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펑더화이 (문단 편집) == 평가 및 여담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중국 펑더화이.jpg|width=100%]]}}}|| || [[샹탄]] 펑더화이 탄생지의 동상 || * 탁월한 군사적 재능과 강직한 성품을 지녔던 [[명장]](名將)이나 오히려 그러한 업적과 성품 탓에 [[마오쩌둥|노욕에 찌든 상관]]에게 찍혀 험한 말년을 보낸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흔히 반란을 일으키려다 비참하게 죽은 [[린뱌오]]를 [[초한지]]의 [[영포]]나 [[한신]]에, [[주더]]는 권력싸움에서 벗어나 편히 죽었다고 하여 [[조참]]에 비유하곤 하는데 펑더화이는 직접적으로 모반을 일으킨 것도 아님에도 다소 억울하게 역적으로 내몰려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는 점에서 같은 성씨를 가진 [[팽월]]과 비슷한 감이 있다. * 국공내전 때 능력을 인정받았고, 이를 바탕으로 [[6.25 전쟁]]에서도 중공군의 사령관으로서 참전하게 되었다. 사실상 거의 육군만으로 편제된 중공군은 제해권, 제공권이 없었지만 135만명이라는 압도적인 병력을 바탕으로 유엔군과 한국군에 대규모의 병력을 이용한 포위 작전으로 치명적 타격을 가하여 38선까지 몰아넣었지만, 이후 6.25 전쟁은 2년 여의 지리한 소모전 끝에 휴전이라는 어중간한 결말로 종결되었다.[* 애초에 미군과 한국군을 38선까지 밀어낸 시점에서 미군의 위협을 쳐내고 북한을 지킨다는 중공군의 원래 목적은 이미 달성했다. 전술적 능력은 뛰어났어도 보급과 병참 등의 군수지원이 부실했던 중공군에게 그 이상을 원하는 건 너무 무모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눈이 돌아간 마오쩌둥이 잘하면 남한을 먹을 수 있겠다면서 진군을 지시했고 그 결과 미군에게 두들겨 맞고 어중간한 결말로 끝나버렸다. 이건 펑더화이보다는 '''마오쩌둥의 과욕'''이 더 큰 문제였던 셈이다.] * 전장에서 부하들을 늘 걱정하는 덕장이었다. 들것에 실려가는 부상병을 직접 나르는 모습에 부하들이 감동하였을 정도. 또 마오안잉의 사망과 연관되었다는 [[박일우]]가 준 신선한 계란 10알을 본인은 손도 대지 않고 부상병들을 위해 계란죽을 쒀서 먹이라 했던 일화도 유명하다. 물론 이걸 마오안잉이 중간에 스틸해갔다가 죽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건 확인된 이야기는 아니다. 실제로도 현역 시절에나 퇴역한 후에나 부하들에게 대단한 존경을 받았다. 마오의 방침을 무시하고 소신대로 백단대전을 벌인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아부하지 않고 할 말은 하는 성격이었는데, 열악한 보급을 받으며 고생하는 부하들을 걱정해 마오쩌둥에게 진언을 올렸지만 번번히 무시당했다. * 또한 1950년 10월부터 1951년 1월까지 3번의 공세를 펼쳐 심각한 인력 손실과 물자 부족에 시달리던 중국군의 상황을 충분히 인지하여 마오쩌둥에게 2개월에서 3개월간 전군에 휴식을 명령하고 이듬해 3월쯤에 공세를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김일성이나 북한 주재 소련 대사 라자예프[* 소련인임에도 스탈린의 의사에 반해 행동했는데, 김일성과 친한 독전파였다.]는 지금 당장 부산까지 밀고 내려가 달라고 주문했지만, 펑더화이는 그런 무리한 요구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실전을 뼈저리게 겪었던[* [[독소전쟁]]에서 스탈린은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소련군에게 무리한 진격을]] [[르제프 전투| 여러번 강요했다가]]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모조리 말아 먹은 적 있다]](...). 애초에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람이 너무 많이 죽은 소련은 또 전쟁을 할 여력이 없었다. 현실주의자인 스탈린 입장에서는 한국전쟁 자체가 별로 달갑지 않았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것에 관해 독전파들의 요구가 부당하다고 지적하고 펑더화이가 옳게 선택하였다며 치켜세웠다. * 이러한 생각은 당시 중국군과 대치하던 유엔군의 미8군사령관 [[매튜 B. 리지웨이]]의 생각과도 비슷했는데 두 사람은 무리한 진격보다는 충분한 물자와 인력 보충을 도모하고 전략상 요충지를 차근차근 점령해나가는 쪽을 선호했다. 또한 이러한 생각은 8월 15일 [[광복절]]까지 종전하겠다고 무리한 남진을 선택한 김일성과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 [[미국]]의 논픽션 [[작가]]인 데이비드 핼버스탬의 《콜디스트 윈터》에서 [[저자]]는 리지웨이를 중국군으로, 펑더화이를 미군으로 옮겨놨어도 두 사람은 실제 역사와 같이 판단했을 것으로 평가했다. * 그리고 결국 마오쩌둥의 반대로 무산되었지만 장비나 화력보다는 병사 개개인의 사상의 각성을 중시한 마오쩌둥의 군사이론에 회의를 갖게 되었고, 6.25전쟁 직후 임명된 국방부장 시절 미군과 같이 첨단무기와 프로페셔널한 전문군인을 갖춘 군대가 강한 군대가 될거라고 생각해 국방 개혁을 추진하려고 하기도 했다. 어쨌든 여러모로 현실적인 안목과 전장에 대한 혜안을 가진 군사 전문가였지만, 하필이면 [[무능한 상사|상관이 마오쩌둥이라]] [[유능한 부하|고생만 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 한국전쟁에서 국군과 유엔군을 고전하게 하여 결과적으로 분단이 고착화되도록 만든 일등공신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고, 여러모로 한국인들의 입장에서는 좋게 보기 어려운 인물이다. 하지만 그 책임은 명령을 따른 펑더화이보다는 직접적으로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과 그를 지원한 마오쩌둥쪽이 더 크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때문에 그의 행보는 차차하고, 베트남전에서 명장으로 활약한 [[채명신]] 장군이나 베트남 공산군의 [[보응우옌잡]] 같이 객관적인 한 사람으로서 평가를 내려야한다고도 주장된다. 한국인으로서 좋게 보기 어려운 인물이지만, 군인으로서의 펑더화이는 능력도, 인품도 좋았던 명장이었다. * 한국에서는 한국한자음인 ‘팽덕회’라고도 많이 부르며, 일본에서도 일본한자음인 ‘호우토쿠카이([ruby(彭徳懐,ruby=ホウトクカイ)])’라고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등재된 인물로, “펑더화이: 중국의 군인ㆍ정치가(1900~1974). 6ㆍ25 전쟁 당시 중공군을 이끌고 우리나라에 들어왔으며, 국방부장에 취임하였으나 실각하였다가 1978년에 다시 명예가 회복되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 2023년 7월 27일 북한에서 진행된 전승절 기념 공연에서 동영상에 잠깐 나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