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킬링필드 (문단 편집) ==== 심각한 [[기근]]과 무책임한 대응 ==== 이러한 무자비한 정책으로 농촌의 노동력은 어느 때보다 많았지만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기근]]에 시달렸다.[* UN의 보고에 따르면 1975~1980년 캄보디아의 영유아 사망률은 1000명당 319.24명이었는데 이는 1950년 이후 각 국가들의 영유아 사망률 수치 중 가장 높은 수치다.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countries_by_infant_and_under-five_mortality_rates#Infant_mortality_from_the_United_Nations_population_division_(from_birth_to_1_year-olds_only)|참고 자료]] 다만 크메르 루주 치하에서의 캄보디아의 GDP 수치는 불명인데 사실 1975년부터 1992년까지의 캄보디아의 정확한 GDP 수치는 [[세계은행]]의 통계가 없다. 이는 크메르 루주의 축출 후에도 캄보디아가 내전에 시달렸던 것의 영향이 크다.] 캄보디아는 농사 짓기 좋은 환경이어서 해마다 약 [[https://ipad.fas.usda.gov/highlights/2010/01/cambodia/|2백만 톤의 쌀을 생산]]하는 국가였지만 1975~76년에는 비축한 쌀이 전혀 없었고 1977년이 되어서야 쌀 수만 톤을 수출하게 되었고 1978년에는 농촌 지역의 땅들 대부분이 경작되지 않은 채 버려졌을 정도로 국가가 초토화되었다.[* 이런 현상은 캄보디아 뿐만 아니라 [[소련]], [[중국]], [[북한]]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난 참상이기도 했다.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 없다시피하니 사람들은 감독관에게 걸리지 않을 만큼 일만 하게 되고 감시로 강제노동을 시켜도 노동의 질까지는 개선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폴 포트가 1976년에 농산물 생산과 수출을 대대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4개년 계획을 발표하며 '다른 무엇보다도 쌀이 압도적으로 중요하며 이에 따라 쌀 생산량을 이전의 3배인 1헥타르당 1톤에서 1헥타르당 3톤으로 늘려야 한다'며 국민들을 강제노동에 동원한 것을 감안하면 처참하기 그지없는 결과였다. 물론 폴 포트는 이 수확량을 위해 '서구 문물'인 화학 비료 대신 동물의 배설물과 충적토 등을 쓰라고 지시했으며 이에 따라 어린이들과 노약자들은 비료로 쓸 배설물과 사람의 시체를 모아야 했다. 이렇게 수확량이 떨어져도 크메르 루주의 관리자들은 처벌을 회피하고자 목표량을 달성하거나 초과했다고 상부에 허위 보고하거나 사망자 수를 줄여서 발표하고 사망자에게 돌아갈 식량을 빼돌리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정부는 이를 토대로 군대나 행정기관에 공급하고 전략물자로 비축할 쌀을 징수해 갔다. 그러고도 크메르 루주는 중국으로부터 무기를 얻을 자금을 얻기 위해서[* 크메르 루주가 외국으로부터 얻은 자금의 '''최소 90%''' 가량을 중국 혼자서 제공했다고 한다.] 이렇게 수확한 작물들 대부분을 '최전선 전사를 위한 것'이라는 명목으로 수탈한 후 대부분의 농작물을 수출했고 주민들에게는 [[이엥 티릿]] 사회부 장관이 '밥을 지을 필요 없이 일하고 와서 그냥 밥을 먹으면 된다'는 말을 남긴 것처럼 다 함께 하나의 급식소에서 하루 2잔의 멀건 쌀죽[* 2017년 6월에는 킬링필드 치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한 캄보디아인이 이 음식을 재현했는데 당시 크메르 루주가 제공한 죽은 맹물 수준으로 묽었으며 양조차 밑바닥이 '''선명히 보일 정도로''' 적었다고 한다. [[https://steemit.com/food/@chantha/cambodian-pol-pot-regime-porridge-shows-again-in-2017|링크]]. 