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킬링필드 (문단 편집) === '[[자유]]'라는 개념의 말살 === >'''모든 국민의 키가 정확히 1백 60센티미터인 국가.''' >---- >메이 만[* Mey Mann, 1927~2001. 젊었을 적에 폴 포트의 동료였다.] '타락한 서양 문화에 대한 허영심을 제거해야 한다'는 이유로 국민들의 생활도 완전히 통제되었다. 캄보디아 국민들은 국가가 만든 집단 농장에서 [[https://ja.wikipedia.org/wiki/%E3%83%95%E3%82%A1%E3%82%A4%E3%83%AB:Khmer_rouge_clothing.jpg|검은색 옷]]과 폐타이어로 만든 신발을 신고, 남자는 챙 모자를 쓰고 빨간 스카프를 매야 했으며 모든 여자는 단발머리를 해야만 했다. 심지어 어디에서 살지, 누구와 결혼할지, 무엇을 먹을지, '''언제 잠을 잘지까지'''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오직 국가만이 이를 결정할 수 있었다. 일례로 당시 캄보디아에서는 시계도 '부자와 빈자 사이에 심한 계급 분열을 일으키는 사치품'으로 분류되어 금지되었다.[* 크메르 루주는 '한 개인이 나머지 국민이 가지지 못하는 물건을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크메르 루주 수뇌부는 수입 사치품에 접근할 수 있었고 폴 포트도 외제차까지 보유한데다 호화로운 식사를 즐겼으며 몰락 후인 1988년에도 아내에게 준다며 [[중국]]에서 [[손목시계]]를 구매하는 사진이 남아 있다. [[https://www.gettyimages.ca/detail/news-photo/pol-pot-buying-a-watch-for-his-wife-in-beijing-in-china-in-news-photo/624132568?adppopup=true|#]]] 여기에 크메르 루주는 유리를 깨거나 쟁기질하는 동안 소를 잘 다루지 못하는 것과 같은 사소한 실수까지도 사형으로 다스렸고, 전통적인 장례식도 금지시켜 죽은 사람은 화장 대신 구덩이에 집단으로 던져진 후 대충 파묻는 것으로 처리했다. 자살은 정권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다며 금지당했고, 자살한 사람의 가족은 '적의 가족'으로 취급되어 처형되어야 했다. 또한 보통 일주일에 두 번씩 열리는 [[생활총화|생활모임]] 시간엔 [[자아비판]]이 강요되었는데 고참 지도부의 지휘하에 각자 자신이 잘못한 일과 최근에 한 활동을 공개적으로 자백했다. 남녀노소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크메르 루주의 모든 간부들이 참여해야 했다. 이 자아비판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은 상호감시와 잘못에 대한 고발이였기 때문에 서로를 계속 경계하고 의심해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판사도 545명 중 '''4명'''만을 제외하고 모두 살해함으로써 법원과 재판도 모두 없어졌다. 뿐만 아니라 크메르 루주 이전까지 1년에 300편 이상의 영화가 만들어지고 동남아시아 쪽에서도 제법 인기를 끌었다는 캄보디아의 영화[* 당장 노르돔 시아누크 국왕부터가 직접 영화를 만들었을 정도로 열렬한 영화 매니아였다.] 산업은 말 그대로 궤멸되었고 상당히 수준이 높았던 캄보디아의 대중적 가수들도 '오래되고 부패한 캄보디아에 대한 '나쁜 기억'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상당수가 처형되거나 실종되면서 캄보디아의 음악계도 궤멸 수준까지 갔다.[* 대표적으로 '캄보디아의 [[엘비스 프레슬리]]'라고 불렸으며 [[크메르 공화국]]을 지지했던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 신 시사뭇(Sinn Sisamouth, 1932?~1976?)도 크메르 루주 시기에 행방불명되었다.] 이렇게 캄보디아 내에서 모든 형태의 예술적 표현이나 오락은 금지되었고 혁명가와 사상을 전파하는 시만 허용되었는데, 폴 포트는 '과거를 지우면 처음부터 새로운 혁명 문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고 한다. 언론의 자유도 크게 제한되어 '''모든 언론이 소멸했는데,''' 1966년 2월 2일에 설립된 국영 TV 방송국이던 TVREK는 크메르 루주가 집권한 바로 당일에 크메르 루주와 관련된 뉴스가 끝나기가 무섭게 크메르 루주에 의해 모든 시설이 파괴되고 스태프들도 모두 처형되었으며[* 참고로 TVREK는 TVK라는 이름으로 1983년 12월 3일에야 재건되었고 1986년 7월 19일에 흑백 방송에서 컬러 방송으로 전환했다. 