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종(조선) (문단 편집) == 기타 == * [[메뚜기]] 떼가 창궐하자 몇 마리를 잡아오게 한 후 가장 큰 놈을 골라 "네놈이 백성의 곡식을 갉아 먹는다니 차라리 내 오장육부나 갉아먹어라!!!"라고 대성일갈을 내지르면서[* 《[[맹꽁이 서당]]》에도 이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데 이 대성일갈을 들은 메뚜기가 "무식한 말씀 마시오. 메뚜기는 초식 곤충이라 곡식 외에는 안 먹소이다."라고 대꾸했다.] 메뚜기를 삼켜버렸고 깜짝 놀란 신하들이 혼비백산하며 빨리 의원을 불러오라고 명을 내렸는데 태종 본인은 멀쩡했으며 이후 메뚜기떼는 사라졌다고 한다.[* 태종의 애민정신을 엿볼수 있는 대표적인 설이다.] 중국 [[태종(당)|당태종]][* 이 둘은 서로 비슷한 점이 많은데 아버지를 도와 국가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경쟁자였던 형제를 제거했고 후계자를 세울때 문제가 많은 첫째 아들을 폐하고 셋째 아들에게 넘겨주었다.]에게도 같은 일화가 있는데 [[야사(역사)|야사]]라는 특성을 감안하면 둘 다 [[성군]]의 면모를 나타내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훗날, [[정조(조선)|정조]]도 아버지 [[사도세자]] 무덤([[현륭원]])과 관련한 비슷한 일화[* [[송충이]]가 크게 번져 현륭원 근처의 [[소나무]]가 모두 고사하여 말라죽는 일이 일어났다. 인부들이 잡아온 송충이를 집어 "내 아비가 억울하게 죽어 이 곳에 누워 계신데 그 나무를 갉아먹는단 말이냐?"하고 호통을 치고 그 송충이를 냅다 씹어 삼켰다. 그러자 하늘에서 [[까치]]떼와 [[까마귀]]떼가 내려오더니 그 송충이들을 다 먹어치웠고 이후로 무덤 근처에 송충이가 싹 사라졌다는 전설. 당태종이나 조선 태종의 일화가 백성을 위한다는 애민(愛民)의 면모를 강조한다면 정조의 일화는 [[효심]]을 강조하는 전개다.]가 있다. * 쑥갓을 싫어했었다. * [[코끼리]]를 처음으로 길들여본 [[조선/왕사|왕]]이다. [[무로마치 막부|일본]]에서 바친 [[코끼리]]가 [[조선]]에 들어오면서 조선 전체는 이 처음 보는 [[짐승]]에 놀라 서둘러 구경을 오고 난리법석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귀는 파초잎과 같고 눈은 작고 네 다리는 통나무, 코는 누에와 같다고 나온다.] 그런데 문제는 전직 [[공조판서]]인 이우(李禹)가 [[코끼리]]를 보고 추하게 생겼다며 대놓고 놀려댄 데다가 침까지 뱉는 바람에 화난 [[코끼리]]가 그를 밟아 죽였다는 거다. 이에 놀란 태종은 처음에는 [[코끼리]]를 살처분하라고 했지만 그래도 일본에서 [[선물]]해준 것이라 외교상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하여 결국 [[전라도]] [[여수시|순천도호부]] 장도(獐島)[* 現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의 장도로, 현대에는 율촌산단을 조성하면서 매립해서 육지가 되었다.]로 [[코끼리]]를 [[귀양]]보냈다. 그러나 [[코끼리]]가 섬에 [[귀양]]간 뒤부터 [[미역]]과 [[풀]] 등의 모든 먹이를 거부하고 슬프게 울기만 하여 [[뼈]]와 [[가죽]]만 남을 정도로 말라버려서 이를 불쌍하게 여긴 태종이 결국 1년 만에 [[귀양]]을 풀어주라고 했으나 [[먹이]]를 워낙 많이 먹어대는 터라 결국에 [[전국]]에 돌아가며 [[사육]]하라는 명까지 내린다. 이후 [[세종(조선)|세종]]의 집권기에서야 [[관찰사]]의 [[상소]]로 다시 섬 가운데의 목장 지역으로 가게 되고 이후에 실록 내에서 [[코끼리]]의 기록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기록상으로 보면 [[코끼리]]는 [[조선]] 입장에서는 식량만 축내는 큰 애물단지였다.