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종(당)/생애 (문단 편집) === [[왕세충]]과 [[두건덕]]을 동시에 물리치다 === 이 무렵 [[이밀]]은 [[왕세충]]에게 박살이 난 상황이었다. [[낙양]]은 그 당시 가장 중요한 도시였고, [[낙양]]의 주인이 왕세충이었다. 하지만 당장은 이밀과의 싸움에서의 피해가 커서 세력이 좋지는 않았는데, 이세민은 바로 그런 순간을 노린 것이었다. 왕세충과의 전투는 혈전으로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는데, 결국 이세민이 승기를 잡고 왕세충을 낙양성 내에 가두는 데 성공했다. 승리가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두건덕이 군사를 몰고 왕세충을 도우러 온 것이었다. 하북의 [[두건덕]]은 농민 봉기군 출신이었다. 이전까지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던 그는 이세민이 왕세충을 몰아넣는 모습을 보자 위기를 느꼈다. 본래 두건덕과 왕세충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왕세충이 패배한다면 당나라를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 자명했기에, 대군을 이끌고 왕세충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왔던 것이다. 이에 이세민의 진영은 엄청난 공황 상태에 빠졌다. 왕세충과의 혈전도 쉽지가 않아 군사들이 많이 상했는데, 이 와중에 두건덕을 이기는 것은 어림없는 상황이었다. 퇴각을 할 수도 있었지만 이세민은 단호한 방법을 취했다. 이세민은 동생 이원길에게 낙양의 포위를 맡겨 두고, 가뜩이나 완전치 않은 병력을 절반으로 나누어 재빨리 무뢰관으로 입성했다. 이런 요충지의 관문을 빼앗겨 정면 대결로 간다면, 이세민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발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단 무뢰관에 들어간 이세민은 두건덕이 싸움을 걸어도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두건덕의 병력은 1개월 동안 꼼짝도 못했고, 이때 두건덕의 책사 능경(凌敬)이 다른 전략을 제안했다.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닙니다. 이세민에게는 무뢰관을 계속 지키라고 하지요! 차라리 [[하북]]으로 북상해서 [[당나라]]의 [[산서]]를 바로 칩시다. 그리하면 [[낙양]]을 포위하고 있는 군대도 돌아갈 테니, 왕세충은 그러면 자연히 구원되겠지요" 이른바 전국시대 제나라의 군사 [[손빈]]이 위나라의 [[방연]]을 물리친 "[[위나라]]를 쳐서 [[조나라]]를 구한다"는 계책이었는데, 두건덕은 이를 무시했다. 그러자 두건덕의 부인마저 나섰다. >"대왕께서 당을 공격하고, 다시 돌궐이 관중을 공격하면 틀림없이 포위가 풀어질 터인데, 어찌 여기서 군비를 소모하고만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두건덕은 "아녀자가 끼어들 곳이 아니오!"라면서 그 충언을 무시했다.[* 다만 농민 봉기군이라는 특성상 만약 당나라 본토를 공격했다가 뒤에서 이세민에게 협공이라도 당한다면 모랄빵이 나서 뿔뿔히 흩어지게 될 가능성도 있다. 애시당초 이런 농민군은 사기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사실 당나라를 직접 공격한다는 것은 보급선이 그만큼 늘어지는 것이므로 난이도도 그만큼 높다. 그나마 정규군이라면 보급선이 늘어나도 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만 농민군인 두건덕군으로서는 하기 힘든 재주이다. 거기다 돌궐이 관중을 공격해줄지도 미지수이며, 또한 이세민의 군대는 당나라의 정예군일 수는 있어도 주력군이라고 하기는 어렵기에 두건덕으로서도 판단이 어려웠을 것이다. 사실 손빈이 방연을 쳤을 때도 병사는 손빈이 기른 제나라의 강군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한편 적진에서 동요가 일어나고 있을 때, 이세민은 다시 폭풍처럼 몰아칠 준비를 끝내놓았다. 정오가 되어 두건덕군의 전의가 많이 떨어졌을 때, 이세민은 기병을 동원해서 적군을 휘몰아쳤다. 두건덕도 기병으로 적의 기병을 막으려고 했지만, 갑작스런 공격이라 재빨리 대처를 못했고, 이때 이세민은 직접 나서서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적의 사방을 헤집어 버렸다고 한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건덕의 주력은 궤멸되었고, 두건덕은 생포되었다. 낙양까지 끌려온 두건덕을 본 왕세충은 일이 다 끝장났다고 생각해서 항복하고 만다. 그 후 두건덕은 장안으로 끌려와 처형당했고, 왕세충은 고조 이연에 의해서 목숨만은 구하지만, 결국 자기가 처형했던 독고기(獨孤機)의 아들 독고수덕(獨孤修德)에 의해서 암살당했다. 유무주를 쳐서 당나라의 위기를 구하고, 왕세충과 두건덕을 동시에 때려잡은 이세민의 무공은 어마어마했다. 620년 10월, 당나라 조정은 이세민에게 '''천책상장'''(天策上將)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하지만, 이 막대한 공 때문에 갈등이 벌어지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