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투르코폴레스 (문단 편집) == [[십자군 전쟁]]중의 활약 == >[[아모리]] 왕이 이집트를 원정하러 떠난 1164년경, [[장기 왕조|누레딘]]은 안티오크의 템플 기사단 성채를 공성했다. 60여명의 [[템플러]]들과 그보다 많은 평민 하사관들과 '''투르코폴레스'''들은 요새를 사수했다. (중략) 이들은 2년동안 포위 공격을 견뎌내다 결국 전멸했다. 서유럽의 기록에서 최초로 투르코폴레스가 등장하는 장면은 바로 [[1차 십자군]]의 [[니케아 공방전]]과 [[도릴라이움 전투]]였다. 두 전투에서 동방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십자군을 지원하기 위해 2,000여명의 트라키아인 [[펠타스트]]와 메가스 프리미케리오스 [[타티키오스]]를 파견했는데, 이 타티키오스가 바로 투르코폴레스였다. 그는 알렉시우스의 아버지가 잡아온 튀르크인 노예 중에 한 명이었지만, 모태 신앙이 [[동방 정교회]]였기 때문에 노예보다는 알렉시오스의 가신으로써 자라난 케이스였다. 그는 이미 [[룸 술탄국]]과의 싸움에서 제국군을 이끌고 괜찮은 전적을 낸 경험이 있었고, 아나톨리아의 지리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십자군의 길잡이 노릇을 했다. 뿐만 아니라, 제국 소아시아령 각지에서 궁기병으로 복무하는 투르코폴레스 분견대가 분쟁지대를 순시하며 이탈한 십자군이나, 1100년대 초까지 당도한 후발 십자군 병력을 호송해주기도 했다. 물론 그들과 십자군의 관계는 동방 제국과 라틴인들의 알력으로 인해 썩 좋지 못했지만, 십자군 지도자들은 투르코폴레스의 유연한 기동과 기마 궁술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예루살렘 왕국]]과 여러 십자군 공국들이 세워지기 시작할 무렵, 이들은 동로마 제국을 따라 튀르크 출신 용병들을 구매하기 시작했는데, 병력 보급 상황이 로마인들의 제국보다 훨씬 열악했던 이들은 그냥 튀르크인 주변에 살기만 하면 전부 투르코폴레스라고 부르며 징집, 고용하기 시작했고, 결국 튀르크인들과는 사이도 안좋은 [[시리아 정교회]] 출신 궁수, 아랍계 보병, 우트르메르에 거주하는 중동계 용병을 다 싸잡아 투르코폴레스라고 불러버리게 되었다. 이들은 십자군 기사들에게 부재한 기마 궁술, 추격 도주 전술 등을 보충해주었으며, 당연하게도 [[랜스]]와 [[메이스]]를 들고 기병 돌격의 제2선[* 용병이 고용주보다 뒤에 선다는게 놀라울수도 있겠지만, 십자군 기사들보다는 경갑을 두른 만큼, 충격력 극대화를 위해선 2선에 서는 것이 당연했다.]에 서는 등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놀랍게도 신앙심이 돈독한 [[기사 수도회]]들도 투르코폴레스를 상비하고 다녔다. 이들은 기사단 내에서 평민 기사 하사관들보다 바로 밑 계급에 속했으며, 수직적인 기사단의 위계를 따를 것을 강요받았다. 이를 테면 라틴 기사들과 겸상을 할 수 없었고, 종자들처럼 기사단원들의 시중을 들어야 하는 등이었다. 그러나 식량과 무기 보급 외에 봉급을 받지 않는 기사단의 단원들과 다르게 이들은 꽤 큰 보수를 받으며 활동했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아무 검증도 받지 않은 용병단이었기에, 투르코폴레스가 주인을 통수 치는 경우도 자주 발생했다. [[트리폴리 백국]]의 기초를 놓은 레몽 2세도 1101년경 후발 십자군과 함께 로마-튀르크 국경을 건너다 현지 투르코폴레스들에게 배신을 당해 큰 피해를 입기도 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