벌거벗은 세계사에 출연한 캄보디아인 패널이 이 쌀죽의 대략적인 제조법을 설명했는데, 큰 가마솥에 물을 가득 붓고, 쌀을 딱 두 컵만 넣은 뒤 나뭇잎을 몇 개 던져넣고 끓인 것이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죽은커녕 [[미음(동음이의어)#s-2|미음]]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맹물인 셈이다. 참고로 그 악명높은 '''[[아우슈비츠 절멸수용소]]'''에서도 이 정도로 가혹한 배식은 하지 않았다(이 죽과 별 다를바 없는 멀건 야채수프를 지급하긴 했지만 여기에 질이 많이 떨어지는 작은 빵조각과 폐야채를 태워 만든 가짜 커피에 담배까지 배급했었다).]만 허용했는데 심지어 병이 들어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이 맹물에 가까운 조잡한 쌀죽조차 [[아사|한 숟가락도 주지 않았다]]. 게다가 크메르 루주는 음식이라 하기 힘든 이런 음식을 먹으며 맛없다고 하거나 겨우 '국수를 배불리 먹고 싶다'고 중얼거리는 사람들이 보이면 바로 끌고 가고 처형했으며 병에 걸려 노동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도 '인력을 잃게 만들었었다'고 모함하거나 '[[의지드립|혁명의식의 결핍]]'이나 정권에 대한 반항, 심지어 '일을 기피하고 더 많은 음식을 얻기 위해 꾀병을 부린다'고 주장했다. '병자들은 그들 자신의 상상의 희생자들이다', '우리는 자신이 아프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을 제거하고 우리 사회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슬로건을 만들기도 했으며 환자들을 위한 약과 휴식을 거의 주지 않았다. 그리고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것은 '가상의 질병'에 걸린 것으로 여겨졌고 열악한 노동 조건과 식량 배급에 불만을 품거나 기근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사형으로 다스렸다. 참고로 폴 포트는 '''집권 초기'''인 1975년 8월에 서남지대를 방문하고 이주한 사람들 대부분이 고통을 겪고 있고 식량과 의약품이 부족하다는 것을 목격했으나 폴 포트는 '''이주민들의 고통보다는 식량 부족으로 인한 노동력 약화를 더 심각하게 여겨''' 각 지역의 생산할당량에 맞춰 인구를 재배치할 것을 지시했고, 이에 따라 크메르 루주는 '프놈펜이나 바탐방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갈 지원자를 모은다'는 명분으로 '지원자'들을 모으고 이들을 대부분 캄보디어의 대표적 곡창비대인 서북지대로 보냈다. 그리고 폴 포트는 '''__매주마다__''' 각 지역 지도자들이 보낸 상세한 보고서를 통해 국민들의 고통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1976년 말에는 당 지도부의 비공개회의에서 '농촌 지역의 3/4이 심각한 식량부족을 겪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도 기근을 ''''사소한 일''''로 치부하며 대책을 제대로 마련하지 않았다. 그나마 후자의 회의에서 폴 포트는 '이것은 우리의 실수다'라고 하면서도 이것이 자신의 정책상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혁명에 대한 태도와 혁명의식이 미약하기 때문이라고 진심으로 주장했다. 덤으로 폴 포트는 1976년 12월에 중앙위원회 회합에서 식량 부족의 이유가 '숨어 있는 적들의 식량 약탈과 적들에 의한 자기들의 지령 왜곡, 적들이 인민들이 병에 걸리던 말든 강제로 일을 시키며 인민들을 학대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원래 크메르 루주는 1인당 하루 배급량을 570g 정도로 약속했으나 실제 배급량은 많으면 500g 정도였고 배급량이 250g에 불과한 지역도 있었으며, 심한 경우에는 340g짜리 깡통의 절반 정도인 '''약 180g''' 정도만 배급되는 경우까지 있었다고 한다.[* 하루 권장 영양공급량인 2천-2500kcal를 쌀로 환산하면 600~700g 정도다.] 