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평론가 (문단 편집) === 평론가의 자질 문제 === >이 세상 평론가의 작업은 여러모로 볼 때 쉽다. >손해볼 건 별로 없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솜씨를 발휘하며 평가해주길 바라는 위치를 즐긴다. > >'''우린 혹평을 쓰기 좋아하고 그게 쓰기에도, 읽기에도 재미있다.''' 하지만 우리 평론가들이 인정해야 될 것은 모든 걸 고려해볼 때, '''하찮은 음식이라도 그게 우리의 비평보다는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때로는 평론가가 그 위험부담을 안아야 될 때도 있다. 그건 바로 새로운 걸 발견하고 보호해야 될 때다. 세상은 종종 새로운 재능과 창조에 냉담하다. 새로운 것은 친구가 필요하다. > >어젯밤 난 뭔가 새로운 것을 경험했다. 아주 뜻밖의 상대로부터 기가 막힌 음식을 맛본 것이다. 음식과 요리사 둘 다 내가 생각하는 기존의 미식에 대한 개념에 도전을 했다고 말한다. 그건 너무 약한 표현이다. 그들은 날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 > [[안톤 이고]], [[라따뚜이(애니메이션)|라따뚜이]] 中[* 작중 후반, 평범한 라따뚜이를 먹은 뒤 이에 감명하고, 그 요리와 관련된 진실을 알게 되면서 생각을 고치게 된 뒤의 내용. 음식뿐만 아니라 어느 분야에서든 평론가의 위치 및 스스로의 선입견에 갇힐 수 있는 한계와 그로 인해 부당한 피해를 입는 창작물의 입장, 그리고 이를 극복한 자신의 심정을 하나의 평론 속에 잘 표현해냈다.] >작가를 모욕하면 비평이 되고 비평가를 비평하면 모욕이 된다. >''When the critic insults the author, it’s called criticism. When the author criticises the critic, it’s an insult.'' >---- > 앙테 드 몽테를랑(1895~1972, 프랑스의 작가) 과거 신문이나 잡지에 칼럼을 기고하던 시절에도 그랬지만, [[트위터]], [[페이스북]] 같은 [[SNS]] 칼럼, [[유튜브]] 크리에이터 문화의 발전과 함께 평론가의 자질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자극적인 비평이 더 많은 조회를 불러오기 때문에 거의 [[트롤링]]에 가까운 비평을 하는 비평가도 나오고 있다. 이들을 비꼬는 표현으로 양산형 공장 평론가라고 부른다. 이는 순수 학문이나 순수 예술 분야를 제외하면, 평론을 하는 데 특별한 자격 조건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진입 장벽이 낮은 직업이란 얘기다.''' 위에 언급된 소셜 미디어 칼럼이나 유튜브 리뷰 영상이 문제가 되는 것도 그런 점과 무관치 않다. 이들은 대체로 자기 주관에 갇혀서 그 대상의 역사성, 바탕이 되는 철학(방향성), 소비자들과 창작자들의 관계에서 만들어진 창작 문화, 창작자가 가지고 있는 경제적(상업적, 예산적) 한계, 기술적 현실적 실현 불가능성 등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까기 위해 까는 이들이다. 자신이 평론을 업으로 삼는 프로 평론가를 희망한다면, 자신의 말 한마디에 얼마나 큰 책임감이 부과되는지를 알아야 하고, 소비자의 이익과 알 권리를 대변해주고, 창작자가 간과하기 쉬운 소비자의 관점을 불러일으키고, 소비자와 창작자의 관계를 이어주고, 자신의 지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특히 가장 주의해야 하는 것은, 평가하는 입장을 지적인 상하관계로 오해하고 자신의 주관적 [[신념]], [[이데올로기]]를 창작자와 소비자에게 강요하려 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창작계에 열풍처럼 불고 있는 [[페미니즘]] 워싱(핑크 워싱), [[정치적 올바름]]이 있다. 