참고로 캄보디아는 세계에서 가장 늦게까지 흑백 방송만 송출하다가 컬러 방송으로 전환한 나라이기도 하다.][* 여담으로 크메르 루주 반군 실무자들은 농촌 출신의 젊은이들이 많았는데, 당시 캄보디아는 도•농간 격차가 엄청났던 데다 1960년대 후반 이후의 혼란기로 인프라 개발이 지체되면서 전기가 안 들어오는 시골도 부지기수였고 교육을 받지 못한 문맹자도 많았다. 그들에게 도시 문명의 모든 것은 부의 상징이자 증오의 대상으로 보였고 자동차, 라디오, TV, 전자기기는 '있는 놈'들의 물건이었다. 캄보디아에서는 1966년에 TV 방송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당시 캄보디아의 정세가 혼란해서 경제사정이 좋을 리는 없었기 때문에 텔레비전의 대중화는 요원한 상태라서 부유층의 물품이기는 했다. 그리고 캄보디아와 다르게 경제가 성장 중이던 인도네시아와 태국에서도 TV는 아직 부자들이나 가질 수 있는 물품이었고, 이들 국가에서 TV는 1980년대 이후에야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도 1975년 기준으로 3가구 당 1대꼴로 TV가 보급되었는데 도시지역은 어느 정도 TV가 보급되었지만 시골이나 달동네에서는 저녁이나 주말이면 TV 본다고 TV있는 집에 가거나 만화방에 가는 것이 보편적인 풍경이었을 만큼 아직 보편적인 대중매체는 아니었다. 다만 캄보디아에서도 자동차는 아직은 있는 놈들의 것이긴 하지만. 이러한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잡혀간 사람도 엄청나게 많았다. 당대 한국 기준으로 보면 TV는 1970년대에 들어와서야 보급되기 시작했고 자동차는 아직 대중화되기조차 전이었지만 라디오는 한국이 한창 가난했을 시절인 1960년대에 대중화되었고 이는 다른 개발도상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라디오 방송도 같은 날부터 크메르 루주의 선전 방송 빼고는 모두 금지되었고 민간 신문 간행도 모두 금지되었으며 각 가정이 보유하던 모든 전화기들은 몰수 후 폐기되었다. 물론 책을 똑바로 들었다는 이유로 지식인으로 몰려 죽은 사람도 있던 판이었으니 읽을거리도 당 간부를 위한 기관지 두 종과 프놈펜의 각료를 위한 신문 '파데밧'[* '혁명'을 의미한다.]을 제외하면 모두 금지되었고 일반적인 캄보디아 국민들은 당연히 이에 접근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했다. 그리고 크메르 루주는 [[북한]]과 [[이디 아민]]의 선례를 따르듯 [[려행증|현지 크메르 루주 당국의 허가]] 없이는 국민들이 다른 지역(심지어 바로 옆 마을도!)을 왕래하는 것조차 금지시켜 허락도 없이 다른 지역으로 가려는 사람들은 즉결로 처형한 데다 행정부의 한 부서의 관리가 다른 부서로 방문하는 것까지 허가를 받아야 가능하게 해 이동의 자유를 완전히 없앴고 심지어 '''폴 포트마저''' 프놈펜의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 군사검문소에서 검문을 받게 할 정도로 이 정책을 강경히 밀어붙혔다.[* 참고로 폴 포트는 이러한 이동의 자유 통제를 어길 수 있는 권한이 있었는지 상술했듯 [[론 놀]]의 소유였던 [[메르세데스-벤츠]]를 가지며 전용 운전사까지 데리고 자유롭게 국내 시골 여행을 다녔으며 그 외에도 면 단위의 서기장들은 자전거를, 시나 군 단위의 서기장들은 오토바이를 보유했으며 도 단위의 서기장들과 그 이상은 자동차를 보유했다. 참고로 폴 포트의 메르세데스-벤츠 차는 폴 포트의 몰락 후에는 한 농부가 판매할 수박을 운반하는 용도로 쓰다가 2000년 한 영국인 금융 컨설턴트가 구매했다고 한다.] 심지어 크메르 루주는 이도 모자라 사람들이 서로 모여 농장에서의 참상을 공유하며 변화를 추진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감독되지 않은 2인 이상의 모임을 완전히 금지시켜 결사의 자유까지 완전히 없앴다. 상술한 것처럼 '엉까'를 숭배하라는 세뇌 교육은 지속적으로 자행되었지만 의외로 [[김일성]], [[마오쩌둥]], [[차우셰스쿠]], [[멩기스투]] 등 다른 공산독재자들과는 다르게 당시 캄보디아에서 폴 포트에 대한 대대적인 [[우상화]]는 자행되지 않았는데 이는 폴 포트가 집권 2년 후인 1977년에야 공식 석상에 모습을 나타낼 정도로 극도로 외부 노출을 꺼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폴 포트의 공식 석상 첫 출현 직후에 당시까지 생존해 있던 미술가들에게 폴 포트의 공식 초상화와 반신상을 만들라는 지시가 내려졌으나 이들 중 선전용으로 쓰인 것은 없다시피했고 1979년 베트남군의 침공으로 크메르 루주 정권이 붕괴되면서 흐지부지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