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특수부대 (문단 편집) === [[세계대전]] 이전 === [[산업혁명]]으로 인한 근대화 이전 옛날 국가들에도 특수작전은 존재했다. 가령 [[조선]]에도 특수부대와 비슷한 병종이 있었다. [[세종(조선)|세종]] 15년경부터 운용한 [[체탐인]]이라고 해서 [[여진족]]의 동태를 미리 살피고 그들을 추적하는 기관이 있었는데, 그들은 특수부대인 만큼 보수, 가족에 대한 지원이 빵빵했다고 한다. 그러나 체탐인은 [[성종(조선)|성종]] 때 해체되었고, 이후부터 국경 백성들은 주야장천 여진족에 수탈당하게 된다. 북쪽 백성은 추수기가 되면 여진족 걱정을 먼저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 [[유발 하라리]]의 <대담한 작전>에서는 중세 유럽 기사도 시대의 특수작전을 다루면서 현대와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 주된 공격 타깃은 [[성(건축)|성]]이었다. 성은 군사적으로 중요하고 강력하지만 특수작전엔 매우 취약했다. * 기반 시설을 파괴하기만 하고 바로 후퇴하는 작전은 거의 없었다. 일단 고화력 [[폭탄]]이 없었으므로 파괴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에 빠르게 파괴하려면 그 시설이 [[나무]]나 짚처럼 가연성 재료로 되어있어서 화공을 할 수 있는 경우뿐이었다. 알레포 [[시장(경제)|시장]] 방화와 같은 예외는 있다. * 경제적 타격을 입히려는 특수작전 역시 드물었다. 농업은 넓은 지역에 분포해있으며 정교한 장비와 기반시설을 필요로 하지 않아 특수작전이 효력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군수 보급 역시 전국에 흩어진 소규모 공방에서 나누어 공급했으므로 어느 한 곳의 생산 시설을 부수는 것이 의미를 지니기 어려웠다. 예외적으로 오리올의 방앗간과 같은 시설이 특수작전의 목표가 된 적이 있다.[* 당시 전쟁에서는 밀을 가지고 와서 전장에서 직접 빻아 먹을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방앗간을 부수면 적의 식량 수급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었다.] * 중세 이후 등장한 화약고는 매우 쉽게 파괴할 수 있어 매력적인 목표이지만 의외로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 특정인 암살은 현대보다도 더욱 효과적이었다. 많은 군대들이 1인에 대한 충성심에 의하여 집결해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암살과 납치가 빈번해지면 해당 문화권의 정치 질서가 혼란해지면서 문화권 전체의 안정성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인지[* 중세 중동과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 안정적인 왕조를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이 이러한 암살 위주의 문화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여담으로 중세 레반트 지역은 니자리파의 암살이 너무나 잦았던 나머지 오늘날에 '암살자'를 뜻하는 '[[어쌔신]]'이라는 말도 이들을 가리키는 말에서 유래했을 정도이다.] 지도자 암살은 도덕적으로 터부시되었다. 이러한 시선은 1인 암살이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게 된 것과 맞물려 현대에까지 유효한 감이 있다. * 과학자나 기술자는 그다지 매력적인 목표가 되지 못했다. 특정 기술이 전황을 크게 바꾸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중세 국가는 민간인을 보호하려는 생각이 별로 없었으므로 민간인 납치도 큰 효과가 없었다. 민간인 납치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거의 노예와 돈 때문이었다. * [[성물]]을 훔치기 위한 특수작전이 종종 이루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