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타히티 (문단 편집) == 역사 == 이 섬에 최초로 사람이 당도한 것은 서기 1000년경으로 그 전에는 무인도였다. [[동남아시아]]에 살던 주민들이 수천년동안 피지, 사모아, 통가 등을 거쳐 20~30미터 가량의 카누 여러 대에 가축들을 싣고 나눠 타고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럽인들에게 최초로 발견된 것은 1576~1577년 스페인의 탐험가 후안 페르난데스라는 설도 있고, 1606년 2월 10일 포르투갈의 탐험가 페드로 페르난데스 퀘이로스라는 설도 있다. 그 뒤로는 주로 18세기에 영국인과 프랑스인들이 방문했다. 타히티의 원주민들은 다른 섬 주민들과는 다르게 흰 피부를 가진 서양인들을 신격화했고 특히 쿡 선장 같은 고위직은 죽지 않는 존재라 여겼다. 원주민 부족들 사이의 세력 다툼을 거쳐 1788~91년 사이에 [[포마레 1세]]에 의해 포마레 왕조가 성립되었다. 1839년 영국의 개신교 선교사 조지 프리처드가 들어와 포마레 4세 여왕을 설득하여 프랑스인 가톨릭 선교사들을 추방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프랑스군이 이를 빌미로 침공하여 1844년 프랑스-타히티 전쟁이 발발하였고 1847년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다. 프랑스는 타히티를 합병하려 했으나 영국의 압력으로 그럴 수는 없었고 결국 1847년 프랑스는 타히티를 보호국으로 삼으며 리워드 제도(leeward island)의 후아히네, 라이아테아, [[보라보라]] 등 근처에 있는 다른 섬들을 중립지역으로 남겨놓는다는 내용의 자낙 협정(Jarnac convetion)을 영국과 맺는다. 이 협정은 30년 넘게 유지되다가 1879년 후아히네가 [[독일 제국]]과 우호조약을 체결한 것을 계기로 독일이 이 지역까지 세력을 뻗쳐올 것이라 우려한 프랑스가 자낙 협정을 깨고 [[1880년]] 6월 29일에 포마레 5세를 폐위시킨 후 타히티 왕국을 완전병합하였고 중립지역이었던 후아히네, 라이아테아, 보라보라 등도 보호령으로 삼았다. 1887년 10월에는 영국과 합의해 자낙 협정을 공식적으로 폐기했다. 폴리네시아와 소시에테 군도의 다른 소왕국들도 [[1900년]]까지 프랑스에 병합이 완료되었다. [[바운티호 선상반란 사건]]과도 관련 깊은 섬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