[* 만약 1500여 년 전 [[로마]]에서 잡혔다면 [[코끼리]]는 [[황제]] 앞에서 [[글자]]를 쓰는 등의 재주를 익혀 나름대로 쓸만한 수준이 되었겠지만 [[조선]]은 [[코끼리]] 서식지와 멀리떨어져있고 [[명나라|중국]] 최남단 지방이나 [[동남아]] 국가에서 [[사육사]]를 데리고 오는게 만만치 않은 일이었고 그걸 감안해도 [[코끼리]]는 키우는 데만 많은 비용이 소모되는 동물이었다. 오죽 비용이 많이 들면 [[아시아코끼리]]가 자생하는 [[남아시아]] 지역에서는 [[왕]]이 미워하는 [[신하]]에게 [[코끼리]]를 하사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코끼리]]를 키우려니 살림이 거덜나고 그렇다고 죽이거나 다른데 넘기려니 [[왕]]이 직접 하사한 놈이라 불충이 되기 때문...][* 이는 다른 여러 문화권에서도 비슷한 입장인데, 영어권에서 white elephant라는 말은 애물단지를 가리키곤 한다. 특정 문화권에서 흰 코끼리 ([[알비노]])는 신의 축복이란 설이 있었는데, 그래서 흰 코끼리가 태어나면 잘 보살펴야만 했다. 일이나 전쟁 등에 써먹는 것도 당연히 금지였으니, 이 코끼리 하나 맡으면 지방 영주의 재정이 망가지는건 순식간.] * [[고려]]가 [[원나라]]에 그랬듯 [[조선]] 역시 [[명나라]]에게 [[공녀]]를 바쳤는데 이를 모면하기 위해 [[딸]]의 [[머리카락]]을 자르거나 [[얼굴]]에 침이나 뜸을 들이고 [[약]]을 붙이는 등의 방법을 쓰는 자들에게는 왕명을 거역한다는 명분으로 엄벌에 처하며 가산까지 전부 몰수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결국 300명의 [[공녀]] 후보자를 44명으로 압축했다가 5명으로 최종 결정되었는데 태종은 환궁한 후 대신들에게 대상자들로 선정된 [[여자]]들에 대해 "누구는 얼굴이 [[관음보살]]같아 애교가 없네. 누구는 입술이 넓고 이마가 좁네. 그게 무슨 인물이냐?"라고 불평했다. [[공녀]] 차출에 대해 원통함을 느끼며 혹시나 [[자살]] 시도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중종(조선)|중종]]과는 정반대. * 임금의 모든 행적을 기록하여 '[[조선왕조실록|실록(實錄)]]'으로 만드는 [[사관(역사)|사관]]들을 매우 싫어했다. [[말(동물)|말]]에서 낙마한 뒤 사관들에게 비밀로 하라 했지만 당연히 사관들은 빠짐없이 기록했으며 심지어 '''낙마한 것을 사관에게 비밀로 하라고 말한 그 사실까지 전부 기록했다.''' [[사관(역사)#s-2.3.1|민인생]]이란 사관은 "내가 쉬는 편전에 들어오지 말라" 하는데도 기어들어왔다가 걸려 잡혔을 정도였다. 다만 그렇다고 사관들을 몰살하거나 제도를 없애는 일은 당연히 하지 않았다. 애시당초 당시 사관들이 워낙 극성맞은 면이 컸을 뿐이다. 특히 민인생은 그 중에서도 특출난 인물로, '''왕의 사적공간(사생활 공간)까지 침입한 정신나간 인물'''이라 당대 사관을 통틀어서도 매우 괴팍한 편에 속했다. * [[태종우]](太宗雨)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진다. 단, [[부산광역시|부산]]에 있는 [[태종대]]와는 당연히 이름만 같은 뿐 관련이 없다. * [[여말선초]] 시대에 [[조선/왕실|왕실]]의 많은 인물은 [[초상화]]가 남거나 [[외모]]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태종에 대한 기록은 [[태종실록]] 총서에 아버지인 [[태조(조선)|태조]]의 용모와 태종의 용모가 서로 닮았다는 [[https://sillok.history.go.kr/id/kca_000|간략한 기록]] 밖에 없을 정도로 상당히 적은 편. 태종에 대한 외모 묘사를 유추할 수 있는 기록 몇 가지가 있는데 《[[태조실록]]》에서 [[태조(조선)|태조]]가 [[명나라]] 사신을 보낼 때 아들 이방원이 자진해서 [[명나라]]에 가겠다고 하니 "너의 체질이 파리하고 병약해서 그 먼 길을 갈 수 있겠느냐?"라고 말한 기록을 보아 무인 집안의 아들치고는 호리호리한 체형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태종은 어려서부터 무예보다는 문재에 뛰어났다. 