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티베리우스 (문단 편집) == 성격 == [[파일:external/farm9.staticflickr.com/7640825414_5744025076_z.jpg]] * 티베리우스의 최측근 출신인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를 비롯한 당대 로마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젊었던 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놀라울 정도로 성실하고 부지런했다고 한다. 또 즉위 전부터 죽을 때까지 공공도덕과 예의를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어릴 때부터 과묵하고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따라서 주변 사람들에게 전반적으로 지나치게 냉정하고 비정한 사람으로 여겨졌는데, 이런 성격은 양아버지 [[아우구스투스]]와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다고 한다. 그러나 때에 따라 굽히기도 하고 적당한 인사치레와 가식에 능했던 양부와 달리 시종일관 좋고 싫고가 명확했다. 또한 양부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사랑과 정을 자신의 명예, 가문의 명예 못지 않게 중요시하였고 그에 따른 책임감이 대단했다고 한다. 공공에 대한 책임감도 상당했던 만큼 티베리우스는 황제가 되기 전까지는 여러 번의 승전으로 얻은 전리품 등을 아우구스투스 포룸에 있는 카스토르 신전 재건 비용으로 기부할 정도로 인색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즉위 후에는 건물 건축, 경기와 행사 주최 등 돈 들어가는 일에는 인색하다고 까일 정도로 아꼈고, 말년에는 다른 사람들이 경기나 행사를 개최하는 일도 못마땅해 했다. * 티베리우스는 확실히 폐쇄적이고 낯을 많이 가렸다. 그런데 이런 성격은 갑자기 생긴게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유아기 때부터 아우구스투스 밑에서 자랐고 친어머니가 리비아 드루실라임에도 본래부터 사교적이지도 않았고, 사교 모임 등에 참석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이런 혼자 있기 좋아했던 성격은 재위 말년에는 극에 달하게 됐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이런 폐쇄적이고 낯을 가리는 성격은 그가 원로원과 민중 모두에게 비정하고 냉혹한 이미지가 굳어지는데 큰 영향을 끼치게 됐다. 추가로 그는 아우구스투스 부부를 비롯한 자신의 가족들, 네르바 황제의 할아버지 같은 극소수의 오랜 친구, 파테르쿨루스 등 극소수의 최측근 외의 사람들과는 교류가 적었다. * 도통 마음을 쉽게 여는 스타일이 아니었지만, 친동생 드루수스 부부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다정다감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20대, 30대 시절 아우구스투스 부부, 동생 드루수스 부부와 그의 첫 아내 빕사니아와 사적 시간을 보낸게 대부분이었고, 제수씨 소 안토니아가 사별 이후에도 홀로 조카들을 키우는 것을 굉장히 존경했다고 한다. 또 사생활적으로도 주변 측근들과 정적들도 놀랄 정도로 단점이 없어서 결혼 전까지 게르마니아 전쟁 와중에 병사들에게까지 “베스타 여사제 같다”고 반놀림을 당할 정도였다고 한다. * 어린 시절부터 과묵했지만 라틴어와 그리스어 실력이 뛰어났고, 그리스-로마 문학을 좋아한 '문학 소년' 이었다고 한다. 이런 티베리우스의 문학소년적 기질은 그가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고 하며, 젊은 시절부터 독서와 시짓기, 작문 등은 티베리우스의 취미 중 하나였는데 이는 그가 교양이 상당한 사람으로 평가받은 이유였다. 특히 왠만한 교양인들도 쉽게 하지 못하던 ‘좋아하는 그리스 시인들의 문체로 시문 짓기’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지었는데, 이 솜씨는 단순히 따라하기 수준이 아닌 그의 문학적 기질과 실력을 발휘할 정도였다. * 어릴 적부터 로마인이 좋아하는 유흥 문화에 흥미가 거의 없기로 유명했다. 일평생 [[검투사]] 경기는 질색해 경기장 근처도 가지 않았고, 가문 홍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검투사 경기 후원을 할 때에도 피를 흘리는 살육이 동반된 격렬한 경기나 맹수쇼는 열어주지 않고, 얼굴도 비추지 않았다. 이런 점은 양부 아우구스투스, 어머니 리비아 드루실라, 친동생 대 드루수스와 상당히 비슷했기 때문에, 개인 취향상 검투사 경기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평가받는다. 