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탈레반 (문단 편집) ==== 폭정 ==== 탈레반의 폭정과 인권침해는 매우 유명하다. 권선징악부(파슈토어로 د فضیلت تبلیغاتو او د معاونیت مخنیوي وزارت)라는 일종의 종교경찰청을 두었으며, 해당 부서 멤버들은 길거리에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무작위로 붙잡아서 쿠란이나 하디스 관련한 질문을 한 뒤, 제대로 대답을 못하면 회초리로 손이나 발을 때리고 다녔다. 이 권선징악부는 쿠란에 나오는 “선행을 권하고 악행을 금하라 الأمر بالمَعْرُوف والنَهي عن المُنْكَر“라는 말을 실천시키려는 목적으로 설치된 부서인데, 탈레반은 “선을 권하고 악을 금한다”는 명분으로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의 전통적인 [[마드라사]]에서 어린이들을 교육시킬 때 사용하던 방법이었던) [[구타]]와 [[체벌]]을 일반인 성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하였던 것이다.[* 원론적으로는 하디스에서 구타를 금지하지만, 과거에는 어린이들을 교육할 때 강제로 때려서 외우게 시키는 일이 워낙 보편적이다 보니, 마드라사 내에서만큼은 전통적인 관습으로 굳어졌었다. 여담으로 19세기/20세기 초반 [[살라프파]]들이 그나마 잘했던 점/인기를 끌었던 이유 하나가 바로 이슬람 신학교에서 구타와 체벌을 상당부분 근절했던 데 있었다. 그만큼 마드라사의 체벌 남용 문제가 심각했던 것] 즉 국가를 하나의 거대한 [[스파르타]]식 근본주의 신학교로 개조하려 한 것이다. [[하디스]] 해설집에는 "선행을 권하고 악행을 금할 때 칼을 써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 있다. 탈레반은 해당 하디스 해설을 자기들 편한 대로 해석해서, 칼 대신에 몽둥이와 채찍 그리고 '''총'''으로 자신들의 가치관에 따르지 않는 국민들을 마구 처벌하였다. 대도시 시내 곳곳에 [[저격수]]들을 배치하여 시위를 벌이는 사람 혹은 풍기문란범들을 즉결처형하던 것도 바로 해당 부서로, 아픈 아이를 안고 병원으로 뛰어가던 애엄마를 “남자 없이 혼자 외출하는 음란한 여자”라며 저격수가 총살한 사례가 잘 알려져 있다. 수니파 [[이슬람]] 중에서도 데오반드파 이외의 모든 종교/종파를 탄압한 것은 물론 모든 언론과 방송이 중단되고, TV와 라디오는 오로지 한 채널로 24시간 [[쿠란]]과 [[성전가]][* 탈레반의 성전가 중에선 [[이 곳은 용감한 자들의 고향이라네!]]가 가장 유명하다.]만 방송하게 되어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막는 것에서부터 아래에서 설명할 온갖 폭정이 자행되었다. 그래서 [[미군]]이 [[카불]]에 들어섰을 때 시민들은 탈레반이 카불을 지배한 [[1996년]]부터 몰래 숨겨둔 [[인도 드라마]], [[인도 영화]]([[발리우드]]) 및 [[이란 영화]] 녹화본과 주변 나라들인 [[인도]], [[파키스탄]] 연예인 사진을 다시 팔았다. 아프간도 인도문화권이라 인도 영화가 큰 인기를 끌었고 이웃 이란 영화도 인기였는데, 탈레반이 영화 자체를 못 보게 했기 때문이다.[* 수니파 근본주의 이슬람은 영화에 적대적이라 [[사우디아라비아]]는 [[2019년]] 이전까지 [[극장]]이 없었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싶을 경우 이웃나라 [[바레인]]에 가서 영화를 보고 오곤 했다.] 모든 대중 매체, 비이슬람 종교, 대중문화, 가치관, 인권, 복식 등 모든 자유를 모조리 금지했다. [[노래]], [[춤]], [[트럼프(카드)|카드놀이]], [[체스]], [[영화]] 감상, [[화장품]], 장신구 착용, [[그림]] 그리는 것까지 모두 금지되었다. 