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통도사 (문단 편집) === [[고려시대]]~[[조선시대]]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통도사 국장생석표 문화재청.jpg|width=1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통도사 상천리국장생석표 문화재청.jpg|width=100%]]}}}|| || 통도사 국장생석표 || 상천리 국장생석표 || > 通度寺孫仍川國長生一㘴段寺 > 所報尙書戶部乙丑五月日牒前 > 判皃如改立令是於爲了𡬦以立 > 大安元年乙丑十二月日記 > > 통도사 솔래천에 있는 국장생 일좌는 절에서 보고한 바(에 따라), 상서호부가 을축년 5월일에 첩을 내려서 전의 판결대로 고쳐 세우라고 하였기에 세운다. > 대안 원년 을축년(1085) 12월일에 기록한다. >---- >통도사 국장생석표(보물 제 74호) >---- > ▨▨國長生一㘴叚寺 > 戶部乙丑五月日牒前 > 立▨是於爲了𡬦以立 > ▨▨乙丑十二月日記 >⋯국장생 1좌는 절에서 호부에⋯, 을축년 5월일에 첩을 ⋯, 전의 ⋯ 세우라고, 이에 세운다. ⋯을축년 12월일에 기록한다. >---- >상천리 국장생석표(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호) [[1085년]]([[선종(고려)|선종]] 2년)에는 통도사의 경내임을 나타낸 사지석표(四至石標), 즉 국장생석표(國長生石標)를 세울 만큼 사세가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통도사 삼층석탑 배례석 국립문화재연구소.jpg|width=100%]]}}}|| || 삼층석탑 앞에 있는 배례석 복제품[* 원본은 성보박물관에 있다.] || >太康十一年乙丑二月 日造」 >태강(太康) 11년 을축년(乙丑年 : 1085, 선종 2) 2월일에 만들었다. >---- >통도사배례석(通度寺拜禮石) 또한 똑같은 연도인 1085년에 통도사 배례석이 만들어졌다. 통도사 배례석은 극락전 앞에 설치되었다. 그리고 『[[삼국유사]]』에 의하면 [[1235년]]([[고종(고려)|고종]] 22년)에 상장군(上將軍) 김리생(金利生)과 시랑(侍郞) 유석(庾碩)이 고종의 명을 받아 낙동강 동쪽을 지휘하던 차에 절에 와서 계단의 석종을 들어내고 석함 속의 사리를 예경했다고 한다. 이때 돌함 속에 있는 유리통 하나가 금이 가서 유석이 마침 가지고 있던 수정통을 기부하여 거기에 사리를 보관했다고 하는데, 이 기록은 문헌상으로 볼 때 사리에 손을 댄 최초의 예로 보인다. 그 후, [[1264년]]에는 [[원나라]] 사신들과 여러 사람들이 와서 그 돌함에 예배드렸으며, 사방의 운수승(雲水僧)들이 몰려와서 예참했다 한다. 또한 원나라에 머물던 [[인도]]의 [[지공선사]](指空禪師)[* [[나옹(승려)|나옹화상]]·[[무학대사]]와 함께 당대의 3화상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고승]]이다.]는 [[1326년]] 통도사에 와서 금강계단을 참배하여, 가사와 사리를 친견한 공덕을 높이 평가했다. 아울러 지공선사는 고려에 들어올 때 『문수사리무생계경(文殊師利無生戒經)』을 가져왔다고 하는데, 이와 동일한 경전으로 생각되는 『문수사리최상승무생계경(文殊師利最上乘無生經)』목판본이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362년 8월 15일 속리사(俗離寺)에 행차하여, 통도사(通度寺)에 소장되어 있던 부처의 뼈(佛骨)와 사리(設利) 및 가사(袈裟)를 가져와 구경하였다. >---- >『고려사』 1362년에는 [[공민왕]]이 속리사에 행차하여 통도사 사리와 가사를 보았다. [[1377년]]([[우왕]] 3년)과 [[1379년]]([[우왕]] 5년) 두 차례에 걸쳐 [[왜구]]의 습격을 받았다. 당시의 통도사 주지였던 월송(月松) 대사는 1377년에 왜구들이 통도사에 와서 사리를 가져가려 하자 그것을 가지고 도망쳤다가 다시 1379년 왜적이 사리를 침탈하려고 했을 때 사리를 가지고 통도사를 빠져나와 [[개성]] [[송림사]], [[서울]] [[흥천사]], [[금강산]] 등지로 옮겨 다녔다고 한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도 왜구의 침탈은 여전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통도사는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며 불에 타 절이 한 차례 소실되었다. 또한 왜군이 통도사에서 석가모니의 진신치아[[사리(불교)|사리]]를 약탈했으나 [[사명대사]]가 되찾아서 [[건봉사]]에 봉안했다고 한다. 현재의 통도사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안 [[1603년]]([[선조(조선)|선조]] 36년)에 송운대사(松雲大師)가 재건하고 다시 [[1641년]]([[인조]] 19년) 우운(友雲)스님이 중건한 것이다. >통도사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참여한 인물들을 기록해놓은 《충렬록》이 있다. 스님이 말하기를, 매번 명절이 되면 누각 위에 여러 충렬들을 제사 지낸다고 한다. > >임진왜란 병자호란의 충현들은 백세의 풍범 / 壬丙諸賢百世風 >높은 그 이름 우뚝이 산사에 걸렸네 / 高名磊落揭琳宮 >산승들도 충절에 보답할 줄을 알아 / 山僧亦解酬忠節 >한 몸이라 사시에 똑같이 제사하네 / 一體四時祭祀同 >---- >『무명자집』 시고 제4책 무명자 윤기(尹愭, 1741~1826) 18세기 선비이다. 이러한 윤기가 통도사에서 남긴 기록은 위와 같다. 위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 조선 후기 통도사에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의 충렬들을 기리는 제사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