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트라야누스 (문단 편집) === 트라야누스 치세의 한계 및 문제점 === 트라야누스는 최고의 로마 황제를 꼽으라하면 꼭 언급되는 황제일 정도로 훌륭한 황제이다. 하지만 당연히 트라야누스도 인간인만큼 결점이 없는 것은 아니며, 트라야누스에 대한 평가는 1940년대 이후 고고학이 발전하고, 비문 해석이 20세기 이후 옛 로마 영내에서 발굴되면서 안 좋은 부분이 부각돼 재평가 중이다. 이는 전통적 관점을 유지 중인 서양학자들도 비슷한 의견인데, 트라야누스가 벌인 대외전쟁 중 다키아 전쟁이라면 몰라도 파르티아 전쟁은 그다지 후속 결과가 좋지 못했고, 그의 정복전쟁들은 대규모 국가 프로젝트임에도 투입 대비 효과는 전쟁 특수를 통한 국가 재정 확보 외에는 장기적으로 엄청난 도움까진 주지 못했다고 평가받는다. 동시대 소(小) 플리니우스의 평과 달리 트라야누스는 외정에선 성공적일지 몰라도 국정 운영방식이나 속주 행정 정책 결정 등이 평균 이상일 뿐 역대 로마 황제 중 가장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트라야누스는 여타 선대 황제들과 달리 속주의 상류층과 민간징세청부업자들이 중앙정부의 수세에 협조하는 과정에서 부수입을 끌어 올려 그 재원을 확보해 원로원과 황제가 이를 바탕으로 시혜를 베풀고 함께 이득을 얻는 형태를 사용했다. 그런데 이런 방식의 문제점은 온전히 후임 황제들이 뒤집어 쓰는 꼴이 됐다고 평가받을 만큼 로마 입장에선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의 체제 개편 역량이나 장래 야만족 문제가 제국 전체의 방어선에 큰 부담을 주게 될 것이란 선견지명도 후임 하드리아누스만 못했고, 제국 관리 능력은 오현제 중 가장 떨어지는 황제 중 한명으로 늘 거론된다.[* 하드리아누스가 군사, 국경 정책에서 큰 업적을 남긴 건 사실이나 모든 걸 혼자 한 것은 아니었다. 카타프락토이의 도입은 다키아 전쟁의 후속조치 중 하나였으며(파르티아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다키아 전쟁 때 다키아 편에 참가했던 사르마티아인들의 중장기병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하드리아누스 성벽같은 경우, 이미 트라야누스가 그 근처에 나무 방벽을 세운 흔적이 있다.][* 물론 하드리아누스는 확실히 성격적인 문제가 있었던 데다 자기 절제 능력이 트라야누스만 못했으나,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고 웬만하면 전후임 중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모든 지표에서 앞서는 건 불가능하다.--하지만 [[네로|누구]]와 [[콤모두스|누구]] 후임자는 다르다--] 간단히 말하면, 트라야누스의 치세는 '''도금된 영광'''이라는 성격이 강했다라는 것이다. 로마 제국의 속주 행정 및 세수 확보는 프린키파투스 시대[* 아우구스투스 ~ 디오클레티아누스 이전]까지 황제와 속주 총독/황제와 속주 내 유력자 간의 상호소통과 서한 교환에 기반한 방식을 사용하면서, 파견된 세금징수원과 세금징수대행업자들의 협조를 통해 집행됐다. 따라서 황제가 "정부의 조세징수액이 높아지면 그러한 공조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힘들어지는 한계"를 방치하면, 지방세수 체제에 기반한 로마 재정은 속주재정에 더 의존하는 악순환에 빠지는 위험성이 높아졌다. 또 로마 제국의 재정 정책들은 평화시 제국의 수입과 지출이 그럭저럭 꾸려져도, 트라야누스처럼 황제가 계속된 정복전쟁을 치루고 기부금을 시혜하면 내란이나 기타 비상 사태에 대처할 자금을 비축할 여력이 없는 한계가 있었다. 물론 이런 의견에 관해, 트라야누스를 옹호하는 학자들은 "트라야누스가 은광과 금광 생산량이 [[네로]] 시대에 이르러 감소한 단점을 보완코자 다키아를 정복한 게 아니냐", "동방 무역 적자를 해결코자 파르티아와 전쟁 후 무역망을 확보하려는 목적도 있어 전쟁을 강행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고고학 발달과 여타 전문 사회과학 학문 도입에 따른 로마사 연구 발전 동향에서, 현대 학자들은 이런 목적을 백번 양보하더라도 언 발에 오줌누기 같은 일시적 해결책이었다고 단언한다. 