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테살로니키 (문단 편집) == 문화유산 == [include(틀:그리스의 세계유산)] ||<-3><#000><:> '''[[유네스코|{{{#fff 유네스코}}}]] [[세계유산|{{{#fff 세계유산}}}]]''' || ||<-3><#fff>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width=160]] || ||<|3> 이름 || 한국어 || 테살로니카의 초기 기독교 및 비잔틴 기념물군 || || 영어 || Paleochristian and Byzantine Monuments of Thessalonika || || 프랑스어 || Monuments paléochrétiens et byzantins de Thessalonique || |||| 국가·위치 || [[그리스]] 중앙마케도니아 주, 테살로니키 현 || ||<-3> [include(틀:지도,장소=레프코스 피르고스, 너비=100%, 높이=224px)] || |||| 등재유형 || [[세계유산#s-3.1.1|문화유산]] || |||| 등재연도 || [[1988년]] || |||| 등재기준 || (i)[*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ii)[*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iv)[*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 |||| 지정번호 || [[http://whc.unesco.org/en/list/456|456]]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1px-White_Tower_of_Thessaloniki_%282007-06-15%29.jpg]] 테살로니키 항구를 위한 요새인 백탑. 12세기부터 요새가 있던 곳에 오스만 제국 때 다시 세운 것이다. [clearfix] 역사가 오랜 도시인만큼 유적도 많다. 고대 로마 유적으로는 포룸(Forum=[[아고라]]), 갈레리우스 개선문 등이 있다. 특히 테살로니키의 초기 기독교 및 동로마 양식 건축물군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들인데, 아야 소피아, 아요스 디미트리오스, 아야 에카테리니, 나오스 프로피티 일리아 등의 성당들과 테살로니키 성벽, 동로마 시대 목욕장 등이 있다. 한편 오스만 제국 시절의 건물로는 도시의 상징인 백탑(Λευκός Πύργος)이 유명하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amara.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Rotunda_Yard_Thessaloniki_15_view.jpg]] 갈레리우스 개선문. [[갈레리우스]] 황제가 [[사산 제국]]을 상대로 거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마찬가지로 테살로니키 내에 있는 로톤다(Ροτόντα)와 더불어 세웠다. 로톤다는 원래 갈레리우스의 무덤으로 쓰려고 지어졌으나 빈 공간으로 방치되었고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성당으로 개조되었다가, 오스만 제국 시기 모스크로 쓰였고 미나레트가 덧붙여졌다. 그 후 1912년 테살로니키 수복을 계기로 다시 성당으로 복구되었지만 미나레트는 철거하지 않은 채 오늘날로 이어지고 있다. 내부에는 동로마 시절의 모자이크가 일부 보존되어 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Holy_Wisdom_Salonica_1.jpg]] 이스탄불의 [[아야 소피아]]와 이름이 같은 아야 소피아. 원래 성당이 있던 자리에 8세기에 지어진 복제품이다. 4차 십자군에 의해서는 가톨릭 성당으로, 오스만 제국에 의해서는 [[모스크]]로 사용되었던 역사도 있다. [[파일:external/img.haberler.com/komsudan-ataturk-evi-nde-evlilik-teklifi-7591246_x_o.jpg]] [[튀르키예 공화국]] 초대 대통령이자 [[튀르키예 독립전쟁]]의 영웅인 [[아타튀르크]]의 생가. 주 테살로니키 튀르키예 영사관 바로 옆에 있으며 그리스 땅에 있는 튀르키예의 [[월경지#s-8|양외지]](讓外地)이다.