영화나 그림은 '형상을 묘사한 것이니 [[우상숭배]]'라는 논리[* 이는 [[사우디]]와 [[카타르]]에 만연한 이슬람 극단주의 사상인 [[와하비즘]] 교리의 일부이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그래서 [[바레인]]에 가서 몰래 극장 다녀오는 사우디인이 그렇게 많았다.]를 폈는데, 심지어 [[아랍어]]로 그림처럼 그리는 대중문화인 핫(Hat)조차도 금지했다. 천여 년 동안 이슬람권에서 인정받아오던 핫을 금지하면서 대대로 핫을 그리고 새기던 장인들은 격분했지만, 이들도 따르지 않으면 구타 및 구금, 사형을 당했다. 서구식 [[학교]]와 [[도서관]], [[극장]], [[박물관]] 등을 모조리 폐쇄하고, [[텔레비전]]과 영화필름 및 문화유산들을 모조리 불태우거나 남김없이 부수고 파괴했으며, CD와 카세트 테이프 등은 거리에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또 아프가니스탄의 전통 [[음악가]]들과 [[시인(문학)|시인]]들, [[예술가]]들을 모조리 탄압하고 구타하고 처형했다. 이들이 추구하는 [[음악]]은 무슨 [[록 음악]] 같은 걸 하는 것도 아니고, [[중세]] 이슬람 시기부터 번성했던 시문학이나 전통 음악들을 하는 문화유산 전수자들이자 장인들인데도 탈레반에게는 이들마저 때려죽여야 할 타락한 놈들로 보일 뿐이었다. 심지어 이미 고인인 [[가수]]들의 [[무덤]]에 가서 총을 난사하는 짓도 저질렀다. 절도범들은 전통적 이슬람 형벌에 따라 손목을 잘랐고, 재범일 경우 발목을 잘랐다. 여성의 근로권, 복장 자유권 등 모든 기본적 권리를 박탈하고 의료, 교육, 법률의 권리마저 빼앗았다. 여성이 재판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면 여성 [[변호사]]만을 선임할 수 있지만, 여성에 대한 교육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여성 변호사가 있을 수가 없고, 여성의 몸은 여성만이 진료할 수 있는데 여성 [[의사]]가 있을 수 없는 식이었다[* 여성차별로 악명높은 사우디아라비아도, 여성들을 치료할 목적으로 ([[조선]]시대 [[의녀]]처럼) 여성들이 의사가 되는 것을 허용했다.]. 심지어 [[남녀공학]] 학교를 공격하기도 했다. 세속주의를 추구한 군주정 시대와 [[공산주의]] 시절의 영향으로 [[카불]]에는 교육받은 여대생만 8천명이 있었고, 아프간 내의 [[의사]]들의 40%, [[공무원]]들의 50%, [[교사]]의 70%가량이 여성이었는데, 탈레반들은 이들의 일과 학업을 모조리 강제 중단시키고 집에만 있기를 총칼로 강요했다. 당연히 말할 것도 없이 이들 여성들은 모조리 빈민층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정의길 저, <이슬람 전사의 탄생>, 259p.] 그뿐만이 아니었다. [[부르카]]를 여성들에게 무조건 강제로 입게 하고, 안 입으면 사형시킨 것도 모자라 [[여성]] 혼자 밖에 나가는 것조차 금지했다. 남자 가족과 동행하지 않고 혼자서 돌아다니는 여자는 부르카를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길거리에서 구타하는 게 일상이었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의 묘사에 따르면, 운이 정말 좋으면 "왜 남자 없이 다니느냐"라고 점잖게 꾸짖는 정도고, 일상적인 것이 걷어차이고 욕설을 듣는 것이었다고 한다. 수도 카불의 경우는 이런 통제가 더 심해서, 집안의 갓난아기가 아파서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달려간 여성을 보고 탈레반들이 수상하게 여기고 저격해서 살해하는 경우마저 보고되었다. 