무력의 관한 기록은 [[활]]을 잘쏘고 [[사냥]]을 활발히 했다고 언급되있다.] [[성균관]] 생활을 하며 수도에서 [[관직]] 생활을 했으니 형들처럼 우락부락한 체형보다는 마른 체형의 타입으로 보인다. 하지만 태종은 [[명나라]] 사신 업무도 무난히 해냈고 [[장수]]까지는 아니라도 당대 [[조선/왕사|군주]]치고는 살만큼 산 [[나이]]이며 살인적인 업무량에도 그가 딱히 병에 시달렸다는 설명은 없다. 태종은 [[1422년]] 5월, [[사망|승하]]했는데 3월과 4월에 연달아 [[사냥]]을 나갈 정도로 [[건강]]했다가 갑자기 [[병]]에 걸려 죽은 것이다. 아버지 [[태조(조선)|태조]]나 형 [[정종(조선)|정종]] 수준이 아니었을뿐 태종 역시 일반적인 기준으로는 강인한 [[신체]]를 지녔을 [[확률]]이 높다. 특히 취미가 [[사냥]]이었던 인물인만큼 진짜로 신체 능력이 빈약한 사람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태조가 장군시절 전설적인 용장이었고, 정종 역시 무관으로서 고려시대 때부터 활약하며 곰처럼 강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실 이성계의 후손이라 그런지 조선의 왕 중에는 덩치가 좋았다는 기록이 있는 인물이 많다. 문종도 그렇고 성종이나 그 아들들인 연산군과 중종도 그렇고, 심지어 효종은 언월도와 철퇴 등으로 무예를 연마하는 걸 즐겼기에 죽을 때 어깨가 너무 넓어 미리 짜둔 관이 안 맞을 정도였다. 집안 전체가 이런 떡대들이니 웬만큼 건강한 사람이라도 연약해보였을 것이다.] 또한 태종 본인의 피셜로는 [[효령대군]]이 자신의 닮은 꼴이라고 언급한 적이있다. 또한 [[효령대군]] 초상화 기록에 의하면 [[양녕대군]], [[세종(조선)|세종]]과 닮았다고 전해진다. * 자신이 직접 목숨을 빼앗은 [[정도전]]은 그 과정과 결과를 감안할 때 의외로 사후 처분은 관대하게 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정치 [[숙청]]을 단행할 때는 [[역모]] 혐의를 적용해서 [[가문]]과 [[명예]]를 박살내고 다시는 복권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매장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하지만 태종은 [[정도전]] 본인에게만 '[[종친]] 모해죄'라는 다소 어정쩡한 죄목을 붙이고 명예를 추탈했을 뿐 부인 및 자녀들은 잠시 [[노비]]로 전락했다가 몇 년 뒤에 복권시켜서 정도전 가문이 정상적으로 [[벼슬]]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정도전]]에게는 아들이 넷 있었는데 [[1차 왕자의 난]] 당시 두 아들은 [[정도전|아버지]]를 구하려다가 죽었고 한 아들은 집에서 [[자살]]했다.[* 장남인 정진은 [[태조(조선)|임금]]을 모시고 있어서 살아서 수군이 되었다가 [[1407년]](태종 7년)에 복직되었고 [[세종(조선)|세종]] 시기 [[형조판서]]까지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후에도 [[정도전]]의 [[후손]]들은 별다른 [[연좌제]]의 피해를 입지 않고 일반적인 [[사대부]] 집안으로서 살아갈 수 있었으며 [[연산군]] 대에 [[정도전]]의 증손자인 정문형이 [[정승]]이 되기도 했다. [[사림]]이 정문형의 [[정승]] 취임을 반대할 때에도 [[정도전]]의 증손이라는 이유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공적이 별로 없다는 것을 이유로 반대했다. 물론, [[정도전]] 본인은 국적이어서 [[선조(조선)|선조]] 때 [[기축옥사]]에 휘말린 진주의 선비 최영경은 "그대가 혹 길삼봉이냐?"라는 물음에 "[[역적]] [[정도전]]의 호가 삼봉(三峰)인데 어떻게 삼봉이라는 [[이름]]을 쓰겠느냐"고 답했다. [[광해군]] 때 [[허균]]을 고발한 [[기자헌]]의 아들은 그 사유 중 하나로 [[정도전]]을 현인(賢人, 어질고 현명한 사람)이라 칭했다는 것을 들었다. * 역대 [[조선/왕사|조선 왕들]] 중 가장 강력한 [[왕권]]을 지녔던 [[임금]]이다. [[카리스마]]있는 철혈군주 성격을 가진 [[조선/왕사|임금]]의 대표격으로 여겨진다. [[태조(조선)|부왕]] 못지 않게 [[드라마]]같은 인생을 살았다. 