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타키투스 (문단 편집) == 성향 == 공화주의적인 이상을 가지고 제정을 싫어했지만 제정의 필요성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상류층 지식인 중의 한 명이었다. 정확히는 원로원의 권위를 존중하며 세습이 없는 원수정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세습왕조에 대해서는 어떤 공로가 있던 상관없이 과오를 신랄하게 들이까면서 폭군으로 묘사했다. 특히 [[티베리우스]]와 도미티아누스에 대해서는 제정 혐오자가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로 깠다. 현대 이탈리아의 언론인이자 역사가로 로마사 개괄서를 저술한 몬타넬리의 평가에 따르면, 변호사로 유명했던 사람답게 기록과 객관적인 증거에 바탕을 두면서도 자신의 논지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저서들을 서술했다고 한다. 허나 이런 평가는 타키투스의 대표적인 저서인 《연대기》와 《역사》의 문체 서술상의 평가에 가깝다. 도리어 타키투스의 서술 성향은 후대의 [[디오 카시우스]]처럼, 객관적인 관점에서 한 인물를 주제로 그 장단점을 기술했음에도 지극히 '''원로원 중심적'''이었으며 '''[[엘리트주의]]적'''이라는 평가가 따라온다. 예를 들어 그는 원로원 의원들을 고발하는 '델라토르 제도'에 대해 무한한 증오와 비난을 표출하는 태도를 곳곳에서 보이며, 황제에게 대항하여 직언을 행사하는 원로원 의원에 대해서는 매우 큰 찬사를 보낸다. 또한 [[팍스 로마나]] 등을 언급할 때 으레 같이 나오는 비판적인 시각을 대변하는 어구 중 하나인 >'''그들(로마인)은 폐허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평화라고 부른다.''' 는 말도 타키투스가 했다고 전해진다.[* 정확하게는 [[아그리콜라의 칼레도니아 침공]] 당시 그에 맞선 칼레도니아 연합군의 지도자 칼가쿠스가 했다는 연설을 타키투스가 기록한 것이다. 실제 내용 취지도 자신들의 땅을 침공한 로마인들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는 발언이었다.] 이런 평가처럼 타키투스는 자신의 저서를 쓸 때 상당히 시니컬한 문체와 서술 태도를 보였다. 그는 원로원의 권리를 옹호하면서 로마 제정에 대해 가장 신랄한 비판을 가한 사람이었다. 이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가이우스([[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1세]]를 다룬 동시대인들의 1차적인 사료를 그들의 호적 등본 외에는 거진 참고하지 않고, 길거리 소문과 본인 가족들의 증언에 의거한 동시대 사람 [[수에토니우스]]와 다른 점이었다. 타키투스는 수에토니우스처럼 유명 변호사이자 교양인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허나 두 사람의 저술 방법과 기준은 차이가 명확했다. 수에토니우스는 소위 [[뇌피셜]]에 기반한 유추적인 해석을 당연하게 서술했다. 또 '내 기준에서 봤을 때 도덕적'이라는 주관적인 관점을 합리화하길 무척이나 선호했고, 본인 스스로를 로마 최고의 교양인이자 행정가라는 전제 아래 이를 절대선으로 규정했다. 반면 타키투스는 원로원 의원이자 귀족의 입장에서 역사를 기술했어도[* 수에토니우스는 변호사이자 황실 비서까지 역임했으나 기사(에퀴테스) 계급이었다.],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을 강조하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했다. 따라서 1차 사료에서 동시대 원로원 의원들의 기록과 《로마 관보》, 《원로원 회의록》을 기반으로 둔 다음, 황제 개인의 장단점을 파악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이는 동시대 원로원 동료들과 후대의 [[디오 카시우스]]로 대표되는 역사가와 교양인들이 타키투스의 기록을 1차 참고문헌으로 애용한 이유가 되었다. 그럼에도 타키투스의 저술은 기본적으로 원로원 중심주의 관점에서 서술했고, 황제와 그 측근들의 기록을 동일하게 놓고, 함께 기술하지 않아 이 부분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타키투스의 삶을 돌이켜보자면 알 수 있듯이, 그는 갈리아 남부 출신으로 출세를 꿈꾸며 로마로 와서 개인적인 능력과 장인의 도움으로 원로원 의석을 꿰찼고, 변호사로 큰 성공을 거뒀다. 타키투스는 온건하고 유연한 공화정 회귀론자이면서 동시에 철저한 원로원 중심론자였다. 따라서 개인적인 이유 외에도 정치적인 신념으로도 원로원 중심 시스템을 뒤엎고 원수정을 열어 혈통 세습을 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바로 뒷세대의 [[수에토니우스]]처럼 온갖 소문들을 무차별적으로 집어넣지 않았으므로 비교적 객관적으로 서술했다고 평가받는다. 