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르티아 (문단 편집) == 군사 == 인구수에서 압도적인 로마 제국에게[* 로마 제국은 5천만~6천만인데 파르티아는 400만이었다.] 전체적으로 수세이긴 했으나[* 로마에게 수도만 세 번을 털렸다.] 때로는 팽팽히 맞서 싸울 정도로 굉장히 강력했다. 특히 파르티아 군대의 주력은 항상 [[기병]]이었으며, 다수의 경무장한 궁기병들과 소수의 중무장한 [[카타프락토이]]로 구성된다. 합성궁을 사용하는 궁기병들이 [[스웜 전술]]을 통해 적을 교란시키고 괴롭히다가 틈이 생기면 카타프락토이들의 강력한 돌격으로 적진을 붕괴시키는 것이 기본 전술이었다. [[카르헤 전투]]는 이러한 전술이 완벽하게 성공한 예다. ~~[[크라수스]]가 거의 [[샌드백]]이나 다름없었기에 가능했지만~~ 카타프락토이들은 매우 비싼 마갑+갑옷+무기+말 풀 셋을 갖추고 평상시 승마와 전투 훈련을 할 수 있었던 귀족과 그 가신들이었다. 파르티아 군대는 유사시 이런 귀족들이 자기 영지의 부족민이나 가신들을 긁어모아 편성한 봉건 군대였다. 전대의 아케메네스 왕조나 사산 왕조 역시 강력한 기병이 주력이었지만 다수의 경무장 징집병과 중보병대를 적극적으로 운용했던 반면, 파르티아는 중앙 집권화 문제 때문인지 아니면 전통 유목민 출신인 지배층의 군사 문화 때문인지는 몰라도 기병에 훨씬 크게 의존했다. 그러다보니 기병이 부족한 로마군은 파르티아 기병한테 굉장히 털렸고 대기병 전술과 보조군 기병으로 대응해야 했다.[[https://cafe.daum.net/historywar/Nwo/2785|파르티아의 전사들]] 징집병이 아닌 전문 [[보병]]대를 양성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 보병대는 대개 그리스계 전쟁 [[포로]]나 [[용병]]으로 구성되었고 처우가 좋지 않아 자주 반란을 일으켰다.[* 타민족이라서 차별받는 데다 파르티아의 경제사정이 나빠서 봉급도 자주 체불되다보니 보병들의 불만이 굉장했다.] [[사카족]]과 싸우던 [[프라아테스 2세]]가 셀레우코스 왕조의 투항병에게 [[살해]]되는 등 몇 차례의 실패를 겪은 뒤 파르티아는 중보병 세력을 양성하려는 노력을 완전히 포기했다. 국경지대의 요새나 주요 도시에는 보병대가 주둔했던 증거들이 있지만, 대개 근처 주민들을 징집한 경보병이나 궁병으로써 크게 중요한 전력은 아니었다. 파르티아는 왕이나 주요 귀족들에 딸린 친위대와 카타프락토이들, 그리고 국경의 일부 거점도시들에 주둔한 수비대를 제외하면 상비군이 없었다. 이는 지방 분권적/봉건적인 파르티아의 사회 구조와 맞물려 파르티아의 군사적 역량을 크게 제한했다. 파르티아의 왕중왕이 대규모 군사행동을 하려면 일단 제국 각지에 거점을 두고 있는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 군대를 끌어모아야 했다. 따라서 양면전선이 형성된다거나 대외 전쟁 중 국내에서 반란이 일어난다거나 할 경우 아주 골치아파지게 된다. 파르티아가 로마를 상대로 소극적인 자세를 유지했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특히 국력에서 압도적인 로마 제국을 상대로 장기전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서 우월한 기동력으로 로마군에게 타격을 입히고 빠지는 전술로 싸웠다. 로마 제국의 입장에서도 파르티아까지의 거리가 워낙 멀고 파르티아의 영토도 사막이 대부분인 불모지다보니 보급의 어려움이 있어 장기전이 힘들었다. 그래서 로마 제국과 파르티아와의 전쟁은 대부분 로마가 전투에서 승리한 후 외교로 마무리짓고 자기 영토로 철수하는 식으로 끝냈다. 파르티아의 이름을 딴 전술 내지는 마상 사격술로 [[파르티안 궁법]]이 있다. 퇴각하는 말 위에서 등을 홱 돌려 후방에 있는, 혹은 추격하는 적을 사격하는 기술, 즉 위 그림의 궁기병이 하고 있는 바로 그것을 말한다. 조금만 상상해 보면 알겠지만 고삐에서 양손을 놓고 진행방향과 반대를 보고 활까지 쏴야 하는 굉장히 어려운 기술이다. 한 술 더 떠 당시는 [[등자]]가 발명되기 한참 이전이었기 때문에 기수는 허벅지와 허리 힘만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말등을 붙잡고 균형을 잡아야 했다. 이 기술에 파르티아의 이름이 붙은 이유는 역시 [[카르헤 전투]]에서의 인상적인 모습 덕이다. 해군의 경우 인도양과 페르시아 만 쪽에 접해있던 만큼 아예 없진 않았겠지만 관련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