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타란토 (문단 편집) ==== 용병에 대한 의존 ==== 타란토의 안위를 가장 위협하던 세력은 다름 아닌 북쪽의 원주민들이었다. 그들을 막기 위해서는 막강한 해군이 아닌 육군이 필요했는데, 시민들은 무역에 치중하여 점차 병사 자원이 떨어졌고, 결국 타란토는 외세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들이 처음으로 끌어들인 용병은 모국인 스파르타였다. 기원전 343년, 타란토는 스파르타에 용병을 제안했고 이듬해에 아르키다무스 3세의 군대가 도착하여 루카니아 인들과 싸웠으나 패하고 국왕 본인마저 전사하였다. (기원전 338년) 기원전 333년, 타란토 인들은 아드리아 해 건너편 에피로스의 국왕이던 [[알렉산드로스 1세 에페이로스|알렉산드로스 1세]]([[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삼촌이자 [[피로스|피로스 대왕]]의 숙부)를 다음 용병으로 고용하였다. 하지만 그의 군대 역시 [[삼니움]] 족에게 패하였고 알렉산드로스는 코센차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타란토는 결국 이탈리아 인들과 평화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320년) 기원전 304년, 루카니아 인들은 타란토를 공격하였고 이에 시민들은 바다 건너 [[시칠리아]] 섬의 [[시라쿠사]] 국왕인 [[아가토클레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는 [[칼라브리아]] 일대를 석권하였으나 곧 회군하였다. 다음으로 용병이 된 스파르타의 국왕 클레오메네스 ([[클레오메네스 전쟁]]의 그 왕은 아니다)는 기원전 303 ~ 302년간 타란토 인들과 함께 싸운 후 회군하였다. 위의 두 원정으로 타란토의 북쪽 국경은 안정된 듯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