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킬링필드 (문단 편집) === 도시민 강제 이주와 강제 노동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크메르 루주의 강제 이주.png|width=100%]]}}}|| || {{{#fff '''[[1975년]] 4월 17일 [[프놈펜]]의 시민들이 강제로 추방되는 모습'''}}} || 크메르 루주는 도시가 자본주의의 온상이자 공산주의를 방해하는 원흉이라고 보았는데 그들은 도시민을 인간 개조가 필요한 '신인민'이라고 부르면서 프놈펜을 포함한 모든 도시민들을 농촌에 강제로 이주시켜 공산주의 사상을 다시 배우게 하는 작전을 계획했다. 크메르 루주는 이 계획을 정권 장악 이틀밖에 안 된 1975년 4월 19일[* 참고로 캄보디아 패널에 의하면 저 때가 바로 캄보디아의 명절이었다고 한다. 즉 가족끼리 모여 행복하게 지낼 날이 최악의 악몽이 되어 버린 것.] 오전 10시 반에 [[미군]]의 [[공습]]이 있을 것이라는 거짓말을 이용해 프놈펜을 포함한 모든 도시에 살던 사람들을 도시에서 강제로 나가게 한 것으로 시작했다. 먼저 군인들은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총을 들이대며 협박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쫓아냈으며,[* 더 기가 막힌 건 자본주의와 지식에 물든 도시인들이 가득하다고 믿은 크메르 루주의 생각과 달리 당시까지 프놈펜에 살던 사람 250만 명 중 무려 '''200만 명'''이 전쟁으로 삶의 터전을 잃고 프놈펜으로 피난을 와 프놈펜에 정주하던 친척의 집에 얹혀 살거나 판자촌에서 살아가야 했던 난민들이었다. 이 때문에 명색이 수도이자 한때 동남아시아의 파리로 불렸던 프놈펜에는 단 '''5천 명'''만 남았다고 한다.] 조금이라도 의심을 품거나 24시간 이내에 나가길 주저하면 곧바로 그 자리에서 죽였기에 사람들은 제대로 된 준비 하나 없이 강제로 집에서 쫓겨난 후 10대 병사 두세명 정도가 관리하는 행렬에 가담하게 되었다. 크메르 루주는 강제 이주를 할 때에 '2~3km만 이동하면 2~3일 후에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거짓말을 쳤지만 현실은 사실상 모두가 2~3년이 넘어도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 강제 이주는 매우 끔찍했다고 한다.[* 더 비극적인 것은 외신 기자들은 이를 보고 도시의 식량 부족과 과잉 인구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조치로만 생각했다는 것이다.] 하필 강제 이주 무렵인 4월 중순은 우기 직전이라 기온이 40도 이상으로 치솟는 등 유난히 날씨가 더웠다고 하며[* 참고로 4월 중순은 캄보디아에서 1년 중 제일 더운 시기라고 한다.] 이 와중에 도시를 빠져나가는 사람들로 도로가 꽉 차 5일 동안 13km밖에 걷지 못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겨우겨우 외진 곳으로 걸어가는 과정에서 멈추거나 대화하거나 웃거나 울고 힘들어서 차에 태워 달라고 요청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혹은 일단 태워 준 뒤 모두 처형했다고 한다. 당연히 크메르 루주는 강제 이주 과정에서 중환자, 임산부, 어린이와 노약자도 조금도 배려하지 않아 200미터마다 아이들의 시체가 하나씩 보였을 정도였고 부모들은 아이들을 버리고 갔으며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울부짖었다고 한다. 또 다른 증언에 의하면 가족이 행방불명돼서 그 가족이 돌아올 때까지만 도시의 집에서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하자 크메르 루주는 그렇게 집에 있고 싶다면 죽을 때까지 집에 있으라면서 문에 쇠사슬을 묶은 채로 그 사람을 감금했고 이렇게 감금된 사람은 물도 마시지 못해서 결국 사망했다고 한다. 그 혼란 속에서 이주 과정에서만 열대우림 환경에 기아와 질병 등까지 겹치며 1만~2만 명이 아사하였고 1975년 한 해 동안 도시 이주민 중 무려 '''1/3'''이 사망했다.[* 심지어 이주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 중에는 '''폴 포트의 형'''이자 폴 포트의 사상에도 영향을 준 캄보디아의 유명한 좌익 언론인 살로스 차이(Saloth Chhay, 1920?~1975)도 있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며칠 안 지나 캄보디아에 있는 다른 도시에 살던 사람들도 모두 이와 같은 강제 이주를 당했다.