또 타키투스는 도미티아누스 황제 밑에서 현실과의 타협, 공공도덕에 대한 올바른 가치 실현과 같은 부분에서는 자신이 비판한 황제들에 대해 마냥 비방만 하지 않았다. 타키투스는 자신이 원로원 의원 신분으로 있으면서 직접 경험한 도미티아누스에 대해서는 굉장히 부정적이었으며, 후세 사람들에게 막장 황제로 이름난 가이우스([[칼리굴라]])[* [[칼리굴라]] 항목 중 평가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수에토니우스, 타키투스, 디오 카시우스 등이 쓴 후세의 기록처럼 막장 행보를 계속하다가 구제불능이라고 암살된 황제가 아니었다. 이미지와 달리 칼리굴라는 개인적인 사치를 위해서 돈을 펑펑 쓴 황제도 아니었다. 그가 까인 이유는 초기 원수정이라는 복잡한 성격 등을 고려치 않았던 그의 노골적인 권력 강화와 티베리우스의 막대한 유증금을 아우구스투스 유언 집행에 따른 공공사업 재개, 즉위 직후 열린 국가축제 등으로 거의 써먹었기 때문이었다.], 악명 높은 폭군 [[네로]],[* 네로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그럭저럭 국정도 잘했으며 나라도 굴러갔다. 항목 참조.] 원로원 의원들에게 빅엿을 먹였던 티베리우스에 대해서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내용을 통해 이들을 부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 외에도 그는 《원로원 회의록》, 《로마 관보》를 통해 당대의 표기를 그대로 쓰거나, 실제 황제들의 서한과 연설을 옮겨 적었다. 일례로 그는 후대에 '칼리굴라'로 잘 알려진 가이우스 황제를 당대 사람과 원로원, 자신이 살던 시대의 사람들의 표기대로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로 기술하고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연설이나 티베리우스의 서한 및 원로원 의원들의 법정 증언 등도 증거에 기반해 기록했다. 따라서 타키투스의 이런 저술 스타일은 당대 로마 원로원 귀족들에게 높이 평가받았고, 장인인 아그리콜라와 프린키파투스 체제를 부정적으로 생각한 원로원 내 유력인사들로부터, 그는 첫 번째 저서의 발표 이후 후속 역사서 저술을 권유받아 그 유명한 《연대기》 등의 작품을 남겼다. 이때 소 플리니우스는 이런 타키투스를 >"[[키케로]]보다 위대하고, 뛰어난 변호사이자 저술가" 로 극찬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타키투스는 모든 저서를 다룰 때 객관적인 증거를 제시하면서도, 자신과 원로원이 중요하게 여긴 귀족의 품위(자유와 귀족적인 미덕)을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타키투스의 저서 내용은 원로원 입장에서 원수정 시대를 서술했다고 평가받는데, 그럼에도 역사가 입장에서 소문과 사실을 명확히 구분해 전달했으며 《로마 관보》와 《원로원 회의록》을 기반으로 작성해 그 신뢰도가 높다. 또 티베리우스 시대의 고리대금업 처벌 등과 같은 부분에서 드러나듯이, 원로원의 입장에서 황제를 비판하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행동이 무조건 부정적이지 않았음도 명확하게 지적했다. 따라서 타키투스의 저서들은 비슷한 세대의 수에토니우스와 비교해 상당히 높게 평가받고, 원수정 시대를 이해하는 1차 사료로 많이 활용된다. 다만, 저술 스타일에서 드러나듯 원로원 중심에서 프린키파투스 체제를 평가한 만큼, 마냥 그의 주장만 신빙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실제로 타키투스는 자신을 원로원의 핵심으로 이끌어준 장인 아그리콜라의 부친(아내의 할아버지)이 칼리굴라의 지시를 어기고 항명죄로 처형된 개인적인 이유 등으로 그가 살지 않았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도미티아누스가 활용한 델라토르 제도 등의 폐단을 체험한 이유, 공화정 체제에 대한 옹호 등을 이유 등으로 《연대기》에서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의 모든 황제들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으로 당대부터 유명했다. 또 그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다섯 황제들을 모두 직접 체험한 인물이 아닌데다가[* 타키투스는 클라우디우스 1세의 시대때 태어났다.], 그가 맨 처음 다룬 역사책의 주제는 자신이 직접 체험한 [[네로]]부터 도미티아누스 시대까지의 이야기라서 그가 주장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네 황제 시대를 있는 그대로 평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만, 네로의 경우에는 본인이 직간접적으로 체험했고, 원로원 활동을 할 당시 직접 경험한 인사들과 함께 활동하거나 친구가 된 만큼, 네로 시대의 기록은 여타 다른 황제들과 비교해 꽤 신뢰도가 높다고 평가받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