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로호 (문단 편집) == 역사 == [[1944년]] 일제는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구만리의 [[북한강]] 협곡을 막아 [[수력발전]]이 가능한 화천댐을 축조한다. 낙차 77.5 m를 이용해 10만 8천 kW 정도를 발전 가능하다. 현재는 [[한국수력원자력]]에서 관리 한다. 이 화천댐을 축조함으로서 생성된 인공호가 파로호다. 당시에는 화천호, 화천 저수지 혹은 [[붕|대붕]]호(호수 모양이 전설 속 새인 [[대붕]]과 닮아 붙은 이름)라고 불렸다. 더 정확하겐 주민들은 대붕호를 건의했는데 당시 일제는 대붕이란 말이 거슬렸는지 어쨌는지 '대명제'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광복 후엔 화천댐으로도 불렀다고 한다. 그러다 [[삼팔선]]이 그어지며 북한령이 되었고,1948년 북한의 단전 조치로 인해 이 댐으로 북한강 물을 막아버림에 따라 하류의 [[청평댐]] 등의 수력 발전은 큰 피해를 보았고, 남한은 심각한 가뭄과 전력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그 뒤 한국전쟁 [[용문산 전투]]에서 [[대한민국 육군]] [[제6보병사단]]이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 3개 사단의 공세를 막아낸 뒤 패주병들을 여기까지 쫓아가 섬멸하자([[파로호 전투]])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이를 기념해 '''파로호'''로 개명하였다. "중국 [[중국 인민지원군|오랑캐]](虜)를 깨뜨린(破) 곳"이라는 뜻. 이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파로호라 하지않고 화천저수지라고 부른다. 이후 휴전 협정이 막바지에 이른 1953년 7월 13일 [[금성 전투]]에서 공산군의 목표 중 하나가 되어 [[백암산 전투]] 당시 중공군 일부가 이 호수를 노리고 남하했다. 그리고 20일엔 본격적으로 금성천 및 화천댐(화천발전소)를 두고 [[425고지-406고지 전투]]가 벌어져 사수에 성공해 댐을 포함, 호수 전체가 남한령이 되었다. 그 결과 수도권에 막대한 물과 전기를 공급하고 북쪽에서 내려오는 홍수 피해를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도 불안해서 상류에 [[평화의 댐]]을 추가로 건설했다. 참고로 파로호 전투 당시 여기에서 익사, 사살, 수장된 중국군은 대략 2만 4천여 명이라고 한다. 수장을 한 이유는 시체를 방치하면 악취 이상으로 전염병 창궐 우려가 있기때문. 게다가 대부분이 지금도 수습이 안 되었기에 수위가 낮아지면 (방류가 이루어지는) 댐 부근 진흙 속에서 유해들이 잔뜩 발견될 것으로 보인다. 바닷물 속에서는 오래 되면 유해가 녹아 없어지는데, 민물에서는 좀 더 오래 간다. 그래도 그냥 물에 잠겨 있는 상태로는 살은 몇 주 안에, 뼈는 길어야 10여 년 만에 삭아 없어지는데, 진흙 속에 묻히면 반 쯤 화석화돼 수십 년에서 수백 년이 지나도 뼈가 남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화천댐이 바닥을 완전히 드러내고 진흙을 준설한 적은 없으므로, 홍수로 대량 방류할 때 어느 정도까지 바닥의 진흙층이 쓸려내려갔는지가 관건이다. 1987~8년 무렵에는 [[평화의 댐]] 건설을 위해 수위를 크게 낮췄다. 이때문에 수몰 지역의 옛 건물 터들과 문화재들이 발견되는 일도 있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7032800329210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7-03-28&officeId=00032&pageNo=10&printNo=12769&publishType=00020|華川(화천)댐 수몰지 43년만에 "햇빛"]].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