당장 그가 벌인 파르티아 전쟁 속에서 군자금 문제 등으로 트라야누스 본인이 주화 대량 발행을 위해, 은 순도를 18% 줄이게 하여 벌충한 조치만 해도, 그가 군사적 업적 외적으로는 깊게 전쟁 이후 조치에는 상당히 꼼꼼하지 못하며, 고평가 속에서 제시된 경제적 이유로 파르티아를 침공했다는 논리 역시 일부 맞다고 한들 맞춰 끼우기로 실패한 전쟁조차 포장됐다는 평을 듣고 있다.[* 당연한 주장인데, 이 근거들은 트라야누스의 이런 실정을 조기에 해결한 하드리아누스, 장기적 관점에서 대비한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내치 능력과 판단력이 뛰어난 증거로 거론되고 있다.] 트라야누스의 치세가 시작될 당시, 로마 제국은 1세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아우구스투스]]~[[클라우디우스 1세]] 시대까지 취한 서유럽과 이탈리아 일대 경제력 향상 및 황무지 개발, 가이우스[* 별칭: 칼리굴라] ~ 클라우디우스 시대의 연이은 이탈리아 및 로마 일대의 항구 개발과 농경지 확보, 도시 공업 발전 등에 힘입어 경제적 취약성을 극복하는 듯 했다. [[칼리굴라|가이우스]]의 남이탈리아 항구 개발, 개보수 계획 및 시행과 중부 이탈리아 일대의 농경지 개발 및 확대 전략은, 후대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돈은 돈대로 쓰고 얻은게 뭐냐"고 비난받았다고 하나 이는 이 시대를 연구한 학자들이나 동시대 필로, 대 플리니우스, 요세푸스의 기록처럼 그냥 까기 위한 뻘소리에 불과하다고 일찌감치 결론이 났다. 요세푸스로 대표되는 동시대 인들에 따르면, 도리어 막대한 예산을 일시에 사용해 공공인프라 건설에 쏟은 탓에 우려는 컸지만 도리어 이탈리아와 서방속주들의 기아 문제를 일시에 해결시켜줬다고 한다. 삼촌 필로의 영향으로 칼리굴라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마냥 좋아하지 않은 요세푸스 역시 칼리굴라의 본국 이탈리아 및 서방속주 경제발전 정책과 발 빠른 대처에 대해 아주 현명했다고 평하고 있다. 이는 원수정 초기와 팍스로마나 시대를 연구한 학자들의 평가도 비슷하다. 그들 역시 수에토니우스나 세네카의 주장에 대해, "그 논리라면 갈리아, 이탈리아, 로마가 고사하는데, 손을 놓고 있으라는 거냐? 세네카와 수에토니우스 논리는 로마 제국 서방 전체를 고사시키라는 것이다"며, 이를 뻘소리 중 뻘소리로 취급한다. (요세푸스의 증언처럼) 이때 시행한 이탈리아 항구 및 농경지 개발은 도리어 로마와 이탈리아 곡물 수급 문제를 해결케하고 이탈리아 내 곡물자급력을 끌어올렸고,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황제들의 기근 마차 전략 등은 비용 대비 효과가 대단히 휼륭했다. 따라서 21세기 들어 대대적인 칼리굴라의 이탈리아 경제발전 정책들은 로마 제국의 경제적 취약성 극복 노력과 황제 개인의 행정적 역량 모두에서 좋은 평가받고 있다. 이는 플라비우스 왕조 아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플라비우스 왕조의 세 황제 아래에서 제국의 서방 경제와 속주 징세 조치는 고도화된 행정 시스템과 제국 수요에 맞게 진화했다. 네 황제의 해라는 내란을 수습한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부자는 네로 치하에서 무너진 속주세 논란 문제를 해결하고, 부족해진 군입영자 문제를 해결했다. 이때 베스파시아누스는 원로원을 개편하면서, 네로 치하에서 방치된 방만한 속주 경영 문제부터 손봤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쌓아 놓은 행정, 군사 역량을 바탕으로 속주 경영 재정비, 라틴 시민권 확대, 로마시민권 확대 조치 및 군단기지 주변 경제 활성화 명령을 내리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이 결과, (동방에 비해) 낙후되고, 지역유지들의 목소리가 강한 히스파니아, 갈리아, 서부 게르마니아 그리고 일리리아와 달마티아 일대의 세수는 늘어났고, 이들 지역의 성장은 아우구스투스가 청사진을 그리고,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 아래에서 본궤도에 오른 본국 이탈리아와 로마 도시 경제가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이탈리아 민생경제 성장 조치이상으로 성장하는데 큰 힘이 됐다. 