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킬링필드 (문단 편집) ==== 학살 방법 ==== 학살 수법도 참혹하기 그지없었는데 크메르 루주는 인간을 살육하는데만 쓰잘데기없이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인류가 탄생한 이래 그 이전에는 없었고, 그 후에도 없을 엽기적이고 피비린내나는 학살 방식을 선사했다.[* 이들의 학살 방법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베트남군이 캄보디아를 침략해서 후술할 S-21 수용소를 탈환했을 때 수용소 곳곳에 고문으로 심하게 훼손된 시신들이 여기저기 방치되어 있던 참혹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들이 쓴 가장 흔한 방법은 눈을 가린 뒤 팔을 뒤로 묶고 몽둥이를 이용해 죽이는 것이었는데 크메르 루주는 반동으로 낙인찍힌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묻힐 구덩이를 파게 하고 밖으로 나와 가장자리에 서게 한 뒤 몽둥이로 뒤통수를 쳐서 구덩이로 밀어넣어 죽였다고 하며 총알을 아끼기 위해 유난히 가시가 많은 설탕야자나무 몽둥이로 사람을 때리거나 손을 묶고 비닐 봉지를 머리에 씌워 질식시켰고[* 이것은 키우 삼판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구덩이나 우물에 사람들을 산 채로 몰아넣은 뒤 [[생매장|밀폐해 죽이기도 했으며]] 심지어 사람들을 일렬로 세운 뒤 한꺼번에 창으로 찔러 죽이기도 했다. 이렇게 크메르 루주는 50명에서 100명에 이르는 대규모 집단을 조직적으로 살해하는 것을 즐겼는데 어떤 경우에는 약 130명을 동시에 처형하기도 했다. 참수도 처음에는 정석적으로(?) 칼로 하다가 나중에는 가시가 달린 나뭇가지와 날카로운 야자수 잎줄기, 줄기 가장자리로 했고 아예 사람을 [[화형|산 채로 불태워 죽이는 것]]을 넘어 산 채로 타일 오븐에 넣어 죽이기까지 했다. 1996년 6월 7일에 타전된 방콕발 연합뉴스 기사에 따르면 크메르 루주는 민간인 학살에 고압선을 이용한 [[전기고문]]과 [[물고문]]은 물론, 사람을 고문 침대에 눕혀 놓고 쇳덩어리로 머리를 짓누르는 방법도 사용했다고 한다. 게다가 반동으로 몰린 사람들이 과거 정권에 협조했다고 불지 않을 때는 도끼로 손을 자르거나 산 속 나무에 묶어 이 나무를 오르내리며 먹이를 찾는 열대 붉은왕개미들로 하여금 살을 파먹게 했으며 심지어 이들이 여성일 경우에는 민감한 부분들을 도려냈다고 한다. 그리고 고문은 주로 크메르 루주에게 세뇌당한 10대 위주의 고문 기술자들이 맡았는데 이들은 고문 센터에서는 물론이고 사람을 죽이기 직전에도 고문을 가했다. 이들이 가한 고문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수감자들로부터 정보를 얻어내기 전에 수감자가 고문을 버티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을 정도였다. 크메르 루주의 고문 수법은 주먹질이나 몽둥이, 쇠파이프, 채찍, 전선 등으로 사람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거나 수감자의 팔을 뒤로 묶은 채 도르레로 끌어올려 어깨를 탈구시키거나 사람을 거꾸로 매단 후 오물이 담긴 바구니에 얼굴을 담그게 한 것 등이 있었다. 심지어 담뱃불이나 불에 달군 금속으로 사람을 지진 것조차 그나마 양반일 정도로 잔혹했는데 크메르 루주는 독이 든 지네와 전갈을 수감자들의 상처나 은밀한 부위에 풀어놓기도 했으며 사람을 철제 침대 프레임에 눕힌 뒤 자동차 배터리를 통해 전류를 신체의 민감한 부위에 집중적으로 흘려보내거나[* 참고로 이런 전기고문 방식은 [[더러운 전쟁]] 당시 남미의 극우 군사정권이 애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처형자를 욕조에 넣고 욕조 안의 고리에 사지를 끼워 고정시킨 뒤 서서히 물을 채워 익사시키기도 했고 펜치로 얼굴을 훼손한 뒤 그 위에 산을 붓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전기드릴로 뒤통수를 뚫거나 [[거세]]를 넘어 [[http://cfile23.uf.tistory.com/image/1722EF3B4D6DDAFB1225C4|디딜방아처럼 생긴 도구에]] 머리를 넣고 찧어 죽이는 참혹한 방법까지 있었다. 크메르 루주는 이렇게 처형당하는 사람들의 비명을 가리기 위해 나무에 매단 스피커로 선전가들을 요란하게 틀었고 처형한 시체에는 [[DDT]]를 뿌려 시체의 냄새를 가렸으며, 심지어는 DDT를 집단 무덤 속에서도 간신히 살아남았던 사람에게 뿌려 죽이기도 했다. 