페미니즘, PC와 상관없던 원작들에 2차 창작자가 페미니즘, [[정치적 올바름|PC]]적 색채를 입히고, 기존에 흥행하던 작품의 후속작에 기생하여 [[개연성]] 및 [[스토리]], [[핍진성]] 등등의 작품 내 모든 요소를 페미니즘, PC를 광고하는 도구로 이용한다. 평론가들은 페미니즘, PC적 관점에서 그 작품을 높이 산다. 그리고 이를 비판하는 대중들을[* [[페미니즘]]이나 [[정치적 올바름|PC]]와 같은 사상 자체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러한 주제 의식과 요소를 훌륭히 전달하는 작품들도 분명히 많이 존재한다. 그러나 대중이 비판하는 작품들은 대개 '지나치게 작위적인 설정'들이 뜬금없이 등장하여 몰입을 방해하고, 극의 개연성을 파괴시키며, 재미를 떨어뜨린다는 특징을 가진다.] '[[배틀필드 V|못 배운 놈]](Uneducated)',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남성우월주의자]], [[백래시]] 취급한다. 이런 행태는 원래 그 작품을 함께 만들어온 원작자와 소비자의 문화를 무시하는 것으로도 보일 수 있다. 이런 선민의식적인 시각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글. [[https://kr.ign.com/the-last-of-us-2-ps4/9019/editorial/soniyi-bulpyeonhan-jaggajuyi-aaageub-geimdeul|나는 이런 종류의 게임이 사회현상이 되는 흐름은 곧 '작가주의 노선의 예술 게임이 인류를 계몽할 수 있는 수준의 미디어가 되었다'는 증거라고 본다.]] 하지만, 정작 창작 쪽 조언은 이와 반대되는 말을 하고 있다. > 우선, 작가의 태도에서 출발하라. 해결할 문제가 있거나 주장하는 바가 있거나 혹은 작가가 생각하는 식으로 세상이 생각해주기를 바란다면 작품이 아닌 논문을 쓰는 게 옳다. 이야기를 하는 데 흥미를 느끼고, 이웃을 사로잡는 이야기를 하고 싶고, 복잡한 세상에서 발견되는 삶의 모순을 말하고 싶으면 작품을 써라. >---- > - 로널드 B. 토비아스,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 가지 플롯(김석만 옮김)>, 풀빛, 개정판 2007, P. 85 >위험 요소는 이런 것이다. 작가가 세상에 널리 증명하고 싶어하는 아이디어가 작품의 전제가 될 때, 그리고 그 아이디어를 도저히 부정할 수 없게끔 확증하는 방식으로 그 이야기를 설계할 때 작가는 계몽주의에 빠진다. 관객을 설득하는 일에 열중하다 보면 이야기 한쪽 축을 이뤄야 할 목소리가 질식할 것이다. 예술을 설교 수단으로 오용 또는 학대하다 보면 그 작가의 시나리오는 세상을 개종시키기 위해 영화로 서투르게 위장한 설교나 논문밖에는 안 된다. 계몽주의란, 예술은 사회의 암으로 수술해 내는 메스로 사용될 수 있다고 믿는 천진한 낙관주의의 산물이다. >---- > - 로버트 맥키, , 민음인, 2002, P.189 조언들은 추가적으로 예술가가 설득이나 계몽을 위해 작품을 만들면 이야기가 일방적인 면만 부각할 여지가 커진다는 것이다.[* 출처는 마찬가지로 <로널드 B. 토비아스,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 가지 플롯”(김석만 옮김), 풀빛, 개정판 2007, P. 85>와 <로버트 맥키, “Story :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고영범∙이승민 옮김), 민음인, 2002>] 예시로 [[라스트 오브 어스 2]]는 이야기 구조를 보면 어느 한 쪽만 조명하려고 하지 않긴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캐릭터 간의 형평성을 지적하는 것을 보면 원칙이 작품에서 실현되지는 않았다.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의 [[로즈 티코]]는 소위 계몽을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의 전형이다. 당연히 평가는 좋지 않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