또 여성이 [[매니큐어]]를 칠하다 걸리면 손가락을 잘랐다. 남자들에게도 아프간 이슬람식 전통 복장과 터번을 강요했으며 또한 [[수염]]을 기르게 했다. 심지어 공공장소에서 남에게 말을 걸거나 웃어도 처벌을 받기가 일쑤였다. 전후 과부가 많던 상황 속에서 과부들의 경제활동을 사실상 봉쇄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국민들의 해외여행도 금지시켰는데, 이 때문에 [[메카]]행 비자 신청을 할 수 없어서 국민들은 무슬림의 5대 의무중 하나인 [[메카]] 순례를 할 수 없게 된다. 물론 고위직이야 메카순례도 하고 그랬기는 했지만. 국민들의 1인당 소득은 단연코 전 세계 최하위를 달렸고, 법률 또한 완벽히 마비되어 이슬람 [[샤리아]]의 전통적인 형벌들이 법률을 대신했다. 심지어 아이들이 하늘에 연을 날리는 것조차도 '알라의 하늘을 더럽힌다'며 처벌 대상이었다고 한다. 연날리기하다가 걸려서 맞아 죽은 아이들까지 실제로 있었다. 또한 현대적인 [[치약]]의 사용을 금지했는데, [[무함마드]]는 7세기에 현대식 치약을 사용하지 않고 전통적인 나무뿌리로 양치를 했기 때문에 치약은 비이슬람적이라는 이유였다.[* 정의길, <이슬람 전사의 탄생>.] 실상은 치약조차 제대로 공급이 안 돼서 불만이 나오자 내린 조치다. 탈레반은 '[[발전소]]가 없어서 전기가 부족하다'는 불평이 나오자 "[[선풍기]]는 사탄의 발명품"이라고 주장하는 파트와도 발표했는데, 나중에 탈레반 정권이 전복되고 나서 보니 탈레반 주요 인사들 집에는 [[에어컨]]과 [[HiFi|하이파이 스테레오 시스템]]이 있었고, 모하마드 오마르 집 마당 축사에는 선풍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한다. 당시 인터뷰를 보면 북부동맹 병사가 "오마르가 국민들을 가축만도 못한 취급을 했다" 라고 말하며 분노하는 모습이 잡혔다. 또한 남성들은 [[수염]]을 자르지 말아야 했고, [[면도]]하는 이들을 수염이 날 때까지 감옥에 가두거나 공개[[처형]]할 정도였다. 최소한 턱 밑으로 주먹 한 줌 정도는 긴 수염이 되어야 처벌을 면했다. 이때 몽골계 인종인 [[튀르크]]계 [[하자라인]] 및 [[키르기즈]]인 남성들은 몽골계 혈통상 인도아리아계 파슈툰인이나 타지크인들처럼 덥수룩한 수염을 못 길러서 이들만 어느 정도 예외 취급을 받았을 뿐이다.[* 물론 키르기즈나 하자라, 우즈벡, 투르크멘 등 투르크계 차별은 여전했다. 그래서 결국 이들 투르크 종족들이 일심단결해서 북부동맹을 구성하고 [[페르시아인]] 혈통의 타지크인들을 끌여들였다. 타지크인들 역시 파슈툰인에 차별받는 처지였다.] 그 밖에도 그때그때 자기들 배알 꼴리는 대로 사람들을 잡아다가 [[축구]] 경기장에 몰아넣고 처형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 와중에도 유일하게 허용되는 스포츠가 [[권투]]였는데 문제는 탈레반의 강압으로 권투 선수들이 면도를 할 수 없었다. 그러면 얼굴에 난 상처로 채점하는데 지장이 된다고 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OCA)가 이걸 받아주지 않자 [[아시안 게임]]도 불참한다. 다른 스포츠는 스포츠 경기는커녕 선수들 생존도 어려운 상황이라, 죄다 망명하거나 살해당했다. 여성 선수는 탈레반에서 금지 정책을 내려 이보다 더 심했으며, 이렇다보니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서는 탈레반의 여성 탄압을 구실로 [[올림픽]] 참가를 금지시켰다. [[축구]]는 예외적으로 허용하는데, 축구선수에게 긴바지를 입히고 턱수염을 기르게 하는 것은 기본에, 축구 경기장 자체를 처형장으로 사용하고, 경기가 있는 날에도 축구 경기 쉬는 시간을 이용해서 처형을 집행한다. 