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크메르 루주의 강제 노동.png|width=100%]]}}}|| || {{{#fff '''[[1976년]] 캄퐁참 지방에서 관개 작업을 하는 캄보디아인들'''}}} || 이렇게 강제로 이주당한 모든 사람들은 정글의 [[집단농장]]에 있는 폭 2~4m, 길이 3~6m 정도의 전기와 수도도 없는 오두막으로 강제로 옮겨져 '인민 공사'에서 강제적으로 살아가게 되었으며 1976년 1월부로 캄보디아 국민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인민공사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집과 터전을 잃고 집단 농장에서 살게된 모든 국민들은 새벽 4시부터 오후 5시까지 한 차례의 휴식 시간(아침 10시~낮 1시)을 빼면 10시간에 달하는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는데, 특히 '새 사람'들은 오후 7시부터 밤 10시까지 추가적인 야간 노동을 해야 해서 총 13시간 동안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가장 고강도의 노동을 해야만 했다. 오두막이 농장과 비교해 너무 멀리 떨어진 경우도 있어서 오두막에서 수 킬로미터를 걸어서 집단농장으로 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후에는 노동 시간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데 휴식 시간은 더 짧아지며 아예 아침 식사도 안 먹이는 일들이 흔해졌고 심지어 저녁 식사마저 안 주거나 문자 그대로 '''자정 이후에도 일하는''' 경우까지 생겼다.[* 이는 쉽게 말해 캄보디아 국민들 중 가장 극단적인 경우에는 (저녁 시간만큼은 휴식을 허용했다고 가정해도) 새벽 4시부터 자정이 넘어서까지 '''18시간 이상'''을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국가/유럽#s-1.4|강제로 노동해야 했다는 소리다!]] ] 휴일은 10일에 한 번씩만 있었고 그 휴일도 정치회합에 참여하는 걸로만 채워졌다. 예외적으로 전통적인 설이자 크메르 루주가 집권한 시기인 4월 중순에는 3일간의 휴가가 주어졌다. 물론 화폐가 소멸했으니 이들은 모두 완전한 무급과 배급을 받으면서 일했다.[* 폴 포트는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1백만 리엘이 있다면 우리는 이 돈을 모두 국가를 건설하고 지키는 데 쓸 것이다.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절반만 국가 건설과 방위에 쓰고, 나머지 반은 임금을 지불하는 데 쓴다. 그래서 그 국가들은 우리보다 50만 리엘만큼 뒤쳐진다."는 말을 남겼는데 이 자리에 있던 [[키우 삼판]] 주석(경제학 박사 출신)은 이 황당한 말을 듣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었다.] 크메르 루주는 "방조제가 있으면 물이 있고, 물이 있으면 쌀이 있고, 쌀이 있으면 모든 것이 있다"는 타이틀을 내걸고 노동자들을 3개의 '군'으로 조직했는데, 첫 번째 부대는 15~40세 정도의 미혼 남성들로 구성되어 관개시설 건설을 담당했으며 두 번째 부대는 기혼 남녀로 구성되어 쌀 농사를 담당했고 세 번째 부대는 4세 이상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직물 짜기나 바구니 만들기처럼 비교적 덜 힘든 일을 담당했다. 이후 크메르 루주 치하의 모든 캄보디아인들은 '살고자 하면 반드시 죽고,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산다'는 슬로건과 함께[* 물론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이순신]] 장군의 [[필사즉생행생즉사]]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농사철에서는 논에서 농사를 지어야만 했고 나머지 기간에는 맨몸으로 운하와 댐, 제방, 총연장 1만 5천km에 달하는 수로 등의 관개시설 건설에 강제로 참여해야만 했는데 이 과정에서 실수를 하거나 반항하는 사람들은 '살려 둬도 이익이 없고, 없애도 손해가 없다'는 막말을 들어가며 끌려간 후 무자비하게 구타당하거나 총살당했다. 이때 크메르 루주는 처형당한 사람들에게 '코코넛으로 환생하라'는 막말을 퍼부었다. 당연히 이런 노동에 '자본주의의 잔재'인 기계가 사용되는 일은 전혀 없었다.[* 상술한 후 님은 크메르 루주 최고지도부에게 '농업 생산량 향상을 위해 기계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자 '농업에서 외국 기계를 사용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자가 아닌 자본주의자의 사고방식이다'라는 답변을 들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캄보디아에서는 만삭의 임산부까지 목까지 잠길 정도로 깊은 강 속에서 추운 우기에 운하 작업을 해야 해서 다리와 발이 퉁퉁 부어오르고 출혈이 생겼을 정도였다고 하며 크메르 루주는 철로도 맨손으로 만들도록 시켰고 한 생존자는 농장에는 [[링거]]를 꽂은 상태로 링거를 당기면서 걷는 환자와 혼자서 출산하는 임산부들도 많았는데 그 풍경은 가히 지옥과도 같았다고 증언했다. '일하기엔 너무 약하다', '할당량만큼 생산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이 죽어나갔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으며 높은 할당량을 못 채운 사람은 살아남더라도 여분의 일을 더 하거나 더 적은 식량 배급을 받아야만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