이탈리아 도시 경제의 성장기반은 칼리굴라의 루그두눔 개발과 갈리아~이탈리아까지의 무역망 확대 조치가 그 바탕이 됐기 때문에, 이는 클라우디우스 시대처럼 제국 서부와 본국 경제가 끊임없이 발전하고 그 규모를 유지하는데 큰 힘이 됐다. 티투스 시대는 짧았지만, 도미티아누스 시대의 비약적인 발전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엄격함과 황제 휘하 관료집단의 전문 행정 실무 처리능력으로 그 효율성이 증대됐다. 하지만 플라비우스 왕조 아래에서 확보한 세수 및 관리 노력과 결과에도, 로마제국의 국가 재정은 여전히 속주 경제[* 특히 지중해 동부]와 속주민들에게서 징수한 속주세에 의존하고 있었다. 즉, 베스파시아누스와 도미티아누스의 노력에도 제국의 국가 재정은 한계가 명확했고, 이마저도 그 정점에 이르러 돌파구가 필요했다. 더욱이 황제와 제국 관료들의 노력에도 드넓은 제국의 크기와 유지비는 갈수록 고도화되는 제국 행정 시스템과 방위비 문제의 고민을 안겼다. 도미티아누스 시대 후반부터 중앙정부의 노력에도 국가 재정이 속주경제에 의존하는 경향을 벗어나지 못해, 경고등이 켜지는 상황이었다. 황제와 원로원의 대립, 원로원 안에서의 여러 변화도 문제로 떠올랐다. 원로원 안에서는 기존 주류인 이탈리아 귀족들의 대항마를 넘어 그들을 경제력과 수준 높은 문화력으로 위협하는 지중해 동부와 푸닉 출신 신참자들이 출현했고, 도미티아누스의 노골적인 전제권력 시도는 황제의 그리스, 푸닉 출신 선호로 인해 지중해 동부 일대에 더 의존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는 도미티아누스와 지중해 동부, 아프리카 북부 출신 엘리트들이 의도한 결과는 아니었으나, 이런 경향은 트라야누스가 원로원 의원, 장군, 황제로 있던 시절에 이미 표면화됐다. 따라서 트라야누스 집권 당시, 황제의 국정 파트너인 원로원은 나날이 위상이 하락하고, 인재풀로서의 기능 역시 기사계급이나 전문 관료, 직업군인들에 비해 질적 하락이 진행 중이었다. 그래서 트라야누스에게는 도미티아누스 말기의 외정 실수 외에도 내정 문제 해결이라는 숙제도 놓여 있었다. 로마 황제들은 후임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예처럼 이런 취약성 극복을 위해 트라야누스와 같은 원로원 배려보다는 적극적 명령과 속주 경제 의존성 완화를 위한 법 정비 등 다른 방법을 시행했다. 그런데 트라야누스는 전임 도미티아누스나 후임 황제들과 달리 연이은 정복전쟁을 통한 전쟁 특수 및 세수 확보에 집중했다. 이는 그가 천상군인이며 이 당시 도미티아누스 시대의 외정 실패를 해결해야 하는 급박한 상황의 영향이 컸다. 허나 트라야누스 시대의 진짜 그늘은 그가 내정을 하는 과정에서, 과거 공화정기의 폼페이우스 식의 일처리로 속주경영을 통치했다는 부분이다. 즉, 트라야누스 시대의 속주 경영, 세수확보는 1세기 전의 아우구스투스 시대와 그 후계자들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반세기 전의 플라비우스 왕조 시대보다 뒤떨어진 (좋게 말하면 전통적인) 방법이었다. 헌데 이런 트라야누스의 현상유지적 속주경영 및 원로원을 배려한 속주세 징수 방식은 공교롭게도, 트라야누스 본인과 당시 원로원 입장에선 너무 이상적이고 완벽한 방법이었다. 원로원 의원들 입장에선, 본인들이 속주 총독으로 파견되었을 때 과거 폼페이우스 시대처럼 총독의 역량에 따라 떨어지는 부수입도 많고 징세의 폭도 불법만 저지르지 않고 편법적으로 운영하면 합리적인 운영으로 포장되니 아쉬운 소리를 할 이유가 없었다. 황제 역시 다키아 전쟁, 파르티아 전쟁으로 많은 자금이 필요한 상황에서, 국정 동반자로 내정을 커버해주는 원로원이 좋아한다면 굳이 시간을 쪼개 세심하게 제국 내정을 관리할 이유가 없었다. 