그리고 폴 포트는 "풀을 죽이려면 뿌리도 죽여야 한다."[* 이와 완전히 판박이로 [[김일성]]도 "독초는 적시에 제거하고 뿌리째 뽑아 버려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물론 김일성도 북한식 연좌제가 가장 먼저, 철저히 적용되어야 했던 인물이란 것은 폴 포트와 판박이다.], "썩은 사과는 상자째로 던져야 한다."는 말을 남기며 반동분자들의 씨를 말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고, 이 지침에 따라 크메르 루주는 체포된 사람의 3대에까지[* 이 말은 실제보다 '''축소'''된 것이다. 뚜올쓸라엥 교도소의 소장이었던 [[깡 겍 이우]]마저 "내가 체포되었다면 우리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 매제, 조카도 함께 체포되었을 겁니다."라고 술회했을 정도였다.] [[연좌제]]를 적용해 처형자의 아내는 물론 그들의 어린 자녀들까지 사지를 찢어 죽였다.[* 그나마(...?) 이는 정치범의 가족들에게 한한 것으로, '지식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처형자의 3족을 멸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물론 정치범 가족의 3족을 멸한 것도 극악무도하기 그지없었다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 {{{#!folding [열람 주의.] [[파일:external/photos.travelblog.org/4908184-Killing_Fields-_Tree_where_babies_were_killed-0.jpg|width=100%]]}}} || || (갓난아이를 가시가 많은 나무에 패대기치는 크메르 루주의 모습)[*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후술할 뚜올 슬렝 강제수용소에 1년간 수감되었던 화가 반 나트(Vann Nath, 1946~2011)로 그는 이 외에도 다양한 기록화들을 남기며 킬링필드의 참상을 후대에 전했다.] || 거기다가 그들의 악행은 '''젖먹이 아기들에게도 예외가 없었으며 이들은 오히려 젖먹이 아기들에게 가장 몹쓸 짓 중의 몹쓸 짓을 저질렀다.''' 크메르 루주는 아이들이 자라서 복수하는 것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어린 아이들을 젖먹이 아기들까지 가리지 않고 살해했다. 그리고 폴 포트는 크메르 루주로 하여금 만약 한 '반동분자' 부부가 아이를 낳으면 이렇게 태어난 아이를 가장 먼저 살해하고는 부모도 고문한 후 살해하게 했는데 살해한 방식도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난징 대학살|이들은 아기들을 공중으로 던져 총검술 연습에 사용하거나]] 운다고 7~8개월밖에 안 된 아기들을 부모로부터 강제로 빼앗은 후 3층 발코니에서 떨어뜨려 살해했으며 심지어 아이들을 아예 악어가 득실거리는 늪에 던져 악어밥으로 주거나 아예 팔이나 다리를 잡고 몸뚱이를 바위나 시멘트 바닥 또는 통나무 등에 내려쳐 끔찍하게 살해한 것도 모자라 마을에 스피커를 달아서 온 마을 사람들이 이 아기가 고통에 몸부리치는 비명소리를 듣게 하는[* 뚜올쓸라엥 교도소에서는 나무에 갓난아기를 내리치는 동안 스피커로 선전 가요를 요란하게 틀어서 아기의 비명소리가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실로 지옥에서도 볼 수 없는 끔찍한 피의 살육이 벌어졌다. 심지어 크메르 루주는 단순히 끔찍하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이 광경을 그 아이의 어머니에게 강제로 지켜보게 한 것도 모자라 그 아이의 시신을 근처에 미리 파둔 큰 구덩이에다 던져넣은 후 그 아이의 어머니를 강간하고는 때려 죽인 후 아기와 같은 구덩이에 암매장했다[* 당시 크메르 루주가 아이들에게 저지른 짓이 너무나 극악무도했기에 재판 과정에서 극도의 뻔뻔함을 보이던 뚜올 슬렝 수용소의 소장이었던 두치마저 2008년 2월 26일에 아이들을 잔혹하게 죽인 나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이 나무에서 희생된 아이들에게 사과했다고 한다.]. 게다가 크메르 루주 군인들은 [[인육]]을 먹으면 극도로 무자비하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 있게 하는 용기를 얻게 해 준다고 믿었기 때문에 크메르 루주 치하 캄보디아에서는 엽기적인 [[식인]] 행위들도 일어났다.