그런데도 크메르 루주는 시간이 지나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음식 배급량을 도리어 더욱 줄였다. 이렇게 양과 질 모두 형편없는 음식만 먹어야 했던 사람들은 너무나 굶주린 나머지 수유기 여성들의 젖이 나오지 않고 생리가 멈출 정도로 기아상태에 빠졌다. 결국 사람들은 살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수렵채취로 기아를 면했으며 독이 있거나 덜 익은 동식물은 물론이고 돼지가 먹을 사료, 나뭇잎과 나무껍질, 흙을 넘어 심지어 [[인육]]을 먹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벌거벗은 세계사]]에 출연한 캄보디아인 패널인 위살봇의 증언에 따르면 사람들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도마뱀이나 바퀴벌레를 잡아먹었고 본인의 외할아버지도 이때 기아로 인한 염분 부족 상태로 사망했다고 한다. 또 폴 포트 치하에서 너무나도 어린 나이에 부모님, 큰언니, 여동생을 잃은 캄보디아계 미국인 여성 인권 운동가 로웅 웅(Loung Ung, 1970~)의 증언에 따르면 독이 든 음식을 먹고 죽은 남편의 살을 너무 배고팠던 나머지 자기의 아이들과 나눠 먹은 한 여성이 독에 중독되어 아이들과 같이 목숨을 잃어 한 가족이 몰살되는 참혹한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폴 포트는 살기 위해 인육까지 먹어야 한 사람들이 적발되면 목까지 땅에 파묻어 죽을 때까지 내버려 둔 후 죽으면 [[효수]]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로 삼게 했다. 게다가 크메르 루주는 식량과 물물교환을 하는 것을 반역 행위로 간주해 식량과 물물교환을 하다가 걸린 사람은 무자비한 [[폭행]]을 당하면서 관련된 모든 사람의 이름을 털어놓아야 했다. 물론 식량을 기르는 밭들은 무장한 군인들이 지키며 주민들이 식량을 몰래 가져가는 것을 막았으며 심지어 여자들이 밭에서 식량을 훔치다 걸리면 그 군인들은 걸린 여자들이 '''아무리 어려도''' 봐주지 않고 [[강간]]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크메르 루주는 정부가 정하지 않은 야채와 채소를 기르는 것은 물론이고 물고기를 잡거나 야생 망고 하나를 채취하는 등의 수렵채취도 '''사람들마다 수렵채취로 구한 것들의 양이 다르니 평등하지 않다'''는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금지시켰으며 심지어 농장을 휘젓고 다니는 멧돼지를 죽이거나 '엉까의 소유물'로 간주된 땅에 떨어진 과일을 줍는 것까지 '민간 기업 활동'이나 '집단 재산 절도'로 간주해 처형으로 다스렸다. 그리고 감자를 잡다 들킨 사람은 '''현장에서''' 총살되었으며 작물을 먹는 새들을 쫓는다는 명목으로 과일나무들을 모두 베어버려 과일 채집까지 막아 버렸다. 게다가 크메르 루주는 "배고픔은 가장 효과적인 질병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음식을 갖게 되면 공동체의 음식 분배가 부적절해진다. 우리는 모두 평등해야 하기 때문에 한 사람이 굶주리면 모두 굶주려야 한다.", "인민의 재산에서 손을 떼십시오! 쌀 한 알, 고추 한 알, 바늘 한 알도 안 됩니다!"는 등의 말들로 국민들의 아사를 조장했다. 그러한 정책의 결과가 가져온 여파는 장기적으로 이어졌는데 크메르 루주가 축출되고도 반 년도 더 지난 시점이었던 1979년 10월 8일자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폴 포트의 퇴진 후에도 캄보디아 아동의 영양실조율은 무려 '''90%'''에 달했고 식량배급량은 겨우 '''130g'''에 불과해 많은 사람들이 [[곤충]]을 잡아먹으며 연명했다고 하며 당시 캄보디아의 참상은 '''크메르 민족 자체가 소멸될 위기에 처해 있다'''고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처참했다고 