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크레타 (문단 편집) == 역사 == 유럽문명의 발생지라고도 할 수 있다. 크레타 섬의 역사는 [[키프로스]]만큼이나 파란만장하다.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으며 크레타 섬에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인 [[미노스 문명]]이 꽃피었다. 오늘날 남아있는 흔적은 크레타의 주도인 [[이라클리오]](Ηράκλειο) 인근의 [[크노소스 궁전]] 정도밖에는 없지만, 생생하게 남아있는 벽화와 도기 등을 보면 무척이나 화려하고 생기 넘치는 해양문화를 구가했던 듯하다. 섬의 이름인 '크레타'도 기원전 8세기 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이미 언급된다. 그리고 성경에서 [[이스라엘 왕국]]과 적대하는 [[필리스티아]]인들은 크레타 출신 민족들인 듯하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필리스티아인들은 크레타 섬에서 왔다고 언급했기 때문.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minoanatlantis.com/Minoan_Fisherman_Fresco_Art_650px.jpg|height=5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1.bp.blogspot.com/Minoan%2Bmale%2Band%2Bfemale%2Bdress.jpg|height=500]]}}} || || 미노아 문명의 프레스코벽화 || 고대 크레타/미노아인들의 복장 || 하지만 이후 고전기에 이르면 그리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촌구석 쩌리로 여겨지다가[*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우리 그레데 사람들은 언제나 거짓말쟁이이고 몹쓸 짐승이고 먹는 것밖에 모르는 게으름뱅이이다." 하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 말을 한 사람은 바로 그들의 예언자라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로]], [[디도서]] 1:12(공동번역성서)] [[고대 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을 거치는데, 그 와중에 826년부터 960년까지 [[아랍인]]들의 지배를 받다가 961년 [[한닥스 공방전]] 후 동로마 제국의 영역으로 돌아왔고 [[4차 십자군]] 원정 이후로 크레타 섬에 쳐들어온 [[베네치아 공화국]]이 접수해서 400여년간 지배했다가 이후 17세기 중·후반 20여년간 치러졌던 [[크레타 공방전]] 끝에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1898년까지 받게 된다.[* 즉 4차 십자군 이후로 1898년까지 700년 가까이 계속 외세의 지배를 받은 것이다.] 힘들게 섬을 정복한 오스만 측은 농민들의 토지 소유권을 인정하고 세금을 제국 내에서 가장 낮게 내게 하여 안정적인 통치를 이어나갔다. 따라서 18세기 말엽에 이르면 섬 인구 중 절반이 무슬림이 되었으나 나머지 기독교도들도 별 차별을 받지는 않았다. 크레타에서 오스만의 지배기간 자체는 의외로 그리스 본토보다도 짧았다. 그리스 본토의 경우 북부 지역은 14세기 중·후반에, 중·남부 지역은 15세기 중반부터 그리스 독립 전쟁의 1820년대까지니 짧게는 350년 이상, 길게는 450년이었다. 반면 크레타는 250년도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본토와의 이질성이 두드러지는 것은, 물론 남쪽으로 제법 떨어진 섬이라는 위치가 당연히 우선적으로 작용하지만, 밟아온 역사 과정의 차이에도 그 답이 있다. 크레타에는 그리스 본토가 겪지 않았던 9-10세기 130여년에 달했던 이슬람의 지배가 있었고, 또한 4차 십자군 이후로도, [[니케아 제국]]에서 이어지는 동로마 본국을 차치하고도, 그리스 본토에는 같은 동로마 계열의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이 있었다. 그래서 에피로스 또한 당시 그리스 입장에서는 결코 외세가 아니었다. 원 동로마 영역에 대한 이들의 적극적인 탈환 의지 때문에, 크레타에서 4차 십자군 이래 베네치아의 지배가 계속 이어졌던 것과 같은 외세의 전면적이며 연속적인 지배가 그리스 본토에서는 오스만 제국 이전까지 제한적이었다. 한편 그리스의 북부 지역은 불가리아 및 [[세르비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적도 있었으나, 같은 정교회권 국가들이라 그리스 입장에서는 외세라고 해도 훨씬 덜 이질적이었다. 여하튼 이렇게 이미 오스만 이전에도 이슬람의 통치를 경험한 적이 있었던 데다가, 연속적인 외세의 지배 기간이 그리스 본토보다 훨씬 길었던 점은, 크레타가 그리스 본토에 비해 튀르키예 문화가 더욱 깊숙이 침투한 원인들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explorecrete.com/dagger-141.jpg|width=100%]]}}} || || 크레타 전쟁 당시의 게릴라들 || 이후 그리스 [[민족주의]]가 대두되면서 1821년 그리스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크레타의 그리스인들 역시 독립군에 가담했으나 독립에 성공한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중부 그리스, [[키클라데스 제도]]의 그리스인들과 달리 오스만 진압군에게 진압당했다. 그럼에도 크레타의 기독교 그리스인들은 꾸준히 게릴라 활동을 통해 오스만 정부에 대한 투쟁을 전개, 주기적으로 반 오스만 봉기를 일으켰고 [[베를린 회의]] 이후 크레타 문제에 개입한 열강의 주선 하에 1878년 할레파 협약(Σύμβαση της Χαλέπας)을 체결하여 크레타에 자치권을 대폭 부여하는 선에서 평화를 도모하였으나 기존 질서의 회복을 꾀하던 오스만 제국이 1889년 협약을 파기하면서 다시 반 오스만 정서가 터져나온다. 1895년 크레타의 그리스인들이 다시 봉기를 일으키고 섬의 대부분을 장악하자 1897년 봉기군을 지원하던 그리스와 오스만 제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에서 오스만이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이 사건으로 오스만이 더 이상 크레타를 통제할 수 없다고 판단한 열강은 크레타 문제에 개입해 크레타의 오스만군을 철수시킨 후 크레타를 명목상 오스만 지배 아래의 [[크레타 자치국]](Κρητική Πολιτεία)이라는 형태로 독립시켰다. 이후 [[크레타 자치국]]은 자체적으로 [[드라크마]] 화폐도 찍어내는 등 사실상의 독립을 누리다가 1908년 [[청년 튀르크당]]의 혁명을 계기로 자치국 의회는 일방적으로 그리스와의 통합을 결의하였고 크레타 합병을 두고 열강의 눈치를 보던 그리스는 크레타의 통합 결의에 일단 무응답으로 일관하다가 [[발칸 전쟁]] 발발 직전인 1912년 10월 1일 그리스가 크레타와의 통합을 선언하면서 그리스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당장 크레타 합병을 발표한 당시 그리스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본인부터 크레타 출신의 강력한 [[에노시스]] 지지자로서 [[크레타 자치국]]에서 유명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그리스 본토로 넘어가 정치 활동을 이어간 케이스이다.] 그리고 [[발칸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하면서 크레타는 공식적으로 그리스 영토로 편입되었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섬의 위치가 위치인지라 [[크레타 섬 전투]]가 격렬하게 벌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지정학적 특징으로 인한 파란만장한 역사 때문에, '동지중해의 항공모함'[* 1897년 [[크레타 전쟁]] 당시 크레타에 개입하기로 한 열강 6개국이 오스만을 압박하기 위해 크레타 앞바다에 함대를 파견한 적이 있었는데 이 사건을 크레타 섬이 배경인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는 여인숙을 운영하는 늙은 여주인이 한때는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4개국 함대의 [[제독]]을 혼자 전부 사로잡았다며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는 것으로 비유한 장면이 나온다.]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 바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