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평천국 (문단 편집) == 권력 다툼 == 초반에는 종교 운동의 성격이 강했지만 본격적인 반란을 계획한 후 부터는 정치성 및 권력 다툼의 성향이 짙어졌다. 우선 태평천국이 발행한 다양한 [[교리]] 및 행적을 말하는 서적을 보면 초반에는 [[홍수전]]과 [[풍운산]]의 권력이 절대적이었다. 훗날 체포되어 처형된 홍인간의 진술에 따르면 홍수전은 종교의 절대적 상징으로 어디를 가나 환대받고 기적을 일으키는 존재로 인식됐다. 또한 풍운산은 교리의 전파 및 선전을 담당하여 2인자 노릇을 했다. 실질적인 권력은 풍운산이 좀 더 높았지만 풍운산이 홍수전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고 둘의 조합이 잘 맞았기에 그럭저럭 돌아가는 형편이었다. 물론 이때에도 간부들의 휘하에는 각 세력이 있었지만 통제를 못 할 정도는 아니였다. 하지만 풍운산이 잠시 체포된 후 홍수전이 금전촌의 본부 자리를 비우자 권력의 중심은 급격히 [[소조귀]], [[양수청]]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둘은 [[무당]]의 [[신내림]]을 모티브로 삼아서 천형하범과 천부하범을 시전했고 교단 내에서 지위는 급격히 상승했다. 특히 소조귀와 양수청이 풍운산 석방과 흔들리는 교단의 정비에 공을 세웠고 종교라는 특성상 신의 말씀을 전한다는 그들의 주장을 무시하기 어려워서 홍수전도 그들의 권위를 인정했다. 소조귀와 양수청의 권위에 밀린 홍수전과 풍운산은 당시 태평천국이 마련한 근거지 중 본영인 금전촌에 머물지 못하고 산인촌에 머무는 등 밀리는 양상을 보였다. 이때의 기록을 보면 파편적이지만 소조귀의 권위가 조금 더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소조귀는 [[홍수전]]의 계모 집안인 왕씨 가문의 딸을 [[아내]]로 맞아서 홍수전의 형제이자 하느님의 [[사위]]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고 소조귀가 교단에서 키워 준 [[위창휘]]의 입지가 오르면서 자연스럽게 권력의 중추에 도달했다. 처음 위창휘를 포섭한 것은 풍운산이지만 소조귀가 그의 권위를 키웠다. 하지만 이런 양상도 얼마 지나지 않아 변했는데 영안을 점령한 후 청군과의 전투에서 소조귀가 부상을 입으면서 천형하범이 끊기게 된 것이었다. 심각한 부상 혹은 양수청의 압박으로 소조귀의 천형하범이 끊기고 양수청은 독보적인 천부하범을 통해서 권력을 차지했는데 홍수전도 양수청을 정군사(正軍師)에 임명하고 각 왕들의 감독권을 주면서 양수청은 천경사변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종교, 정치에서 절대적 권력을 차지했다. 천경점령 후 천경사변으로 [[양수청]], [[위창휘]], [[진일강]]이 죽고 사태를 수습한 [[석달개]]가 이탈하면서 다시 권력은 변동했다. 홍수전은 그간 [[양수청]], [[소조귀]]에 시달려 왔기에 자신을 중심으로 권력 개편을 시도했고 이에 자신의 형인 홍인발, 홍인달을 왕으로 삼고 사촌 동생 홍인간 역시 왕으로 삼는 등의 시도를 했으며 몽득은, 임소장을 고위 관료에 임명하여 자신의 기반을 다졌다. 하지만 전공이 없는 홍수전의 형제 및 친척들의 왕 등극과 그들의 [[석달개]]에 대한 견제는 석달개의 이탈을 불러왔고 자연스럽게 홍수전은 다른 자를 불러와 석달개의 자리와 빈자리를 채워야 했다. 또한 전공 없는 자들이 왕에 오르니 각 방면군의 주장들은 반발했고 그들을 달랠 필요가 있으니 그리하여 임명된 왕들이 [[이수성(태평천국)|이수성]], [[진옥성]], [[이세현]], [[양보청]]이다. 이들은 거병 초기에 10대 중반의 나이로 참전해 온 짬밥이 있었고 군재도 상당한 자들이었다. 그런데 이런 왕들의 입장에서는 별 경력도 없는 홍씨 일가의 권력 영위는 가당치 않은 것이었고 자연스럽게 그들과 홍씨 일가의 대립도 심화됐다. 특히 인척 관계인 이수성, 이세현은 홍인간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홍인간의 개혁안이 성급하고 현실성이 없는 것 역시 반발을 불러왔다. 또 왕들 역시 상호 간의 대립이 심했다. [[이수성(태평천국)|이수성]], [[진옥성]], [[이세현]], [[양보청]]이 왕에 오른 후 태평천국은 왕의 작위를 뿌리기 시작했는데 막판에는 왕들의 수가 약 2700여 명에 달했다. 상당수의 왕들은 허울뿐이었으나 부장급이나 사령관 정도의 왕들은 어느 정도 권력이 있었고 작위가 비슷한 경우가 많아서 상호 간의 협조를 잘하지 않고 합의된 계획 등에 대해서도 절대적 가치는 두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이수성과 진옥성은 사이가 좋지 못했고 안경(安慶)이 훗날 점령될 때 이수성은 [[양보청]]과 [[진옥성]]의 지원군을 잘 돕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