조선의 왕 중 즉위 후 행적을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왕이다. 실록이 편찬된 것은 [[고려]] 때부터 있었던 일이었고 뒤이어 편찬된 《[[조선왕조실록]]》은 시간이 흐르며 무엇을 적을지, 무엇을 적지 않을지 기준이 만들어졌는데 《[[태종실록]]》을 만들 때에는 [[고려]] 중기 이후로 최초로 [[독립|독립적]]으로 편찬된 [[조선왕조실록|실록]]이다 보니 그냥 [[조선/왕사|왕]]이 한 말과 행동을 있는대로 다 적었다. * [[왕자]]의 난(1,2차)과 숙청으로 [[사람]]을 많이 죽였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실제로 그가 죽인 인물은 의외로 그렇게 많지는 않다. 태종은 왕권 안정을 위해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한 핵심인물만 핀포인트로 제거했으며 [[연좌제]]가 당연시되던 시대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그 [[가족]]이나 주변 인물은 거의 건들지 않았다. 잠재적인 [[권신]]이 될 수 있는 외척 세력만 철저히 [[숙청]]했을 뿐 왕권에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경우는 충분한 명분이 있음에도 오히려 별다른 처벌을 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애당초 먼저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한 측근이었던 세력이라든지 자신의 공신들은 권력에서 밀어냈을 뿐 어지간 해서는 죽이지 않았다. 친형 [[회안대군|이방간]]은 물론이고 불온한 말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여러 [[신하]]들도 내버려 두었다.[* 이방원이 형 [[회안대군|이방간]]을 살려준 것에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는데 이미 [[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 [[조선/왕실|왕실]] 내에서 피바람이 몰아친 마당에 동복형제까지 죽였다가는 아무리 진압의 명분이 정당하다 해도 민심이 매우 흉흉해질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앞으로 본인의 집권에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조선/왕실|조선 왕실]] 전체의 [[조선/왕사|정통성]]에도 흠집이 날 수 있었다. 그래서 책임을 [[박포]]에게 모두 몰고 형 [[회안대군|이방간]]의 목숨을 살려준 것. [[태조(조선)|이성계]]와 [[정종(조선)|이방과]]가 동의한 것도 가족에 대한 애정뿐만 아니라 이 부분도 있었다.][* [[세종(조선)|세종]]의 장인 [[심온]]의 경우 과민 반응이었다는 비판이 있다. 다만 이 경우 아들이 어떤 인물로 자라날지 모르므로 최대한 [[세종(조선)|아들]]이 [[조선/왕사|왕 노릇]]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 내린 당시 기준으로는 나름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결과적으로 [[세종(조선)|세종]]은 결단력과 총명함을 겸비한 명군(성군)이었지만 만약 [[세종(조선)|세종]]이 [[능력]]은 뛰어나나 정에 약해 이리저리 휘둘리는 사람이었고, [[심온]]의 가족들이 권력욕이 있었다면 [[청송 심씨|외척]]들에게 휘둘릴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 실제로 [[심온]] 본인은 몰라도 그의 집안 사람들은 여러모로 자중하지 않고 태종의 심기를 꾸준히 건드렸다. [[청송 심씨]] 가문의 권력 자체도 이미 태종이 숙청한 [[여흥 민씨]]에 못지않게 강력해 안 그래도 어그로가 뿜어져나오는 가문이었는데 몸을 사리기는 커녕 대놓고 [[숙청]]해달라는 수준으로 깝치고 나대고 다녔으니 태종의 숙청의 레이더에서 끝내 벗어날 수가 없었다.] * 어찌 보면 강강약약에 해당하는 군주. 