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조(조선) (문단 편집) == 시호, 묘호, 휘 == [[묘호]]는 천자의 칭호이므로 유교 예법상 제후국은 묘호를 올릴 수 없다. [[시호]]도 스스로 올릴 수 없는데, 이는 천자의 신하로서 천자가 주는 시호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나라|당]]이 기록한 [[발해]]의 [[연호]]와 [[시호]]에는 각각 사개(私改: 사사로이 바꾸다), 사시(私諡: 사사로이 시호를 올리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당 입장에선 제후국인 발해가 [[황제국|천자]]의 연호를 쓰고, 시호를 천자에게 안 받고 독자적으로 올렸기 때문.] 그래서 [[원 간섭기]]의 고려가 독자적 묘호도 시호도 없었던 것이다. 묘호는 고려 멸망 때까지 회복하지 못했고, 시호는 [[공민왕]] 때 회복했다. 하지만 조선은 두 가지를 지키는 척하면서 내부적으로는 몰래 독자적인 묘호와 시호를 써서 태조(太祖)와 그 4대조들에게 모두 천자의 묘호를 올리고 독자적 시호를 올렸다. 물론 [[명나라]]와의 외교에 있어서는 명나라가 준 시호를 철저하게 따르는 모습을 보였다. 우선 묘호는 절대 명에 알려지지 않게 했다. 그리고 시호는 독자적으로 올리되 [[명나라|명]]이 보내준 시호를 대표시호로 삼았다. 고려의 경우 [[원 간섭기]] 이전엔 묘호를 독자적으로 쓰고 시호도 누구한테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쓰고 독자적 시호를 대표 시호로 삼았다. 고려 국왕 문서의 '태조·○종 ○○대왕'의 빈 칸 모두 독자적 시호이다. 그래서 조선이 올린 시호는 대표 시호로 삼지 않았고 명이 보낸 시호를 묘호 뒤에 대(大) 자를 붙여 사용했다(묘호 + 명으로부터 받은 시호 + 대왕). 그래서 조선이 정한 공식 [[존호]]는 '태조 강헌대왕(太祖康獻大王)'으로 [[조선왕조실록]] 태조편 제목도 〈태조 강헌대왕 실록〉으로 되어 있다. [[명나라]]가 준 시호가 '강헌(康獻)'이기 때문이다. 명나라 앞에서는 철저히 '강헌왕'이라고만 일컬었다. 훗날 [[청나라]]도 당대의 조선 국왕들에게 시호를 줬지만 그때는 받기만 하고 쓰지도 않았다. 전조 고려처럼 굳이 조선의 자주적 묘호와 시호를 합쳐 부른다면 '태조 신무대왕(太祖神武大王)'이 된다. 하지만 실제로 이렇게 불린 적은 없다. [[조선왕조]] 당시 이성계의 대표 시호는 어디까지나 강헌대왕(康獻大王)이었다. 신무(神武)는 위대한 무장이었던 점을 감안해 올린 시호로 이성계의 두 아내들도 神 자 돌림 시호를 가지게 된다.([[신의왕후]], [[신덕왕후]]) 군주와 아내의 시호를 맞추는 예법은 천자국의 예법으로 태조 이성계에게만 한정하여 이 예법을 적용하고 후대 국왕 왕후들은 시호를 맞추지 않았다. [[대한제국]]은 이 시호 예법을 철저히 따랐다. 조선조 역대 국왕의 독자적 시호 중 마지막 부분을 보면 태조 아래의 모든 국왕이 '효(孝)'로 끝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태종(조선)|태종]]은 광효(光孝), [[세종(조선)|세종]]은 명효(明孝), [[숙종(조선)|숙종]]은 원효(元孝) 등등. 이들은 태조의 자손으로 효성을 다해 국가를 이끌었다는 뜻으로 받은 것이다. [[효종(조선)|효종]]만 정덕(正德)인데, 이는 이미 묘호에 '효'가 있으니 [[뇌절|또 쓸 필요가 없어서]]이다. 종합하면 비록 태조의 대표시호는 [[명나라|명]]의 시호로 했지만, 조선은 시호 예법에서 해줄 수 있는 모든 예우를 바쳤다. 이후 [[대한제국]]이 열리고 대표시호를 바꾸었다. [[함흥본궁]]의 위패엔 '태조 고황제'가 쓰여 있는데, 이는 [[고종(대한제국)|고종]]이 대표시호를 '강헌대왕'에서 '고황제'로 재추존해서 바꿨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 정식 시호는 [[명나라]]와 조선의 시호를 합친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었는데, 1683년(숙종 9년)은 '정의광덕(正義光德)'이 추가되어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정의광덕대왕(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正義光德大王)'이 되었고, [[대한제국]]의 [[고종(대한제국)|고종]]이 고황제(高皇帝)로 추증하며 명나라로부터 받은 시호인 '강헌(康獻)'을 폐했다. 