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음력 (문단 편집) === [[시헌력]]에서 === 태양이 가상의 천구(天球)상에서 운행하는 궤적을 황도(黃道)라 하며 천구를 1년 동안 한바퀴 360도를 돌면서 15도씩 24등분한(한 달에 두 번씩) 점을 통과한다. 청나라 초기에 서양에서 온 예수회 선교사들은 뛰어난 천문학자로 인정받았다. 그래서 청나라 황실이 인정하여 국립 천문대격인 관상감에 들어가 새 역법을 편찬토록 했다. 이들 예수회 학자들이 주도하여 만든 '''시헌력'''에서는 황도상 동지점을 기준으로 황도를 15도씩 24등분하고, 태양이 황도상 각 지점에 합쳐지는 날을 24절기로 규정했다. 이 시헌력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음력이다. 황도를 기준으로 [[24절기]]를 정하는 방식은 시헌력에서 비로소 처음으로 시작하였다. 사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이미 명나라 때 와 있었으며, 명나라 숭정제 때 시헌력을 도입하려고 했다. 하지만 명이 멸망하고 청나라 순치제 때 비로소 시헌력이란 이름으로 도입했다. 시헌력식 계산법은 종래의 중국 전통과는 판이했다. 시헌력 이전, 명나라 대통력[* 사실 대통력은 원나라 수시력과 사실상 체계가 같다. 수시력은 시헌력 이전 중국 역법 중에서는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은 24절기를 동지로부터 15.22일 간격으로 있다고 간주했다. 그래서 24절기간 시간간격이 똑같다. 그에 반해 시헌력에서는 태양이 황도를 이동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24절기간 간격이 들쭉날쭉하다. 지구의 공전궤도가 원이 아니라 타원이고, 궤도를 움직이는 속도도 다르다. 그래서 태양이 황도를 움직이는 속도 또한 똑같지 않고 계속 변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청나라는 물론 조선에서도 이러한 시헌력식 방법을 육합(六合)의 원리도 모르는 무지한 서양 오랑캐식이라고 무진장 까는 부류가 많았다. 당시 논쟁을 보면, 옛 중국에서는 태양의 황도상 움직임이 언제나 균등하다고 간주한 듯하다. 조선에서 처음으로 시헌력 도입을 주장한 한흥일 같은 경우, 반청감정이 극심했던 인조 때 사람인데, 청나라 역법(시헌력)이 옳다 하여 집안 제사를 시헌력에 따라 지내다가 억수로 욕을 먹었다. 대통력식 방법을 따르면 윤달을 집어넣기가 편한 반면, 시헌력식 방법을 따르면 윤달을 넣기 곤란할 때가 종종 생긴다. 대통력에서는 24절기간 간격이 고른 반면 시헌력에서는 고르지 않기 때문에, 중기(동지를 비롯한 12달의 이름을 정하는 기준이 되는 12 절기)가 한 달에 두 번 드는 경우가 생기는 등, 대통력에서는 발생하지 않는 문제가 있다. 시헌력에 포함된 계산식은 탕법[* 예수회 신부 탕약망, 즉 아담 샬이 만든 계산식을 가리킨다.]에서 매법[* 청나라 학자 매곡성이 탕법을 수정한 계산식.]으로 바꾸었다가, 대법[* 매법에 오류가 있어 예수회 신부들이 케플러 타원 궤도설을 받아들여 수정한 계산식.]으로 바꾸었는데, 조선에서는 이런 계산식 업그레이드를 따라가느라 진을 뺐다. 청나라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예수회를 주축으로 한 시헌력파가 실각하자 몇 년 동안 대통력을 사용했는데, 이때 조선도 냉큼 대통력 체계로 돌아갔다. 나중에 다시 청이 시헌력을 사용하자 조선도 시헌력을 부활시켰다. 24절기 설정 말고도, 대통력 등은 주천도수를 365.XXXX로 설정하여 가급적 원의 둘레를 일년의 날수와 비슷하게 맞추려고 한 반면, 시헌력에서는 360도로 설정했다. 당연히 대통력 등 시헌력 이전 역법에서는 원의 둘레가 딱 나누어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계산이 상당히 힘들다. 그에 반해 시헌력은 계산하기 무척 편하다. 이 점은 심지어 시헌력 반대파조차 인정할 수밖에 없는 대통력 등 고력의 단점이요, 시헌력의 장점이었다. 이렇게 한동안 시헌력 지지파와 대통력 지지파는 서로 갈등했다. 