오히려 사람이 많을 때 처형 장면을 공개함으로써 공포 정치를 용이하게 하려는 목적이 크다. 나체의 인간이 그려져있는 [[의학]]교과서는 음란물이라고 의학교과서를 모아서 불태워 버리는 바람에, 탈레반 아래에서 공부한 [[의사]]들은 책 없이 학교 교수의 기억력과 구전에 의지해서 공부했다고 하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힌두교도들은 인식표를 차고 다녀야 했다. 무고한 비 파슈툰 부족민들을 [[미국]]과 협력했다며 학살해 놓고서는 '이슬람을 수호했다'며 자화자찬해서 자기네 사이트에 동영상까지 올린다. 이는 현재진행형 악습이다. 아프가니스탄의 문학작품인 [[천 개의 찬란한 태양]]에서 등장한 탈레반은 [[플라밍고]] 그리기를 좋아하는 화가에게 플라밍고의 다리가 음란하다고 "플라밍고에게 옷을 입혀 점잖게 만들던가 죽던가를 택일하라"라고 고문하기까지도 했다. 탈레반처럼 극단주의는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이를테면 더 극단적인 사례로는 캄보디아에서 [[킬링필드]]가 벌어져서 지식인 계층이 전멸했던 이후 초등학교에서 과학실험 수업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탈레반보다 온건한 편인 [[개신교 극단주의]] 성향의 [[미국인]] [[목사]]이자 정치인인 앤소니 컴스탁도 바로 이랬다. 컴스탁 덕분에 19세기 미국에서 [[해부학]] 그림을 음란하다고 우편으로 보내는 게 금지되었고, 대학에서조차 이런 의학서적을 금지하자는 주장까지 나왔다. 이러다보니 시사 만화로 알몸인 아기를 낳은 임신부도 음란하다고 고소하는 컴스탁이라고 신랄하게 가는 만화까지 나올 지경까지 갔다. 그래서 '마크 트웨인'이나 '조지 버너드 쇼'와 '헨리 제임스' 같은 내로라하는 당대 미국 문인들에게 미친 원숭이라느니 진화가 덜 된 종교쟁이라고 비난받았다. 이슬람이 가장 패권주의적이고 억압적인 모습을 보였던 [[맘루크 왕조]]나 [[오스만 제국]]의 [[그리스]] 식민 통치 시기의 인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오스만 제국]] 전성기에는 [[그리스인]]들이 꽤나 우대받았는데, 그리스인들은 2등 신민으로 인정받아 식민지 총독 및 고위대신으로 임명되면서 비무슬림/비투르크인 중에서 가장 대접이 좋았다. 이슬람을 믿던 [[아랍인]]들조차도 비투르크인이라 3등 신민으로 취급되어 그리스인들보다 밑이었다. 오스만은 심지어 [[정교회]] 최고 수장도 [[그리스인]]들에게 맡겼고, 동방 정교회라는 이름도 그리스 정교로 묶어버렸다. 이에 [[불가리아]]나 [[세르비아]] 같은 다른 정교회 나라들은 반발했고, 이후 독립 후에 서로 [[발칸 전쟁]] 및 여러 갈등도 벌어졌지만, 이는 이전부터 서로 사이가 나빴던 점도 작용한 것이었다. 오스만의 힘이 약해지면서 19세기 [[그리스]] 독립이 이뤄질 당시 상당수 [[그리스인]]들도 그리스 독립에 거부반응을 보였는데, "라틴인들의 로마 제국도 그리스인들이 주축을 이루던 제국으로 변모했는데 오스만 제국도 시간만 지나면 그리스인의 제국으로 동화 못 할 게 없을 텐데 섣불리 독립이라니?"라고 했을 정도이다. 이처럼 확실히 관대한 편이었지만 19세기 말에 접어들면서 오스만 제국에 [[아르메니아 학살]]을 비롯하여 [[아시리아인]], 아랍 무슬림 학살이 벌어졌다. 더구나 그리스인-오스만리(서부 투르크인)은 이미 섞일 만큼 피가 섞인지라 유전자가 비슷해져서 생김새도 먹는 음식도 의상도 똑같아져 구분이 안 됐다. 그래서 투르크인임에도 기독교도면 그리스인, 그리스계 부계 혈통을 지녔음에도 이슬람이면 투르크인으로 나뉘어 일방적으로 [[그리스]]-[[튀르키예]] 인구교환이 이루어졌으며 대게 기독교도 투르크인이 그리스인으로 분류되어 생판 처음 보는 땅으로 강제이주해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