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탕언보 (문단 편집) === [[국민혁명]]에서 [[대장정]]까지 === 귀국 후 [[강소성|강소]], [[절강성|절강]], [[복건성|복건]] 등 5개 성을 지배하는 [[직예군벌]] [[쑨촨팡]] 휘하의 소령으로 부임했지만, 천이의 추천으로 [[중국 국민당]]에 가입, [[국민혁명군]]에 입대한다. 이어 [[황포군관학교]]가 이름을 바꾼 중앙군관학교에서 교관생활을 했다. 이때 이 학교에 [[일본 육사]]를 모방한 커리큘럼을 확립하여 군사교육자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중국 국민당]]과 [[소련]]의 합작에 의해 [[1924년]] 제1기생을 받은 [[황포군관학교]]는 [[장제스]]의 주장에 따라 [[장교]]들을 속성으로 대량으로 양성한다는 방침을 정했고 [[광저우]]에 있을 때는 6개월 속성 과정에 불과했다.([[소련]] 고문들은 6개월 커리큘럼이 너무 짧다고 반대) 후에 [[공산당]]과 [[국민당]]으로 나뉘어 피터지게 싸우는 [[황포군교]] 출신의 [[장교]]들은 학교보다는 학교를 졸업한 후 참전한 무수한 실전에서 전술을 배웠다고 해도 될 정도. 물론 군벌군들이 막장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양성된 [[장교]]들만으로도 [[국민혁명군]]은 승전을 거듭할 수 있었지만, [[북벌]]이 완료후 [[마적단]]이나 비적 출신들이 가득한 [[군벌군]]이 아니라 외국(특히 [[일본]])의 정예군을 상대하려면 교육 내용은 국제기준으로 대폭 재고되어야 했다. 여기에 [[1차 국공합작]]이 깨지면서 [[소련]] [[교관]]들이 귀국하고, 제대로 된 교수진도 드물어졌다. 그래서 그나마 [[중국]]보다는 선진적인 [[일본 육사]]에서 배운 탕언보의 경험이 중요했던 것이다. 물론 [[일본 육사]]도 [[서유럽]] 기준으론 도저히 선진적인 교육과정이라고보기는 힘들었지만, 어쨌든 [[중국]]보다 앞서 있었다. 현대적이고 체계적인 장교 육성 시스템의 필요성을 절감한 장제스는 1930년대 중반 [[나치 독일]]의 도움을 받아 육군대학을 설치하고 전국의 군사교육기관을 통일시켜 군사교육 제도를 획기적으로 개선시켰으나 그게 [[중일전쟁]] 터지기 직전에야 겨우 이루어져서(...) 좀 쓸만한 [[장교]]들이 육성된 것은 [[중일전쟁]] 도중에야 있었고 그 때는 [[국민정부]]의 경제적 기반이 죄다 날아가고 정예군도 소진된 후였다.] [[1930년]] [[중원대전]]이 벌어지자 야전으로 돌아가 [[소장]]의 계급으로 제1여단장을 맡아 공훈을 세웠다. 이어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진압하기 위한 초공작전에 참가했는데 [[제3차 초공작전]]에서 [[홍군]]에게 대참패하고 [[장제스]]의 노여움을 사 직위해제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다시 89[[사단장]]으로 복귀하여 [[제5차 초공작전]]에서는 공훈을 세우고, [[대장정]]이라는 이름으로 도피하는 [[홍군]]을 추격해 큰 전과를 올렸다. 이때 공적으로 13군 군장이 되었고, [[공산군]]의 새로운 근거지인 [[섬서성]]에 주둔하게 되었다. [[1936년]] 가을 [[중화민국]]은 [[일본]]의 지원을 받던 [[데므치그돈로브]]의 [[내몽골]]군 및 [[관동군]]과 충돌하는 [[수동사변]]이 발생했는데, [[섬서성|섬서]]에 있던 탕언보군은 쑤이위안성[* 현재 내몽골의 일부]에 있던 [[푸쭤이]] 군을 지원해서 승리를 거두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