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통합민주당(1995년) (문단 편집) == 역사 ==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당시 [[경기도지사]] 후보 공천을 놓고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은 옛 [[민주정의당|민정계]] 출신의 [[이종찬(1936)|이종찬]][* [[민주정의당]] 국회의원을 거쳐 [[민주자유당]]에서도 활동했다. 그러나 1992년 [[김영삼]]이 당권과 대권을 모두 잡자 탈당해 [[새한국당]]을 결성했다가 뜬금없이 [[김대중]]의 편에 선 인물이다. 이후 김대중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국가정보원장]]을 지낸 바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전 의원의 사촌형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구한말 최고의 명문가이던 경주 이씨 백사공파 [[이회영]]의 직계손이기도 하다. [[이회영]], [[이시영(정치인)]]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 가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직후까지 무수히 많은 독립운동가, 군인, 외교관, 정치인들을 배출하였으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신들의 모든 것을 바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으로 꼽힌다.]을 추천했다. 그러나 공천권을 쥐고 있었던 [[이기택]] 대표는 [[장경우]] 전 의원[* 이 사람도 이종찬과 함께 새한국당을 결성한 민정계 출신.]을 고집하면서 양측간에 갈등이 생겼다. 결국 당내경선은 장경우가 이겼으나 정작 본 선거에서는 생각보다 큰 표차로 [[민주자유당]] [[이인제]]가 당선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때부터 이인제의 존재감이 커졌으며 불과 2년 뒤 [[김대중]]의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 당선에 절묘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얼마나 갈등이 심했냐 하면 김대중이 다른 지역 유세는 다 가면서도 정작 경기도 유세에는 다소 소극적이었을 정도이다. [[http://news.sportsseoul.com/read/ptoday/1024735.htm|#]] 지방선거 결과 광역자치단체는 여5:야10으로[* [[민주자유당]]이 부산/인천/경기/경남/경북, 민주당이 '''서울'''/광주/전남/전북, [[자유민주연합]]이 '''강원'''/대전/충남/충북, 무소속이 '''대구'''/제주를 차지했다.], 기초단체장, 지방의회 선거에서도 민자당을 제칠 만큼 성적이 좋았으나[* 특히 서울에서는 그야말로 압승을 거뒀는데, 구청장은 [[강남구]]와 [[서초구]]를 제외한 23개 구에서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었고 시의회는 총 133석 중 123석을 민주당이 가져갔다. 이는 원래 서울에 호남 출신 유권자가 꽤 있다는 점을 감안해도 상당히 큰 격차로, 그만큼 [[김영삼]] 정권에 대한 서울시민의 반감이 크다는 근거였다.] 김대중과 이기택의 갈등 심화로 인해 [[민주당(1991년)]]을 탈당한 [[김대중]]과 [[동교동계]]는 [[새정치국민회의]]로 독립하여 나갔다. ~~[[민주당(1990년)|꼬마민주당]] 시즌2~~ 국민회의에 따라가지 않고 민주당에 잔류한 인사들은 시민운동 계열을 끌어들여 "통합민주당"을 창당한다.[* 하지만 민주당의 정통 계통은 자신들에게 있다며 언론에게 통합이라는 말을 빼고 그냥 '민주당'으로 불러달라고 했다.] 초기에는 민주화 시대의 명사나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등의 [[시민단체]]가 [[개혁신당(1995년)|개혁신당]]을 창당하고 합당, 대거 합류하면서 개혁적인 정당으로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이는 국민회의가 대선 승리를 위해 보수온건화 노선을 탔기 때문이다.] 개별 정치인들의 대중적인 인지도는 높은 편이었으나 [[3김]] 중심의 정치적 상황에서 제4당이 살 길은 별로 없었다.[* 튼튼한 지역기반을 통해 전국적인 인지도를 확보할 수 있었던 타 정당에 비해 통합민주당은 지역기반이 없다시피했으며[* 정확히는 [[부울경]]을 지역기반으로 삼으려고 했으나 원체 이 지역에서 YS의 영향력이 셌던 탓에 별 재미를 못 봤다.]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이기택]]의 중량감 역시 3김에 비교하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15석(지역구 9석 + 전국구 6석) 확보에 그치면서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하며 당세가 약해졌다. [[서울특별시]] 지역에서는 [[강동구 갑]]의 [[이부영]]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물들이 낙선했고, [[부산광역시]]에서는 이기택 대표를 포함하여 전원이 낙선했다. 