그래서 최종 정식 시호는 '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太祖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이다. 군주와 아내의 시호를 맞추는 예법도 부활해 태조 고황제의 시호에 맞춰져 왕후들도 신의'고'황후, 신덕'고'황후로 추존됐다. [[태조(고려)|태조 왕건]]과 마찬가지로 '태조'라는 묘호보다 본명이 대중에게 익숙해서 '이성계'나 '태조 이성계'라 많이 부른다. 다른 왕들처럼 그냥 '태조'라고만 하면 고려의 태조 왕건이나 그 외에 [[태조]] 묘호를 쓴 국내외 다른 왕들과 혼동이 되고, 즉위 전 고려의 장수로서 오랜 시기를 보냈기 때문에도 그러하다. 오늘날에 많이 쓰이는 표현은 아니지만 과거에는 '이태조(李太祖)'라고도 많이 불렸는데 오늘날에도 장·노년층에서 이성계를 이태조라고 부르는 사람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사실 이태조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지만 조선시대에도 고려 왕건을 가리켜 '왕태조(王太祖)'라고 부른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정확한 표현은 아니기 때문에 안 쓰는 것이 좋다. [[베트남]]의 경우 국호가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왕조 교체가 자주 일어나서 [[태조(리)|이태조]], [[쩐트어|진태조]], [[태조(레)|여태조]]와 같이 성과 묘호를 붙여 쓰는 게 정식이다. 왕이 되면서 [[피휘]] 문제 때문에 이름을 '단(旦)'으로 개명했는데 개명한 휘가 [[예종(당)|당예종]]과 [[한자]]까지 완전히 겹친다. 성(成) 자는 원래 이름으로 잘 쓰고 일상적으로도 자주 쓰이는 글자라서 아예 왕 본인이 갈아버린 것. 피휘로 인해 [[조선시대]]의 문헌에서는 단(旦)자의 日과 一 사이를 연결하는 짧은 획을 하나 더 썼고 함부로 글자를 고칠 수 없는 경전에서 이 글자가 나올 때에는 원래 음 대신에 됴(=조)로 독음을 달았다. 이단이라는 이름조차 군주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도 금기시하기에 거의 불리지 않았다. 이단이라는 이름이 자주 쓰인 것은 구한말의 일로 피휘를 할 필요가 없던 서양인들은 조선의 역사를 소개할 때 이단이라는 이름을 직접 사용했다. 국내에서는 오랜 피휘의 역사 때문에 이단이라는 이름 자체가 잘 알려지지 않아서 역시 이성계라는 이름이 주로 쓰인다. 여담으로 별호로 '''[[성조(동음이의어)#s-2.2|성조]](聖祖)'''라고도 불리웠는데 세종 시절인 1446년(세종 28년)에 [[세종(조선)|세종]]이 [[용비어천가]]의 팔준(八駿)에 대한 내용을 보고는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안견]]을 시켜 태조의 여덟 마리 말들을 그리게 했는데 이것이 바로 '팔준도'로 당시 세종은 이 팔준도에 대해 이듬해인 1447년(세종 29년)에 관료들을 대상으로 하는 [[과거 시험]]에서 이 팔준도를 제목으로 하는 글을 짓도록 했다. 이 때 [[신숙주]]와 [[성삼문]]이 올린 글귀과 찬시들을 보면 당대 [[집현전]] 학사들이 '태조(太祖)'를 '성조(聖祖)'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일종의 '별호'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아들인 [[태종(조선)|태종 이방원]]의 별호는 [[성종]](聖宗)이었다. [[도조(조선)|할아버지]]와 [[환조(조선)|아버지]]는 [[몽골어]] 이름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성계는 [[몽골]]식 이름이 전해 내려오지 않는다. 아버지 이자춘이 고려로 귀부(歸附, 망명하여 귀속함)할 당시 이성계는 20살이 채 안 된 청년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몽골식 이름이 있었을 확률이 높지만 아무래도 왕조의 개창자다 보니 정통성 차원에서 본인이 일부러 공개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