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킬링필드 (문단 편집) === 긴 내전의 끝 === 어쨌든 수렁에 빠져 있던 베트남군은 1989년 9월에 캄보디아의 자치 능력 향상과 [[동유럽 혁명]]의 여파로 철수했고 괴뢰정권인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은 자동 해체됐다. 당시 총리에 있던 훈센은 베트남군이라는 배경을 잃고 세력이 약화되어 내전은 더욱 수렁에 빠졌다. 결국 1990년 6월 4일~5일, 크메르 루주와 시아누크 전 국왕의 [[푼신펙]], 손 산 전 총리의 KPNLF 등 3개 정파가 참가하는 평화를 향한 직접 대화의 장소로서 캄보디아에 관한 '''도쿄 회의'''가 개최되었다. 다음해인 1991년 10월 23일, '''캄보디아 평화 파리 협정'''이 개최되어 최종 합의문[* "국제 연합 캄보디아 잠정 통치기구(UNTAC)"의 설치, 무장해제와 내전 종결, 난민의 귀환, 제헌의회 선거의 실시 등]에 19개국이 승인함으로써 20년에 이르는 캄보디아 내전이 종결되었다. 캄보디아 평화 파리 협정으로 [[훈 센]] 정권과 민주 캄푸치아 연합정부를 통합한 4개 계파에 의한 캄보디아 최고 국민 평의회(SNC)가 결성되었다. 다음해인 1992년 2월부터, 유엔 캄보디아 잠정 통치기구(UNTAC)가 평화유지 활동을 시작했다. 이 와중에 외국군을 위한 [[매춘|매매춘]]이 극성을 부렸고, 그 결과 [[에이즈]]가 창궐하기 시작했다. 1993년 5월에는 국민의회 총선거가 실시되어 입헌군주제가 채택되었고, 시아누크 국왕이 복위된 후 국민들도 절망을 버리고 점차 자신의 힘으로 나라를 가꿀 의지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크메르 루주의 수장인 [[폴 포트]]가 1998년 사망하여 잔존세력이 완전히 소탕되기 전까지 [[앙코르와트]] 유적군의 외곽 지역(쁘레아 뷔히어, 오다 멘쩨이)은 [[장갑차]]를 타고 가야 할 만큼 완전한 평화라고 부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79년에 크메르 루주가 베트남군에 의해 전복될 당시 베트남 괴뢰정부 쪽에서 크메르 루주 축출에 가담한 인물들은 여전히 정치권에서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들이 바로 총리가 되어 2023년까지 집권한 후 아들에게 총리직을 세습시킨 훈 센과 93년 정부 수립 이래 굳건한 여당인 CPP(캄보디아 인민당)의 주요 인물들이다. 그런데 사실 훈 센 역시 부패한 독재자인지라, 캄보디아는 어느 정도 경제가 성장하긴 해도 2023년 기준으로도 1인당 GDP가 1,896$(195개국 중 152위)에 불과한 빈국으로 남아 있다. 또한 내전기의 베트남과 괴뢰정부에 대해서는 책임을 거의 묻지 않는 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