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포경수술 (문단 편집) == 포경수술의 역사 == [[파일:external/genova72h.altervista.org/circoncisione.jpg|width=400]] [[페테르 파울 루벤스]]가 그린 '''[[예수]]'''의 할례이다. 루벤스 외에도 예수의 할례를 다룬 그림은 많다 못해 성화의 한 장르가 되었을 정도이다. 위키피디아의 [[http://en.wikipedia.org/wiki/Circumcision_of_Jesus|해당항목]] 참조. 포경수술의 시작 자체는 의학적인 용도보다는 종교적, 문화적인 것이었다. 자세한 사항은 [[할례]] 항목으로. [[루이 16세]]가 진성포경이라서 포경수술 이후 다산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국은 어떤가 의문을 가지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한마디로 말하자면 옛 한국인들은 받지 않았다.''' 애초에 동북아시아는 [[할례]] 문화가 있는 지역도 아니었고, 당시에는 아예 포경수술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게다가 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 내 몸은 부모님이 주신 것이니 함부로 훼손하지 않는 게 효의 시작이다.)를 가르치던 시대인데 살점을 도려내는 그런 게 있었겠는가.[* 참고로 [[명불허전(드라마)]]의 최연경이 환자한테 수술을 할려는 것을 보고 허임이 “사람의 몸에 어찌 칼을 댄단 말이오!” 라고 했을 정도니.][[환관]]이 있지 않느냐는 의문이 있지만, 흔히 오해하는 것과는 달리 조선시대에는 사사로이 거세해서 [[환관]]이 되는 것은 금지하였다. 공식적으로 남아의 고환을 거세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개에게 물리거나 하는 사고를 당해 안타깝게 그곳을 잃은 아이를 수소문해 환관으로 키웠다. 암암리에 거세를 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는 환관으로 만들기 위해 거세하지 않았다. 포경수술이 한국에 최초로 들어온 건 [[대한제국]] 시절이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한국 남자 인생에서 통과 의례처럼 여겨지는 수술이 아니였고 진성포경의 성인들이 필요에 의해 받았던 의학적인 치료 방법이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2102600209205008&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2-10-26&officeId=00020&pageNo=5&printNo=4259&publishType=00020|32년 기사]]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4010200209204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4-01-02&officeId=00020&pageNo=4&printNo=4692&publishType=00020|34년 기사]] 이들 외 1930년대 기사들이 더 나온다. 있긴 있었지만 한국전쟁 이후부터 시작되는 우리나라 포경수술의 역사와 거의 연관성은 없고 포경수술이 일제시대 들어온 악습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일본은 개항 이래로 포경수술이 보편화된 적은 없으며 조선인들의 그것에 관심을 가졌을 리가 없다. 다만, 일본의 영향에 대한 주장도 나름의 근거들을 가지고 있는데 대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제시기 한국 남성의 사타구니 위생상태는 좋지 않았고, 군경 조직에서는 일본 본토와 다르게 청결 관리를 위해 포경수술이 권장 언급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당시에 널리 시행된 것은 아니지만 위생상태와 직결하여 언급되던 맥락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향후 한국전쟁 이후 시기에 삶이 척박하고 위생이 극악으로 나쁜 상태로 질병이 창궐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에 역시 군조직을 중심으로 널리 포경수술이 시행되고, 보편화되고 유행하게 되었다. 이때의 주요 군경 관리직 인사들은 일제시대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경우였었다. 또한 일본의 유명 성형의사인 타카스 카츠야는 한국에 포경수술이 널리 퍼지던 시점에 한국에 적극적으로 포경수술의 노하우를 전수하였고, 이전에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다양한 결과물이었던 수술방식을 유사하도록 통일시키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출처_필요] 일본에 포경수술 인구 비율이 낮다고 하여 한국의 포경수술이 일제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주장은 이런 맥락을 생략하는 직관적 의견일 수 있으며, 많은 다른 사회문화 현상에 있어서도 일본에는 그닥 심하지 않은 마이너 요소가 일본 반자이식 군경 조직을 타고 잘못 한국에 들어와 기본값으로 탑재되는 케이스들이 많으므로 고려해볼 만도 하다.[* 대부분 딱 듣기에 이상하거나 부끄러운 문화에 관하여 일본 사람에게 물으면, 내제되었거나 본류를 제공했던 경우에도 그렇지 않은척 찡그리며 쉬쉬하거나 부인하는 경우도 많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심증을 묻는 걸 근거로 삼긴 힘들다. 다른 문화권에서도 시간이 흘러 인식이 바뀌거나 발전된 뒤에는 얼마든지 비난이나 부끄러움의 대상(ex 현대 서구사회에서 옛 [[마녀사냥]] 문화에 대해 어처구니 없어 한다든가)이 되곤 했다. '~하더라, 아님 말고'식이 아닌 신빙성 있는 물증이 없는 한 신뢰성 높은 근거로 사용되긴 힘들 것이다.] 