[* 실제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렇게 인육을 먹은 군인들은 '눈알이 붉어지며 매우 잔인하고 공격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크메르 루주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이기도 하며 폴 포트 정권의 잔학상을 그린 아카데미상 수상 영화 '[[킬링필드(영화)|킬링필드]]'의 실제 주인공이었던 행 응고르[* Haing S. Ngor, 1940~1996. 원래 군의관 출신이었다가 크메르 루주의 탄압 때문에 태국으로 탈출 후 1980년에 미국에 정착했다. 그러나 1996년에 미국에서 총에 맞아 피살되었다. 다만 행 응오르를 죽인 범인은 이미 완전히 몰락했던 크메르 루주가 아니라 돈을 노리고 강도 살인을 벌이려 했던 아시아계 불량배들 3명이었다. 범인들은 범행을 저지르고 달아났다가 모두 경찰에 체포되었고 재판에서 주범은 종신형, 2명은 26년형, 56년형을 선고받았다.]는 "크메르 루주는 물고기를 훔친 부이 소판(당시 31세)이라는 친척을 인민재판에 회부한 후 죽인 뒤 간을 꺼내 요리해 먹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크메르 루주 군인들은 구치소에 감금되었던 출산 직전의 임산부를 연행한 후 살해하고 [[치치지마 식인 사건|간과 심장을 술안주로 삼기도 했으며]] 한 여성에게는 남편이 살아 있었을 때 잘라낸 간을 요리하도록 강요하기도 했고 심지어 한 여자를 강간하고 살해한 후 그 여자의 10살밖에 안 된 자식을 살해하고 문자 그대로 '''그 아이의 간을 꺼내 먹은 일도 있었다.''' 물론 크메르 루주 수뇌부는 이런 행위들을 알아도 이를 저지하기 위한 조치를 '''전혀''' 취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 두치가 재판에서 증언한 바에 따르면 상술한 수용자들의 자식들에 대한 살해는 '''윗선에서 복수를 막아야 한다는 명목으로 직접 지시하여 __공식 정책으로 삼은__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덧붙여 두치가 증언한 바에 의하면 본인이 수감자들의 '자백'에 대해 상부에 보고하면 상관인 누온 찌어 부서기가 두치에게 조언하며 지시를 내렸다고 하고, 폴 포트가 명령을 내리면 누온 찌어가 이 명령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결정했다고 한다.] 이들의 학살 방법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베트남군이 캄보디아를 침략해서 후술할 S-21 수용소를 탈환했을 때 수용소 곳곳에 고문으로 심하게 훼손된 시신들이 여기저기 방치되어 있고 이를 본 베트남 군인들마저 경악하던 참혹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야만적인 방식으로 학살을 저지른 이유가 사실은 원래 크메르 루주는 [[나치 독일]]의 절멸수용소처럼 [[가스실]]을 운영하여 '효율적으로' 학살을 벌이려고 했지만 [[치클론 B]]를 운영할 기술이 없어서 이런 방법들을 사용한 것이었다는 풍문이 전해진다. --그랬으면 학살을 포기했어야지...--[* 치클론 B를 사용한 아우슈비츠가 유명하기는 하지만 나치 독일의 학살에는 디젤 엔진을 활용한 가스실도 많이 사용되었다. 나치 독일을 따라하기에는 자원도 없고 기술도 없으니 저런 야만적인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가스실도 '서구 문물'이다.] 그럼에도 이런 끔찍한 폭력, 고문, 살해들은 모두 ''''혁명의 업적''''으로 포장되었는데 크메르 루주의 지도자 중 한 명은 '''대학살은 민중의 순화의 수단'''이라는 극단적인 망언을 남겼으며 크메르 루주는 '''캄보디아에 단 100만 명의 사람만 남더라도 우리는 학살을 계속해야 한다, 공산주의 혁명은 단 두 사람이 있어야 성공 가능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폴 포트는 이런 피비린내 나는 학살들을 '캄보디아 혁명'이라고 부르고 이를 '세계 혁명의 본보기'라고 부른 것도 모자라 ''''민주 캄푸치아는 [[사이코패스|혼란스러운 세계 한가운데 떠 있는 순결의 섬]]이자, [[반면교사|인류의 귀중한 본보기]]''''라고 불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