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킬링필드 (문단 편집) === [[반지성주의]]에 입각한 대량 학살 ===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 정권은 [[자본주의]]나 외국과 관계되어 있거나 관계되었던 사람들, 그 중에서도 외국어를 구사하는 사람, 공무원, [[교수]], [[교사]], [[의사]], [[약사]] 등 전문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유학생들과 중산층 이상의 사람, 심지어 유명 스포츠 선수와 음악가를 포함한 예술가들, 즉 농민, 노동자 외에 모든 사람들을 사회의 장애물이자 악의 축으로 보아 전부 처형하거나 수용소에 가두었다. 문제는 크메르 루주가 지식인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매우 어처구니가 없었는데 그 유명한 '[[영어]]를 할 수 있다', '손바닥에 굳은 살이 없다', '[[안경]]을 썼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인 것은 매우 '''__양호한__''' 경우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캄보디아에는 펜을 가졌다는 이유는 애교였고 무려 '''책을 똑바로 들 줄 안다, 시계를 볼 줄 안다'''는 이유만으로 지식인으로 몰려 처형된 사람과 '''배가 나왔다'''는 이유로 부르주아로 몰려 처형된 사람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캄보디아의 의사들은 800명 중 40명만 살아남게 되었다. 킬링 필드의 광풍을 입증하는 엽기적인 에피소드가 있다. 1977년 7월 6일에 폴 포트의 파리 유학 당시 동창생이자 크메르 루주 정권의 정보선전장관이었고 온건파였던 후 님(Hu Nim, 1932~1977)이 반역죄 혐의로 악명 높은 강제 수용소 [[뚜올쓸라엥]]에 끌려가고 나서 아내의 처형으로부터 한참 지난 후 다른 126명과 같이 처형당했는데 처형 사유가 참으로 가관인 것이 무려 '''크메르 루주의 정권 장악 직후에 라디오 방송에서 피아노곡을 전국에 내보내서'''였다고 한다.[* 다만 이는 뚜올쓸라엥에서 고문을 통한 자백으로 알아낸 것이기는 하다. 뚜올쓸라엥의 고문으로 얻어낸 자백 중에는 폴 포트의 아내인 키우 폰나리(Khieu Ponnary, 1920~2003)가 CIA 요원이라는 황당한 내용도 있었기에 [[깡 겍 이우]] 뚜올쓸라엥 소장 본인은 물론이고 크메르 루주 수뇌부조차 그들의 자백이 모두 진실이라고는 믿지 않았고 그저 '장애물'로 간주된 사람들을 제거하는 것이 전부였다고 털어놓을 정도였다.] 후 님의 처형 3일 후 해외 음악은 물론, 제국주의의 산물이라고 본 테니스를 포함한 스포츠도 모두 금지되었고 유망한 테니스 선수들도 전부 숙청되었는데 이처럼 운동선수 2천여명이 자본주의자라는 명목으로 몰살되었다. 당연하지만 캄보디아의 전통 문화에 능통하던 사람들도 대량으로 학살당했으며 단순히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조차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교육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했으며, 심지어 단순히 학교 근처에서 놀던 일자무식의 아이들조차 '지식인'으로 몰려 살해당했다.[* 다만 화가들만은 그대로 놔뒀는데 이는 당시 크메르 루주가 폴 포트의 공식 초상화를 그릴 만한 화가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뚜올 슬렝에 구금되었다가 생존한 성인 수감자 7명 중 4명이 이 지시를 이행하도록 살려둔 미술가들이었다.] 이것 때문에 캄보디아에서는 문맹률이 굉장히 높아져 정보 전달을 위해 식당 간판에 접시를 그려넣는 등 거리의 간판에 그림을 그리는 사례까지 나타났다고 한다. 권력자의 학살 자체가 문제지만 그 명분마저도 근거가 부족하고 그 실행마저도 중구난방이다. 처형시킨 이유는 사실 핑계고 그냥 죽이고 싶어서 죽였다 수준에 가깝다. 폴 포트는 이를 합리화 하며 죄책감에서 도피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이런 극악무도하고 무식하기 그지없는 박해의 대상이 된 지식인들이 죽거나 숨거나 탈출하여 사라지자[* [[벌거벗은 세계사]]에 출연한 캄보디아 패널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의 외조부는 지방 고위경찰에 어머니도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 계층이라 숙청 대상 1호였으며 이 때문에 살기 위해선 눈이 있어도 못 본 척, 귀가 있어도 못 들은 척, 입이 있어도 못 말하는 척을 해야 한다고 대를 이어서 교육을 했다고 한다. 물론 후술하듯 숙청 대상 0순위에 가장 완벽하게 부합했던 사람들은 바로 크메르 루주 수뇌부였다.[[https://youtu.be/q7Z5sR-s5hs|#]]] 크메르 루주의 학살 대상은 농민들 중 협조적이지 않은 자들로 확대되었으며, 나중에는 당 중앙을 제외한 크메르 루주 간부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살해]]되는 내부투쟁으로까지 변해 버리면서 '''말 그대로 캄보디아 전역이 사지(死地), 즉 킬링 필드로 변모해 버렸다.''' 그리고 이 지식인 학살은 한창 [[우민화 정책|교육 현장에 종사해야 할 교사들마저 다 학살당했기 때문에]] 문화대혁명처럼 캄보디아 교육에 크나큰 '단절'을 가져왔으며 비교적 최근까지 캄보디아의 교사들 중에는 '''과학 실험을 직접 해 본 적이 없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기술이나 예산 문제도 있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이러한 '단절' 때문이며 자기들이 못 배웠는데 다음 세대를 잘 가르칠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유니세프]]의 통계에 따르면 킬링필드가 끝난 지 30여년이 지난 2007년 기준으로 [[프놈펜]]의 미성년자 중 30%대에 달하는 5~10만 명이 매춘에 종사했다고 하며 2008년 기준으로도 캄보디아의 '''중학교''' 취학률은 34%, 고등학교 취학률은 10%에 불과했을 정도였다.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F&nNewsNumb=201009100048|#]] 물론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는 캄보디아의 교육 체제도 어느 정도 정비되었을 테니 이런 일은 과거의 일이 되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크메르 루주는 교사들을 '''10명'''만 남겨놓고는 모두 몰살해 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