쉽게 말하면, 트라야누스 시대의 진짜 그늘은 당대 황제와 원로원 입장만 생각한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고, 이는 그대로 후임 황제들에게 오롯이 짐이 됐다. 따라서 매우 아쉬운 방법이 많았는데, 트라야누스는 원로원 배려와 속주행정을 전례에 따른 합리적 운영, 현상유지를 취했을 뿐 다른 후임 황제들과 달리 미래까지 내다 본 결정은 생각보다 많이 없었다. 물론, 트라야누스가 다키아를 정복해 풍부한 금광, 은광을 얻고 다키아 포로들을 노예로 만든 부분은, 제국 경제의 기반인 대농장 경영과 국가의 금화, 은화 가치 유지에 도움이 됐다. 그렇지만 트라야누스는 두 후임자[*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달리 정복전쟁을 통한 전쟁특수와 전리품 확보를 통한 국가재정 운영 방식을 사용하면서도, 그는 국가 재정 운영을 영리하게 꾸리지 않았다. 이는 현대 학자들이 일관되게 지적하는 문제인데, 트라야누스의 내정 방향은 제국의 국고를 파산 위기에 몰릴 위험성에 노출케 했다. 대대적으로 벌인 각종 기념비, 공공건물 건축과 구호금 지급, 원로원에 대한 막대한 시혜는 연체 세금 말소, 세금 감면 등이 함께 제공되면서 로마 제국 관료나 군대 실무행정가들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남겼다. 이는 갈수록 관료제 유지, 병사들 임금 등 기본적인 제국 운영비가 증가하는 현실에서 장기적으로 내란, 군사 비상사태, 재해시 비상 자원 확보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다는 이야기였다.[* 이를 증명하듯,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즉위 직후부터 자신과 두 아들의 외부 일정을 최소화하면서 고정지출을 줄이고, 트라야누스나 하드리아누스 같은 막대한 자금을 통한 공공건물 건립을 최소화했다. 그래서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두 아들이 즉위할 당시 국고에 막대한 잉여금을 남겨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잉여금은 아끼고 아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조차 국가 위기 상황에서 사용할 돈도 모자를 정도로 부족했다. 그래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 형제는 이탈리아가 침공받자, 궁전의 보석, 보물, 골동품 등 돈이 될 만한 금은보화를 죄다 경매로 팔아치워야만 했고, 이 비용도 모자라 국가예산까지 쪼개며 원로원에 도움을 요청해야만 했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젊은 시절 하드리아누스로 대표되는 제국 수뇌부 중 일부는 이런 상황을 알고 있어, 이를 크게 걱정했다. 오촌조카로 10살때부터 당숙 밑에서 양자로 자란 하드리아누스는 자신이 트라야누스와 그 측근들에게 찍히는 상황에서도, 국가 재정 건전성과 투입 대비 산출의 비효율을 근거로 파르티아 전쟁을 반대하거나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간곡히 진언한 것이 고대기록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즉, 트라야누스의 정책들은 원로원과 로마 거주민 중 대다수에게는 인기를 받았을 지라도, 그렇지 않아도 2000km가 넘는 서방 방어선과 그 못지 않은 다른 방어선 관리로 한정된 예산으로 국가를 꾸려야 할 후임들에게 또 다른 짐을 안긴 악영향이 의외로 꽤 많았다. 따라서 트라야누스 시대 이후 도리어 정복전쟁을 통한 단기적 특수 외에는 분명 제국의 경제적 취약성이 방치되는 악영향이 됐고, 이는 안토니누스 피우스 시대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 나아가 [[세베루스 왕조]] 연구 과정에서 황제와 속주총독, 관료들의 정책 및 서한, 비문 등으로 확인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