[* 양외지는 그 나라의 정부가 다른 나라 부동산의 소유주로서 소유한 것이라서 영유권을 넘겨 받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양외지를 소유한 나라의 정부가 양외지의 영유권을 가진 나라에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 물론 양외지는 역사적인 이유로 다른 나라가 소유권을 행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그 나라 정부로부터 면세 등의 특혜를 받는 경우가 많다.] 1881년에 아타튀르크가 이 집에서 태어나서 자랐으며, 아타튀르크의 가족들은 1912년까지 이 집에서 거주하다가 테살로니키 함락 이후 추방되어 한동안 일반 가정집으로 사용되다가 튀르키예와 그리스가 우호협정을 맺은 1933년, 테살로니키 시에서 이 집앞에 "아타튀르크 생가"라는 팻말을 붙인 것을 계기로 테살로니키 시가 이 집을 구입해 1937년에 아타튀르크에게 선물했다. 아타튀르크는 다른 튀르키예인에 비해 어려서부터 서구 근대 문물과 접촉하고 교육을 받을 기회를 준 고향 셀라니크의 국제적인 분위기를 깊게 사랑했고, 여기가 그리스에게 넘어간 걸 큰 한으로 삼으며 졸지에 실향민이 된 이후에도 방문하고 싶어 했다. 정작 아타튀르크는 ~~오랜만에 고향 방문도 하고~~ 이 집에 정말로 가보고 싶어했지만 1938년 사망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53년에 튀르키예 정부가 아타튀르크의 여동생인 마크불레 아타단(Makbule Atadan, 1885-1956) - 그녀도 이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 의 자문을 받아 아타튀르크가 살던 시절의 모습으로 복원해 박물관으로 열었다. 현재 이 집은 튀르키예 의회 소유로 튀르키예 정부가 관할하고 있으며, 내부 직원들도 그리스인과 튀르키예인으로 되어있어 터키어도 잘 통한다. 테살로니키를 찾는 튀르키예인 관광객들은 거의 무조건 들른다. 아타튀르크 시절 그리스와 신생 튀르키예 공화국은 서로 치열한 전쟁도 많이 치루고, 현대까지 양국 간의 감정의 골이 되는 사건들이 많았지만 의외로 아타튀르크 본인과 그의 그리스 측 라이벌격이었던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총리는 서로 깊이 존경하는 사이였다. 양쪽 모두 혼란스러운 오스만 제국 말기에 태어나[* 베니젤로스는 [[크레타]] 섬의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으로 유년기 벌어진 1866년 반오스만 봉기의 실패 이후 그리스 본토로 망명을 갔다.] 자국의 후진성을 한탄하며 반동적인 자국 내 종교 세력과 크게 싸워야 했고, 근대 민족 국가의 건설이라는 이데올로기 아래 혁명가이자 정치인으로 경력을 펼쳤으니 국가 대 국가라는 입장을 벗어나 개인으로서는 충분히 동질감을 느낄만도 했다. 베니젤로스가 그리스 정계에서 몰락하는 30년대 쯤에는 아예 두 나라가 모두 인구 교환 등을 통해 형식적으로 분쟁 거리를 청산한 이후 상호 평화 조약을 맺으면서 두 나라 정가에 한동안 화해 무드가 감돌았으며, 1934년 베니젤로스는 노벨 평화상 후보로서 아타튀르크를 추천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둘 다 당장은 근대 민족 국가로서 그리스와 튀르키예의 성장을 지상과제로 두면서도 장기적으로는 그리스와 아나톨리아는 역사적으로 한 번도 분리된 적이 없는 운명 공동체로서 다시 하나의 나라 --오스만 제국?-- 로 통합 될 것이란 믿음을 공유하기도 했다.[* 이상의 내용은 그리스 출신 튀르키예학자이자 그리스-튀르키예 연합주의 사상가인 드미트리스 키치키스(Δημήτρης Κιτσίκης)의 칼럼에서 발췌해 온 것이다. 실제로 고대부터 보스포루스 해협은 동로마 제국 말기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사방을 오스만 세력에 둘러싼 월경지가 된 시절 같은 일시적인 정치적 혼란을 제외하면 한번도 정치적인 경계지였던 적이 없었다.] 역사적 배경이 이러하니 그리스와 튀르키예 간의 악감정은 별개로 아타튀르크 같은 경우 비록 적이지만 훌륭한 지도자였다고 인정하고 그와 관련된 유물을 보존할 만한 여건이 됐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