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평양성 (문단 편집) === 배경 설명 === [youtube(3UWg2yT1qxA)] 본래 고구려 수도 제도는 평시에 수도 노릇을 하는 평지성(平地城)과 전시에 방어를 담당하는 산성(山城)으로 구성된 이중성 체제였다.[* 이는 [[월성]]과 [[명활산성]]을 구축한 [[신라]], [[몽촌토성]], [[풍납토성]]을 구축했던 [[한성]] 시기 [[백제]]도 마찬가지였다.] 고구려 평양성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았으며 주류 의견은 현재의 [[북한]] [[평양시]] 시가지에 위치했다고 추정하고 있지만 평양성이 지금의 [[중국]] [[랴오양시]]에 위치했다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 평양 일대는 [[고조선]]의 영토였으며 고조선이 기원전 108년에 멸망하고 난 이후, [[낙랑군]]의 치소가 있었던 곳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남한 학계의 유력한 학설이다.[* 북한 학계에서는 낙랑국의 유적으로 보고 있다.][* 단, '[[낙랑군]]이 있던 곳=[[왕검성]]'은 아니기 때문에 왕검성을 평양성 부근으로 비정하는 것은 유력한 학설이라기 보다는 그럴거라고 추정하는 수준에서 그치고 있다.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것은 사료와 고고학적으로 검증이 되지만, [[왕검성]]이 평양에 있었다는 것은 아직까지 명확하게 입증되지 않았다.] 이후 [[대무신왕]]기에 고구려가 남쪽으로 확장하면서 낙랑, 대방 등을 잠식해 나갔지만, [[동천왕]]기에 [[비류수 전투]]로 위나라에게 고구려가 멸망 직전까지 치달으며 통제력을 상실했다. 훗날 고구려 제15대 [[미천왕]]이 중국 군현들을 축출하고, 고조선의 남부 영토를 수복했다. 이후 [[고구려]]는 평양성을 당시 수도인 [[국내성]]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평양성은 고구려의 제2의 도시이자 제2의 수도로서 남쪽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그래서 [[백제]]와의 [[평양성 전투(371년)|평양성 전투]]때 고구려 제16대 [[고국원왕]]이 목숨을 걸고 막으려고 했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