그런데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 일가 사람들이 좋아한 전차 경기, 무언극 관람, 서커스 경기 관람 역시 관심이 크게 없어, 의무로 강제출석을 해야 할 경우 외에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아우구스투스 후계자가 된 서기 4년 이후에도 비슷해, 서커스 경기 때에 등장할 때에도 그냥 인사 정도만 하고 곧바로 퇴장했고, 황제가 된 뒤에는 얼굴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황궁 안에서 집무를 보면서 결과만 보고 받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티베리우스를 싫어한 정적이나 그를 잘 모른 대중들은 티베리우스를 재미없고 비정하고 짠돌이 같은 증거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 남들보다 5년 이상 빨리 공직에 취임할 수 있는 특권에 따라 명예로운 경력을 일찍 시작할 때부터 얻은 별명이 "애늙은이"일 정도로 진지하고, 농담을 거의 하지 않기로 유명했다. * 젊을 적부터 부하를 대할 때, 출신 가문, 추천인, 보유 직책 등이 아닌 그 사람의 성실함 하나로 부하를 대우해, 이런 점에서 백인대장, 병사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다만, 파테르쿨루스가 평했듯이, 이런 점에서 판박이였던 동생 대 드루수스와 달리 전반적으로는 따뜻한 느낌은 없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보통의 [[파트리키]], [[노빌레스]] 출신 로마 귀족이나 부유한 기사계급 출신 원로원 의원들과 달리 이 점에서 큰 존경을 불러 일으켰고, 이런 점 때문에 그가 서기 4년 게르마니아 전선에 다시 나타났을 때 이를 기억한 베테랑 장병들과 퇴역병 가족들은 눈물까지 보였다. * 양부 아우구스투스와 마찬가지로 재위 내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그리스어를 비롯한 외국어에서 차용된 단어 사용을 공문서와 공식 칙령 표기에 넣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런 티베리우스의 모국어 사랑은 아우구스투스와 달리 재위 초기 원로원으로부터 ‘지나치게 재미없고, 과도한 매너리즘과 현학적 표현’이 가득하다고 비난받았다. 그런데 정작 티베리우스는 외국어인 그리스어에 굉장히 능통했고, 모국어였던 라틴어 실력 역시 상당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당대 로마인들은 그의 이런 모국어 애용을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오늘날 학자들에게도 티베리우스의 이런 라틴어 공문서 사용은 긍정적인 측면이 많았다고 평가받는다. * 티베리우스는 상당한 미남이었고, 타고난 파트리키였음에도 사치와 거리가 멀었다. 따라서 후임자 칼리굴라[* 사실 칼리굴라도 사치를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활용했기 때문에 사치를 하긴 할지언정 일정 수준을 넘기는 일이 없었다.]나 그를 롤모델로 삼은 [[도미티아누스]][* 원로원 입회 때마다 늘 가벼운 흉갑 위에, 화려하고 고급스런 토가를 걸쳐 입던 차림으로 유명했다.]와 달리 젊은 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평범한 재질로 만들어진 투박한 토가 차림을 항상 유지했고, 일상생활에서도 투박한 토가 차림이나 평범한 복장들을 굉장히 선호했다고 한다. 아울러 요란하거나 이국적인 악세사리에 관심도 없었고, [[비단]] 재질로 만든 의상이나 고급 재질로 만든 토가에도 흥미가 없었다. *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티베리우스는 젊은 시절부터 아첨꾼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원로원 의원들이 인사를 하기 위해서든 공무 때문이든 간에 자신이 탄 가마에 접근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원로원과 상류층 뿐만 아니라 로마 시민 대부분에게 행동거지가 문제있는 사람으로 여겨졌고, 죽을 때까지 인기가 진짜 없었다. 또한 "주인님(도미누스)"이라는 칭호를 누군가가 아첨하며 자신에게 부르자 화를 내며 "도미누스는 우리 집 노예들이 나를 부를 때나 쓰는 말이다! 다시는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반면 그는 자신에 대한 욕, 비방, 조롱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쿨하게 넘기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원하는 대로 말하고 생각하는 자유가 국가의 척도"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은둔 이후에는 고발장에 대해서만은 예전과 달리 민감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 상당히 이성적이었던 사람이라서 신이나 종교적 문제에 대해서는 다소 소홀히 여겼다. 그러나 [[점성술]]만은 신봉했고 젊은 시절부터 점성술을 공부하면서 토론을 즐겼다. 따라서 이때 얻게 된 멸칭 중 하나가 '이단자'였다고. 젊은 시절 티베리우스는 공직 다 내려놓고 로도스 섬에 가서 틀어박혀 지낼 때도 점성술 책인 호로스코프를 끼고 살았다고 하며, 카프레아이 섬 은둔 이후에는 점성술을 가지고 전문가들과 학자들을 불러놓고 토론까지 나눌 정도였다. 따라서 풍자작가 유베날리스(Iuvenalis)는 티베리우스를 두고 "카프리 섬에서 점성술사들에 둘러싸인 늙은 지배자"라고 비웃기도 했다. 아울러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티베리우스는 세계가 완전히 운명에 의해 지배된다고 믿었고 [[천둥]]에 기겁하곤 했다고 한다. 또 그는 하늘이 갑자기 어둠침침해지면 [[번개]]를 막아준다고 여겨지던 [[월계관]]을 썼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