한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79100800329202002&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9-10-08&officeId=00032&pageNo=2&printNo=10467&publishType=00020|출처]] 크메르 루주가 집권할 동안 27만 명의 캄보디아인들이 민주 캄푸치아를 탈출하여 태국 난민 수용소에서 살아가야 했으며 1979년에 태국 난민 수용소에서 일했던 의사 존 콜린스 하비(John Collins Harvey)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8세에서 11세라고 생각한 소년들이 사실은 16세에서 20세였다'라고까지 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했다. '''곧 성인이 될 청소년들이 하도 굶어서 영양부족에 시달린 나머지 몸집이 초등학생 수준으로 줄었다'''는 뜻이다.[* 이와 비슷하게 [[우크라이나 대기근]]도 "어른들은 아이들처럼 줄어들어 버렸고, 아이들은 어른들처럼 늙어버렸다."는 언급이 있다.] 크메르 루주는 [[농학]]에 무지하여 국토마다 기후와 환경이 다른데도 모든 지역이 '''동일한''' 농사 일정을 따라야 한다는 규범집을 만들고 이를 강요했다. 또 기껏 건설한 관개시설도 공학적 지식이 전무한 크메르 루주 간부들의 명령에 따라 만들어졌기에 제 기능을 할 리가 없어 제대로 된 효과를 보지 못했다. 더구나 폴 포트는 서양 의학을 '자본가의 발명품' 정도로만 여기며 서구식 병원과 의학 도서관을 모두 불태운 후 의사들이 스스로 자급자족하며 사람들을 치료하는 방법을 알아가야 한다며 10대 소년들을 아무런 훈련과 기본적인 지식 전수 없이 환자들을 치료하게 했는데, 그 소년 의사들은 다양한 식물의 혼합물을 융합한 것을 코코넛 주스에다 용해한 뒤 재활용된 더러운 바늘로 주사하거나 '''환자에 대한 기본적인 마취 하나 없이''' 환자들을 '치료'했다고 한다[* 이 소년 의사들이 얼마나 함량 미달이었냐면 후에 캄보디아의 총리가 될 크메르 루주 부대장 [[훈 센]]의 장남이 의사의 실수 때문에 떨어져 죽었다는 '''실화'''가 있다. 심지어 당시 훈 센은 '''첫 자식을 봤다는 소식을 듣기 전이었다고 한다.''']. 물론 폴 포트는 이를 '혁명적인 의학'으로 자화자찬했지만 자신들도 이런 '서구적이지 않은' 치료는 받기 싫었는지 크메르 루주 수뇌부들은 아프면 중국까지 가서 서구식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상술한 것처럼 국민들은 심각한 기아에 시달렸으나 정작 크메르 루주 수뇌부들은 국민들이 배급받는 쌀죽을 같이 먹어가며 솔선수범하기는커녕 '[[백두혈통]]'과 마찬가지로 너무 잘 먹고 잘 산 나머지 오히려 '''집권 이전보다 살이 더 찔 정도였다.''' 예를 들어 시아누크 국왕은 중앙위원회 병참부로부터 각 지방의 특산 과일[* 푸르삿의 오렌지, 캄포트의 두리안, 람부탄, 파인애플 등이었다고 한다.]과 외국산 음식[* 일본산 화과자, 호주산 버터, 프랑스식 바게트빵, 오리알 등이었다고 한다.], '맛 좋은' 캄보디아산 게를 공급받았으며 이엥 사리는 시가와 코냑에 대해 뚜렷한 취향을 가졌을 뿐더러 UN 총회에 다녀오는 길에 푸아그라와 스위스 치즈가 든 바구니를 들고 왔다. 덤으로 폴 포트는 당시로서는 호화로운 음식이었던 코브라 수프[* 그가 매우 좋아하던 음식으로, 폴 포트는 이 음식을 뱀의 피를 컵에 담은 것과 같이 먹었다고 한다.], 사슴 및 멧돼지 고기, 신선한 과일, 브랜디, 중국산 술을 즐겨 먹었다. 당장 [[폴 포트]] 문서 최상단의 사진을 봐도 [[https://www.economist.com/cdn-cgi/image/width=834,quality=80,format=auto/sites/default/files/images/2004/11/articles/main/20161210_blp505_hr.jpg|집권 전 사진]]과 비교하면 얼굴에 살이 많이 붙은 것을 볼 수 있다. [[http://cambodialpj.org/article/justice-and-starvation-in-cambodia-the-khmer-rouge-famine/|크메르 루주의 농업 정책과 기아에 대한 참고자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