게다가 [[신한국당]]이 과반수 확보를 위해 [[황규선]](이천시), [[이규택]](여주군), [[최욱철]](강릉시 을) 등의 당선자 빼가기에 나서면서 폭망 확정. 물론 되돌아보면 성과도 없지는 않았다. 당시 '''[[경상남도]]''' [[울산광역시|울산시]]에서만 5개 지역구 가운데 2개 지역구 당선, 1개 지역구 선전을 하는 성과를 올렸다. --[[민주노동당]] 조상 기믹?--[* 참고로 5개 지역구 가운데 하나는 정몽준의 지역구([[동구(울산)|동구]], 민주당 비출마 지역)였으니 결국 4개 가운데 2곳이 성공한 셈이다. [[울주군(선거구)|울주군]](당시는 울산시 울주구)에서는 과반 득표(53.8%)를 기록했으며, 낙선한 지역구에서도 26.7%([[남구 갑(울산)|남구 갑]]), 35.7%([[중구(울산 선거구)|중구]], [[신한국당]] 당선자와 2.5% 격차)의 혁혁한 득표를 올렸다. (구) [[창원시]] 갑/을에서도 15%를 넘기는 득표율을 올렸다.] 또 경북 [[안동시]] 갑에서 첫 도전한 [[권오을]](경상북도의원 출신) 후보가 '''3287표(6.61%P)차'''로 신한국당 [[김길홍]] 의원을 제치고 깜짝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일단 당시의 대구경북 지역에 '''반YS 정서'''가 팽배했던 데다 안동 지역 자체가 [[안동 권씨]] 문중의 영향력이 정치적으로 센 지역인지라 민주당 간판으로 출마했음에도 권오을이 당선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승리에도 의석이 30석에서 반토막이 난 것은 변호하기 어려웠다. 서울에서 민주당은 거의 전 지역 3위의 성적을 거두었으며, 선전할 경우 국민회의 후보가 낙선하는 결과만을 낳았다.[* 예외적으로 서울 [[강서구 갑]]의 [[박계동]] 의원이 불과 1년전인 1995년에 국회 본회의장에서 [[전두환]], [[노태우]] 비자금 사건을 폭로하면서 인지도가 상승한 덕분에 당시 당선자였던 군 법조인 출신 [[새정치국민회의]] [[신기남]] 후보와 '''3,318표차(3.7%p차)''' 초접전을 벌였고(사실 상대였던 신기남도 정계입문 전에 같은 법조인인 [[오세훈]] 처럼 지상파 법률프로그램 진행자로 활동한 적이 있어, 나름 인지도가 만만치 않았다.), 경기 [[부천시 정|부천시 오정구]]에서는 부천의 맹주이자 터줏대감인 [[원혜영]]과 당선자였던 [[새정치국민회의]] [[최선영(정치인)|최선영]] 후보와 무려 '''390표(0.6%p차)'''차이로 엎치락뒤치락 끝에 당락이 결정되었고, 또 서울 [[성북구 갑]]에서도 [[이철]] 의원이 오히려 2위를 거뒀고, 당선된 [[새정치국민회의]] [[유재건]]과의 격차는 불과 '''4,604표차(4.2%P차)'''였을 정도로 만만치 않았다.] 다양한 출신성분을 지닌 사람을 대거 공천하였는데, 노무현은 [[종로구(선거구)|종로구]]에, [[도봉구 을]]의 [[유인태]], [[성북구 갑]]에 출마한 [[이철]], [[노원구 을]]에는 [[이문옥 감사관 구속 사건]]의 주인공인 [[이문옥]]이, [[강동구 갑]]의 [[이부영]]이 출마했다. [[박정희]] 시절 보안사령관 출신으로 나중에 민주당 시절 전국구 의원을 지냈던 [[강창성]] 전 의원은 [[용산구(선거구)|용산구]]에 출마했으며, [[강남구 갑]]에 출마한 [[홍성우(1938)|홍성우]] 변호사[* 배우 출신인 [[홍성우(1941)|홍성우]] 전 국회의원과 동명이인인 인권[[변호사]]이다. 한자 표기는 洪性宇로 같다.] 등도 인기를 끌었다. [[양천구 갑]]에 출마한 경실련의 [[서경석(목사)|서경석]] 목사도 대표적 인물이다. [[이회창]] 前 총리와 [[장태완]] 前 수경사령관도 영입 대상이었으나, 장태완과 이회창은 모두 거절했다.[* 특히 이회창은 [[신한국당]]으로 들어가서 선대위원장과 전국구 1번을 받고 금뱃지를 달았다.][* 장태완 역시 이후 2000년 [[새천년민주당]]에 들어가서 16대 전국구 국회의원이 된다.] 이렇게 스펙트럼이 다양한 인물들을 15대 총선 때 민주당 약세 지역에 각각 공천하여 의외의 득표율을 올렸다.[* 여담으로 강창성의 경우 보수적인 군 출신이라는 영향이 있었는지, 최고 득표율을 올린 곳은 당시 보수 강세지역인 [[동부이촌동]]과 군인 밀집지역인 [[서빙고동]]이었으며 홍성우는 부촌인 신사동과 [[압구정동]]에서, 서경석 역시 다른 지역보다 [[목동아파트]] 지역에서 가장 높은 득표율을 올렸다.] 당시 보수 강세지역에서 민주당계 정당치고는 매우 선전했던 셈이었으나, 결과적으로 국민회의와 야권 표가 분열되어 모두 신한국당 후보가 당선된다(...).[* 특히 종로구에서 이종찬과 노무현이 표를 나눠먹어서 이명박이 당선된다거나 하던 상황이 대표적.] 결국 확고한 지지기반을 가진 거대정당에만 유리한 [[소선거구제]]에 직격탄을 맞아서 침몰한 것이다. 더구나 이때는 정당명부 비례대표도 없이, 지역구투표를 가지고 전국구를 배분하던 시절. 만일 현재 채택되고 있는 [[연동형 비례대표제]](일명 독일식) 혹은 권역별 비례대표제 하다못해 일본식 [[중대선거구제]]만 되었어도 민주당은 최소 30석 이상을 획득해서 교섭단체 구성은 물론, 대선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국내에서 선거제도가 민의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오게 된 계기로 이때부터 언론과 정치학계에서 선거제도 개편의 필요성을 제기하기 시작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