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트라야누스 (문단 편집) === 즉위 전까지의 경력과 삶 === 트라야누스 황제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여러 학자들에 따르면, 트라야누스는 부모, 누나와 함께 고향 이탈리카를 떠나 일찍이 이탈리아로 건너갔으며, 아버지를 따라 자연스럽게 원로원 의원의 아들들처럼 군복무를 하면서 중앙 정계에 발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트라야누스가 몇 살 때부터 군 복무를 했는지는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버지가 군사령관이었고, 대파르티아 전선의 긴장도가 높은 시리아 등지에서 복무한 것에 미루어 보아 트라야누스도 어렸을 때부터 군 생활에 익숙했을 확률은 높다. 그리고 참모진으로서 그가 시리아에 근무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만큼 적어도 10년 이상의 군 복무를 했던 것으로 보이며, 꽤 많은 곳을 돌아다니면서 제국의 다양한 환경 속에서 로마군 장교로 실력을 쌓았다. 이때 트라야누스는 종종 로마 또는 히스파니아를 오가며 생활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연구자들에 따르면 이는 간접적인 여러 증거상 확실해보인다고 한다. 서기 [[86년]], 트라야누스는 외사촌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아페르의 유언과 부탁에 따라, [[푸블리우스 아킬리우스 아티아누스]]와 함께 오촌조카뻘이 되는 [[하드리아누스]] 남매의 공동보호자가 됐다. 이후 그는 서기 89년 히스파니아에서 제7군단 사령관을 맡았다. 이 해에 [[라인 강]] 연안에서 상(上) 게르마니아 속주 총독이 당시 황제였던 [[도미티아누스]]에게 반란을 일으켰는데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트라야누스에게 진압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트라야누스가 군대를 이끌고 라인 강 연안에 도착했을 때 이미 상황은 종료된 후였고, 트라야누스는 다시 로마로 돌아가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경호를 맡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트라야누스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고, 공석이 되어버린 상(上) 게르마니아 속주 총독에 그를 임명했다. [[도미티아누스]]는 트라야누스를 무척 총애했다. 그래서 황제는 트라야누스를 85년 법무관, 91년 집정관에 연이어 오르도록 후원했다. 특히 서기 91년, 트라야누스의 생애 첫 집정관 경험은 이 당시 나이가 30대 후반임을 감안하면, 그가 얼마나 도미티아누스의 총애를 받았는지 단번에 알려준다. 그러나 서기 [[96년]]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팔라티누스 황궁 안에서 암살당했고, 원로원의 추대를 받아 제위에 오른 [[네르바]]는 군대 내의 거부감을 사게 되었다. 이는 인기가 좋았던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사후 처리를 [[네르바]]가 등한시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네르바]]의 일천한 군대 경력 때문이기도 했다. 결국 [[프라이토리아니|근위대]]가 사실상의 쿠데타를 일으켜 네르바를 협박해 도미티아누스를 암살한 실행범들인 궁정 관리들을 끌어내 참살했다. 추가적인 쿠데타를 우려한 [[네르바]]는 다음해인 서기 97년 군대 내의 신망이 높았던 트라야누스를 차기 황제로 지명했다.[* 농담으로 네르바가 오현제에 포함된 이유는 그저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골랐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트라야누스의 후계자 지명 자체가 근위대가 결정하고 실권을 뺏긴 네르바는 추인만 해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트라야누스는 서기 98년 초 [[네르바]]가 사망하자 제위에 오르게 되었다. 최초의 속주 출신 황제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