이방원이 맞선 상대를 보면 대부분 이방원 본인보다 높은 체급을 가진 사람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본인이 권좌에 있던 시절, 왕권에 위협이 될 것이라 판단되는 본인 치세의 권세가들[* 주로 자신이 세운 공을 믿고 권세를 누리는 공신들이 해당.]을 상대로도 강하게 대처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하였으며, [[사관(역사)|사관]]들로부터 끊임없이 스토킹을 당하며 분노한 와중에서도 사관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고 인정하였다. 자신의 침전에 실수로 들어온 사람도 별다른 처벌 없이 넘어가고[* 실수든 아니든 왕의 침전에 무단출입하는 것은 한낱 국왕 시해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중대한 일로 엄청난 사건이다.] 심지어 말년에는([[상왕]] 시절) 자신을 폭행한 장미라는 궁녀는 단순히 출궁시키는 것으로 마무리짓는 등 약자에게만큼은 굉장히 관대하였던 태종 이방원의 모습이 실록에 여지없이 잘 나타나 있다.[* 다만 이 궁녀도 끝은 좋지 않았는데 2년 뒤 태종이 장미를 목을 졸라 죽이든지 물에 던져 죽이든지 해야 겠다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는 이 2년 사이에 궐에서 벌어진 소동들 때문인데 이것들을 건급하면서 장미도 덤으로 얽혀 재소환된 것.] * 어찌보면 [[창업군주|건국자]]이자 아버지인 [[태조(조선)|이성계]]보다도 [[조선/왕사|왕]]으로서의 자질을 보여준 인물인데 화통하고 진솔하며 리더십, 포용력과 [[카리스마]]를 갖췄지만 무인 출신이다보니 정치적 감각과 역량에 한계가 있던 [[태조(조선)|아버지]]와 달리 무인 집안 출신임에도 [[과거 제도|과거]]에 [[합격]]할 만큼 뛰어난 학식과[* [[고려시대]] [[과거제|과거]]는 진입 장벽이 [[조선시대]]에 비해 훨씬 높았다. 이유는 [[고려시대]]의 [[과거 제도]]는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무과]]를 치르지 않았고 문과와 잡과만 치렀기 때문이었다. 그러하니 경쟁률이 높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 어려운 시험을 불과 17세(현재 [[고등학교]] 1학년, 당시 응시자 중 나이 기록이 있는 사람 중 거의 최연소)에 해당하는 나이에 붙었으니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정도전]]은 18세, [[정몽주]]는 19세. 당대 [[여말선초]]의 제일 석학들과 비교해도 매우 뒤쳐지지 않는다. 특히 [[고려|고려시대]]의 [[과거 시험]]은 족벌화가 매우 심해서 감독관의 제자들이 대부분 합격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더 고평가 받을 부분이다.] 훗날의 정치 역량까지 그야말로 [[조선/왕사|왕]]의 그릇을 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용재총화]]》의 저자 성현(成俔)은 태종을 "문관(文官)으로 [[역성혁명|패업]](覇業)을 이룬 유일한 인물"이라고 평가한 적이 있고, 조선 말엽 [[미국인]] 선교사이자 [[한국사]]를 많이 연구한 [[호머 헐버트]]는 태종을 [[영국]]의 [[청교도 혁명]]을 이끈 인물인 [[올리버 크롬웰]]에 비유하기도 했다. 다만 크롬웰과는 사적인 면에서는 굉장히 다른데, 철저한 금욕주의자인 크롬웰과 달리 태종은 사냥이며 여색이며 놀고 싶은 건 칼같이 챙겨서 놀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