하지만 서양 천문학의 성과를 받아들인 시헌력을 사용하면 일식/월식 계산이 정밀하고 정확함을 청나라와 조선이 서로 확인하였다. 급기야 성호 [[이익(실학자)|이익]]은 ''천문학은 서양이 [[으뜸]]이고 회회([[아라비아]])가 [[버금]]이며, [[중국]]은 이를 따르지 못한다."라고 단언할 정도가 되었다. 결국 시헌력의 승리. 음력 체계가 태양과 완전히 딴판이 되지 않도록 중국 전통에서는 15.22일 간격으로 [[24절기]]를 설정함으로써, 시헌력 도입 이후에는 황도상 움직임에 따라 24절기를 설정함으로써 윤달을 넣어, 태양의 움직임과 한 달 이상 차이나지 않도록 하였다. 그러나 바꾸어 말하면, 음력 날짜는 태양의 움직임과 최대 한 달까지 차이가 난다. 차이가 한 달 이상 벌어지는대로 바로 윤달을 집어넣는다. 그런데 태양이 황도상에서 여름철에 늦게 움직이고 겨울철에는 빨리 움직이기 때문에[* 지구는 타원궤도로 운동하고 태양의 위치는 지구 궤도의 두 초점 중 하나에 해당하므로 태양과 상대적으로 가까운 점(근일점)과 먼 점(원일점)이 생긴다. 2015년 현재 지구는 1월에 근일점, 7월에 원일점에 도달하는데, 케플러 제2법칙에 의해 근일점에 도달하는 1월에 지구 공전 속력이 빠르다. 지구 공전 속력이 빠르다는 것은 황도 상에서 태양의 움직임이 빠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헌력의 체계 안에서는 윤달은 보통 여름철에 든다. 속담 중에 '윤동짓달(음력 윤 11월)에 빚 갚겠다'라는 말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헌력에서는 윤달이 한겨울에 드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빚을 갚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나온 속담이다. [[추석]]이 양력으로는 한 달 이상 차이가 많이 나는데도 설날은 양력 날짜 차이가 별로 크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로, 태양이 황도상에서 빨리 움직이기 때문에 겨울에는 윤달이 거의 들지 않기 때문.[* 진짜로 윤동짓달이 든 극히 희귀한 사례가 2033년에 있다. 1650년(조선 [[효종(조선)|효종]] 1년)에 윤동짓달이 든 전례가 있지만, 이때는 아직 조선이 명나라 대통력을 사용하던 시절이다. 조선에서는 시헌력을 1653년([[효종(조선)|효종]] 4년)부터 도입했으므로, 2033년 윤동짓달은 한반도에서 시헌력을 도입한 이래, 380년 만의 첫 사례이다.] 순수태음력보다는 훨씬 낫지만, 이런 달력으로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 실상 옛날에도 농사는 [[24절기]]에 맞추서 진행했다. 입춘에는 뭐하고 춘분에는 뭐한다는 식으로.[* 특히 24절기 중 [[망종]](芒種)은 씨 뿌리기 좋은 날이라고 하며 이름에도 씨앗 종(種)자가 들어간다. "씨앗은 망종 전에 뿌려라." 하는 말도 있다.] 그래서 [[24절기]]를 달력에 반드시 표기해야만 했다. 예를 들어 우수가 음력 1월 중에 있는데, 우수가 정확히 1월 며칠에 있는지 알지 못하면 꽝이 된다. 이런 식으로 매년 24절기 날짜가 몇 월 며칠인지 정확히 알아야 했다. 조선에서 매년 역서를 민간에서 함부로 만들지 못하도록 엄히 금했음에도 불구하고 민간에서는 불법으로 역서를 만들어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찍어내는 역서가 적으니까. 조선시대에 [[시헌력]]을 받아들일 때에는 민간에서는 사주를 볼 때도 대통력으로 보고, 제사도 대통력 날짜에 따라 지내기도 하는 등 시헌력을 못 믿을 역법으로 간주한 분위기가 제법 있었다. 시헌력이 서양 오랑캐 역법이란 이유에서였다. [[시헌력]]이 완전히 정착한 다음에도 관상감에서는 왕에게 대통력에 다른 역서를 한 부 필사하여 올렸는데, 이게 고종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렇듯 무시받던 시헌력이 지금에 와서는 전통 달력의 표준인 양 취급받으니 세상 일이란 모르는 법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