쑨원의 대리인으로 북방군벌들과 연락을 취했다. 1925년 3월에 쑨원이 베이징에서 사망할 때, 쑨원의 임종을 지키며 유언을 들은 증인 중 한 명이 되었다. 1929년 3월, 국민당 3차 당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그 뒤로도 중화민국의 상무장관 ^^(1928년 ~ 1931년)^^, 재무장관 ^^(1933년 ~ 1944년)^^ 등 주요 직위를 역임했으며, 1932년 유럽과 미국으로 시찰을 떠났다. 1933년 4월에 귀국한 후 중화민국 중앙은행 총재에 취임했고 그 해 10월에 행정원 부원장도 겸직했다. 재무장관으로 있을 때 세제개혁을 실시하여 재정면에서 지방의 조절과 민중의 곤궁을 조율하려 했다. 동시에 은행제도의 개편에도 나서서 증세를 통해 중국은행과 교통은행을 국민정부 재정부의 관할하에 두었다. 1935년 처남 [[쑹쯔원]]과 함께 [[법폐개혁]]을 실시하고, 주미 중국대사 [[스자오지]]를 통해 [[중미은협정]] 체결을 감독했다. 1935년 11월 1일 [[왕징웨이 저격 사건]]이 일어난 이후 행정원장 대리를 맡았다. 1936년 [[7군자 체포 사건]]의 수습과 [[초공작전#s-3.7|제6차 초공작전]]의 독전을 위해 [[장제스]]가 시안에 가려 하자 반대했으며, [[서안 사건]] 발생하자 장제스를 구출할 것을 주장했다. 1937년 4월 [[천사오콴]] 등 해군 장교들과 함께 베를린에 가서 [[아돌프 히틀러]]를 방문하는 등 유럽을 순방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명목상 [[조지 6세]]의 대관식을 축하하는 특사로 다시 유럽에 파견되었는데, 실제 목적은 [[장제스]]를 위해 전쟁물자를 확보하고 몇몇 나라로부터 차관을 끌어오는 것이었다.[* 당시 장제스와 쿵샹시 사이에 오간 서신을 볼 때 쿵샹시가 상당한 양의 [[탐조등]]과 [[고사포]]를 [[독일]]로부터 (아마도 외상으로) 구입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1월에 귀국하여 [[트라우트만 공작]]을 지지했으나, 일본이 점령지를 모두 일본의 괴뢰국으로 만들라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자 주전론자로 돌아섰다. 1938년 평화 회담 대표로 방일이 계획되었으나 취소되었다. 1938년 행정원장에 임명되었으나 1939년에 해임되었다. 이후 행정원 부원장 직을 유지하였으나 거듭된 부패와 사치 사건으로 물의을 일으켰으며, 1945년 6월 중일전쟁이 끝나기 직전에 로자먼드 스캔들과 미국 달러 공채 뇌물 사건에 휘말려 장제스에게 문책을 당한 후 사임했다. 1946년, 국민정부가 난징으로 환도하자 정치적 재기를 시도했다. 1947년 [[쑹아이링]]이 수술을 받기 위해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는데, 이때 쑹아이링이 쿵샹시에게도 미국행을 권해서 같이 뉴욕으로 가서 리버델리의 별장에 머물며 은행업을 경영했다. 1948년 [[재정경제긴급처분령]]을 감독하기 위해 상하이에 파견된 [[장징궈]]가 두웨성의 아들 두유병을 체포하는 일이 생겼는데, 두웨성은 아들을 구하기 위해 쿵샹시의 아들 공영간이 황금밀수업을 한다는 것을 일러바쳤다. 이 때문에 공영간은 장징궈의 손에 사형당할 뻔했으나, 콩샹시의 처제이며 공영간의 이모인 [[쑹메이링]] 등에게 탄원하여 겨우 구해낼 수 있었다. 이후 [[국부천대]]를 단행한 중화민국이 안정상태에 접어들고 [[리쭝런]]의 부총통 탄핵이 있고 실시된 1954년의 [[제2대 대만 정부총통 선거]]에 부총통으로 출마하려 했다. 그러나 [[장징궈]]가 그를 '''낡은 사회의 권세 있는 집안'''이라고 극심하게 비판하자, 대만에서 자신이 설 자리가 없음을 알고 정치의 꿈을 완전히 단념하였다. 이후 중화서국 이사장이라는 명예직을 지내다가 1967년 8월 16일 향년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