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조(고려) (문단 편집) === 외교 정책 === [[거란]]과는 적대적인 관계를 표명했는데, 우선 태조 이전의 [[궁예]]는 거란과 친교 노선을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사]]》 <이외국기> -고려-편에 보면 915년 10월에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 보검을 진상한 기록이 있으며, 918년에도 2차례나 사신을 보내는데 이 때는 궁예의 집권 시기였다. 후삼국 통일 7년 후인 942년 10월 거란의 [[태종(요)|태종]]이 [[송나라|북송]]을 공격하기에 앞서 후방을 안정시키고자 사신과 선물을 보내 통교할 뜻을 밝혔다. 그러나 왕건은 거란이 동맹국인 [[발해]]를 통수친 것도 모자라 멸망시키기까지 했으니 그들을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사신들을 모조리 섬으로 유배보내고, 선물로 왔던 [[낙타]] 56마리를 개성에 있는 만부교 다리 밑에 묶은 뒤 굶겨 죽였는데 이 사건이 '''[[만부교 사건]]'''이다. 태조가 이러한 반(反) 거란 정책을 철저히 펼친 이유는 발해의 멸망과도 관련이 깊은데 과거 거란이 발해와 친하게 지내다가 부족을 통합하고 결국 발해를 멸망시켰으며, 발해의 대씨 왕족과 지배층을 포함한 많은 유민들이 고려 내부로 들어왔기 때문에 정치적인 면에서라도 거란을 적대시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컸다. 당시 고려의 상황은 너무나도 불안했고, 이에 [[발해유민]]들은 태조와 고려에게 있어 중요한 존재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발해 역시 고려와 같이 고구려를 이었다는 동류 의식 또한 태조의 거란 강경책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발해유민]] 수십만 명보다는 후에 북송과 대결하는 거란을 적대시한 것이 정치적으로 훨씬 위험한 선택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당시 고려는 후백제와의 전쟁 때문에 발해를 도와주러 갈 수도 없었으며, 막 삼한을 통일하고 분열을 수습한 시점에도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생과 국가를 되살리고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문화 등 여러 면에서 다양한 제도들을 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런 시점에서 당대 동아시아의 최강으로 떠오른 거란과 적대하는 것은 당장의 이익만 따지면 그야말로 미친 정책이었다고 평할만한 것이다. 하지만 태조는 절대 당장의 이익만을 가장 우선시하는 속물적인 정치인이 절대 아니었다. 이것은 그가 왕위에 있는 동안 펼친 북방 관련 정책들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태조는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평양을 재건해 서경으로 승격시켰는데 이는 당연히 고구려 계승 의지를 전면에 드러내는 동시에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려는 북진의 기상도 분명히 보여주는 행위였다. 그렇기에 훗날 [[조선 태조|이성계]]와 함께 고려 왕조의 문을 직접 닫은 [[정도전]]조차 태조 왕건의 북진 정책을 웅장하고 원대한 계략으로 칭송했을 정도였다. 고려가 결국 474년 사직 동안 [[한반도]] 바깥으로 영토를 확장하지는 못했지만[* 다만 공민왕 시기 몽골 제국의 혼란을 틈타 잠시나마 요동 진출에 성공하기도 했다.] 태조 시절에는 요동을 비롯한 고구려의의 고토 수복이라는 원대한 이상에 대해 진지하게 임했을 가능성이 높다. 전근대에 평양을 수도로 삼으려면 요동의 확보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발해국 세자인 [[대광현]](大光顯)이 수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투항해오자 '왕계'(王繼)라는 이름을 내려주고 종실의 족보에 올렸다. 또 특별히 원보(元甫) 벼슬을 주어 백주(白洲, 현 황해남도 배천군)를 지키면서 집안 제사를 지내게 했다. 따라온 막료들에게는 벼슬을 주고 군사들에게는 토지와 집을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 >《고려사》 934년 7월 기사 中 발해 태자 [[대광현]]이 수만명의 발해 사람들을 데리고 태조에게 투항한 시점은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의 기록들이 서로 다른데 《고려사》는 934년 7월, 《고려사절요》는 925년 12월, 《동국통감》은 926년 1월의 일로 기록하고 있다. 