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페리클레스 (문단 편집) === 아테네의 번영 === 기원전 444년, 과거 정치 체제를 원하는 보수파와, 현재 정치 체제를 유지하려는 민주정파는 극심한 권력 투쟁을 벌였다. 보수파의 새로운 지도자인 투퀴디데스는 페리클레스가 추진하던 건설 계획에 방만한 예산 운영으로 돈이 낭비되고 있다고 고발하였다. 처음에 [[투퀴디데스]]는 지지를 얻고자 민회를 선동하려 하였으나, 민주정파의 영수인 페리클레스가 일어나 보수파를 제압하였다. 페리클레스는 민회에서 자신의 재산으로 소비된 모든 건설 비용을 상환하겠다고 제안하였으며 그 조건으로 자신의 이름으로 봉헌 비문을 세울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의 태도는 박수와 함께 환영받았으며, 투퀴디데스는 예상치 못한 패배를 당하였다. 기원전 442년, 아테네의 시민들은 투퀴디데스를 10년간 도편 추방하고, 페리클레스는 다시 아테네 정계의 1인자가 되었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가 안정적으로 동맹국들을 지배하고, [[그리스]]에서 [[아테네]]의 힘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일반적으로 델로스 동맹이 점차 아테네 제국으로 변질되는 과정은 페리클레스 시대 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페리클레스 정책으로 동맹 체제의 변화가 가속되었다. 아테네가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이집트에서 패배하면서, [[에게 해]]에 대한 [[아테네]]의 해상 패권이 위협받는다. 게다가 밀레투스나 에뤼트라이 같은 여러 도시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델로스 동맹이 아테네 제국으로 변하는 마지막 단계가 촉발되었다. [[이집트]]에서의 패전, 그리고 뒤이은 도시 국가들의 반란에서 패전한 뒤 아테네는 기존의 해군력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가 됐는데, 지금의 아테네의 해군력으로는 델로스 섬에 있던 동맹의 금고를 위협으로부터 지킬 수 없다는 이유로 기원전 453년에 아테네는 동맹 금고를 아테네로 옮긴 것이었다. 이는 동맹에서 아테네의 영향력을 크게 강화시켜주었고, 도시 국가 연합체였던 델로스 동맹이 아테네를 수도로 하는 그리스 제국으로 변하는 계기가 되었다. 기원전 447년경, 아테네의 클레아르코스는 모든 동맹국이 아테네의 은화와 형량 단위를 사용해야 한다는 화폐 칙령을 제안하였다. 이 칙령은 그리스의 해상 무역을 더욱 촉진시켰을 뿐만 아니라, 아테네의 경제 정책이 그리스 전역에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었다. 페리클레스가 자신의 건설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돈은 바로 이 동맹 금고에서 나왔다. 그 건설 계획 중에는 프로퓔라이아, [[파르테논 신전]], 그리고 [[페리클레스]]의 친구인 페이디아스가 조각한 아테나 황금상 등이 있었다. 기원전 449년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신전을 대대적으로 재건하는 데 9,000 탈란톤을 쓸 수 있게 하는 칙령을 제안하였다. 기원전 440년, 사모스는 [[밀레투스]]와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었다. 양국의 갈등이 극에 달하자, 밀레투스 사람들은 아테네로 가서 사모스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아테네는 양측이 전쟁을 멈추고 이 문제를 자신들의 중재에 맡기도록 명령하였으나, 사모스 사람들은 거부하였다. 그러자 페리클레스는 양 도시 국가의 평화를 원하나 사모스가 전쟁을 원한다는 이유로 사모스에 군대를 보내는 법령을 통과하였다. 해전에서 페리클레스와 다른 아홉 장군들이 이끄는 아테네의 군대는 사모스 군대를 격파해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섬을 통치하게 되었다. 기원전 438 ~ 436년 사이에 [[페리클레스]]는 폰토스의 [[아테네]] 함대를 이끌어 이 지역 그리스 도시들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의 요새화와 같은 내부 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며, 안드로스, 낙소스, 투리이, 암피폴리스 등에 클레루키아(특별 식민지 통치 기구)를 설치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