공식적인 발해 멸망은 926년 1월로 이에 따라서 대다수의 [[한국]] 역사학자들은 대광현이 수만 명 혹은 수만 가구의 발해 사람들을 데리고 고려로 투항한 년도는 926년 1월 이후로 보고 있어 《동국통감》의 기록이 가장 사실에 근접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태조가 발해를 나의 나라로 친근하게 대하면서 발해를 침공해 멸망시킨 거란과의 외교를 단절하고 발해 유민을 적극적으로 포섭하기도 했다. 그는 [[후백제]]와의 수많은 전쟁 도중에도 늘 틈틈히 서경을 순행해 북진의 의지를 굳게 다졌고, [[신라]]가 황룡사 9층탑을 짓고 삼국을 통일한 것을 염두에 두고, 개성과 평양 두 곳에 탑을 쌓아 통일전쟁의 승리를 위해 고려 국민들의 사기 진작에도 힘썼는데 이때 개성에는 7층탑, 서경에는 9층탑을 지었다.[* 위치는 서경 장락궁 황성 근처에 있던 [[중흥사]].] 태조는 개경보다 서경을 더 중시했고 장래 수도로 삼을 계획을 내비쳤는데 932년 5월에는 공개적으로 장래에 서경으로 천도하겠다는 계획까지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서경 천도는 태조 본인 대에는 시행되지 않았고 제3대 [[정종(고려 3대)|정종]]이 다시 본격적으로 추진하나 이 역시 무산되어 없던 일이 되었고 끝내는 고려 사직 내내 서경 천도는 성공하지 못하는데 점차 개경 기득권이 된 [[문벌귀족]]들 및 왕씨 왕실의 보수화, 거란+여진+몽골로 이어지는 북방 민족들의 안보 위협이 있었을 것이다. 고려 말기 최고의 대유학자였던 익제 [[이제현]]은 고려 태조의 일생에 대한 논평에서 북진 정책 부분에 대해 결과적으로는 거란을 적대시함으로써 길고 긴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고 말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익(실학자)|이익]]도 《성호사설》에서 태조의 선택을 비판하고, 이에 반해 [[금나라]]에 사대정책을 취한 [[인종(고려)|인종]]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단, 이는 [[성리학]]적 사관이 팽배한 [[조선]] 후기의 의견이라는 것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거란을 적대한 것과는 달리 중원 왕조와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933년 [[후당]]으로부터 책봉받은 후 줄곧 사용하던 연호 '''천수'''를 폐지하고 그들의 [[연호]]를 썼을 정도였으며, 후당의 뒤를 이은 [[후진]]과도 사신을 주고 받는 등 후삼국 통일의 주도권을 잡은 이후부터 계속 중원 왕조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중국 기록에 따르면 태조는 [[오대십국시대]] 후진의 초대 황제 [[석경당]]에게 거란을 협공하자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이를 보면 어떤 대척없이 무조건 주장한건 아니고 중국과의 협공 등을 활용해 거란 공격의 성공 가능성을 최대한 높여보려고 한 듯하다. 다만 태조가 삼국통일하고 강대해졌다는 중국의 기술을 보면 [[고구려]]의 영광을 되찾으려고 하는 태조의 야심을 보고 경계심을 가졌을 가능성도 어느 정도는 있다. 고구려와 중국의 [[역사]]적인 갈등을 생각한다면 고구려의 이름을 자칭하는 태조의 세력이 강해지는건 중국 입장에서 마냥 달갑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 거란이 쳐들어오자 석경당은 [[태종(요)|요 태종]] 야율덕광에게 [[연운 16주]]를 넘겨준다. 딱히 거란에게 위협을 받거나 강요를 당한 것도 아니고 내란에서 거란 도움 받겠답시고 중원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인 연운 16주를 요구받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나서서 넙죽 갖다 바쳤다. 심지어 신하의 극렬한 반대를 씹고 말이다. 석경당이 연운 16주를 거란에 넘겨줘서 수백 년 동안 중국을 고생시키는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걸 생각하면 진짜 별 생각없이 무시한 것일 수도 있다. 후에 중원 왕조를 두고두고 고생시키는 거란에게 중원의 입구를 거리낌없이 바친 사람이 고려가 요동을 합병해 성장하는 것을 견제할 안목이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일본에 대해서는 스자쿠 덴노 시기인 조헤이 7년(937)과 텐교 2년(939) 때 고려 측에서 사절을 보내 조공하겠다고 두 차례 요청했으나 일본이 거절했다. 태조에게 나라를 빼앗기거나 나라를 바친 군주로는 [[궁예]], [[견훤]], [[경순왕]] 김부, [[견신검]]이 있다. 이 중에서 생전에도 사후에도 제대로 왕 대접받은 자는 오로지 경순왕뿐인데 경순왕만이 사후에 [[왕릉]]이 만들어지고 [[시호]]를 받았으며 궁예, 견훤, 견신검은 그런 거 없다. 심지어 시신을 묻은 장소가 정확히 기록된 것도 경순왕뿐이고 나머지는 시신이 어디 묻혔는지도 모른다. 궁예야 애초에 왕건의 쿠데타 대상이었으니 그렇다쳐도 견훤은 생전에 '''상보'''라고 불릴 정도로 대접받았고 견신검은 투항 후 관직을 받았음에도 사후에 비참한 대우를 받은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