또한 위에서 서술했다시피 '가성포경', '진성포경'이라는 용어는 '''국제적으로는 사용하지 않으며, 한국과 일본에서만 사용하는 일본에서 들어온 단어'''이기 때문에 일본의 영향이 없을 리 없다. 일본 웹에서 포경에 대해 검색하면 일본인들의 포경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어떤지에 대해 찾을 수 있으며(구글로 번역한 사이트들[[https://translate.google.co.kr/translate?hl=ko&sl=ja&u=http://osucon.com/kaseihoukeisyuzyutu/&prev=search|1]][[https://translate.google.co.kr/translate?hl=ko&sl=ja&u=http://xn--xnqp3hfwog57a.jp.net/mame/contents1.html&prev=search|2]][[https://translate.google.co.kr/translate?hl=ko&sl=ja&u=http://xn--n9jo9qmbxr162olheh4houoiwounys5cbs5d390agsq.com/houkei/nihonjinnohoukei.html&prev=search|3]][[https://translate.google.co.kr/translate?hl=ko&sl=ja&u=http://www.usroute1.net/%25E4%25BB%25AE%25E6%2580%25A7%25E5%258C%2585%25E8%258C%258E%25E3%2581%25AB%25E5%25AF%25BE%25E3%2581%2599%25E3%2582%258B%25E6%2584%258F%25E8%25AD%2598%25E3%2581%25AE%25E5%25A4%2589%25E5%258C%2596&prev=search|4]][[https://translate.google.co.kr/translate?hl=ko&sl=ja&u=http://hokei.clinic/10102016/927.html&prev=search|5]][[https://translate.google.co.kr/translate?hl=ko&sl=ja&u=http://men.wp.xdomain.jp/houkei_1/&prev=search|6]]), 한국 사회에서의 포경수술에 대한 인식과 비교해 볼 때 차이점도 있으나 대체로 포경을 부끄럽거나 남자답지 못하다고 여기는 등 유사한 부분이 많다. 이로 보아 한국은 일제 시대 동안에 포경에 대한 일본식 인식이 전해진 후, 군정기/한국전쟁을 거치며 포경수술을 당연시 하던 미국의 영향이 더해짐에 따라 (미국의 영향이 적어 수술이 성행하지 않은)[* 참고로 [[GHQ]]가 일본을 통치한 군정기는 1945년 8월 15일~1952년 4월 28일로 7년이 좀 안 되고 한국의 [[미군정]]기는 1945년 9월 8일~1948년 8월 15일로 3년이 조금 안 된다. 즉 거의 미군이 통제한 GHQ가 일본을 한국 미군정기의 2배 이상의 기간 동안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면서 통치했는데도 불구하고 영향이 덜했다고 한다면 [[6.25 전쟁]]기(1950년 6월 25일~1953년 7월 27일)의 3년 동안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던 듯하다.] 일본과는 반대 방향으로 변질되어 현재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포경수술은 1945년 광복을 맞으면서 미국을 통해 본격적으로 소개되었고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 군에서의 포경수술 시술이 증가하기 시작했으며 70년대부터 사회적으로 권장하기 시작한다. 1980년대부터는 남자의 통과의례로 자리를 잡게 되어 점차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어린시기에 수술하는 경향이 퍼졌다. 1990년대가 되어서는 신생아 시기에 포경수술을 하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으며 대체적으로 초등학교 졸업 전후로 하여 수술을 하는 관행이 자리 잡게 되었다. 당시 [[제왕절개]], [[성형수술]] 등과 더불어 '부화뇌동형 수술'의 예로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2000/1857846_19530.html|손꼽혔다.]] 그 결과 수술자 수는 남성 출생자 수보다 많아질 정도가 되어 '''2002년에 이르러 포경수술률 86%이상'''[* 정확히는 14-29세 연령대 기준으로 86.3%를 기록하였는데, 이 젊은 연령대가 2002년 조사 당시 포경수술을 가장 많이 한 구간이다. 인구분포로 계산한 '''전체 한국 남성의 포경수술 비율은 60%'''로 추산됐다.[[http://m.chosun.com/svc/article.test.html?sname=news&contid=2002030670201|#]] 특히 가장 높은 수술률을 보인 17-19세 연령대의 경우 수술률이 95%에 달했으며 이들 중 포경수술을 하지 않은 소수조차도 추후 수술받을 계획이 있다고 답변할 정도로 포경수술이 유행했었다. 이를 통해 그때 중고등학생들([[에코세대|1980년대 중후반 태생]]) 세대가 대한민국 포경수술의 절정기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포경수술이 워낙 크게 유행했기에 체감상 당시 전체 포경수술률이 90%이상이라고 느낀 사람들도 많다. 포경수술 절정 세대인 14-29세 연령대 기준에 속하는 사람의 경우 본인 세대의 모든 남자들이 다 했을 거라고 착각할 정도. 하지만 전체 비율은 60%(예를 들어 70대는 수술률이 10%에 불과)이다. 더구나 추후 수술할 계획이 있다고 한 응답자들을 근거로 포경수술 수치를 누적해서 추론하는 건 잘못된 태도다. 수술을 할 생각이 있다고 응답한 것과 정말 수술을 한 것은 구분지어야 한다. 수술할 계획 있다고 답변만 해도 실질적으로 수술을 한 게 되는 건 아니니까. 오히려 이후 10년 간 전체 수술률이 지속적으로 감소한 결과를 보면 당시엔 분위기에 위축된 나머지 계획도 없으면서 수술할 거라고 거짓 답변한 경우, 안 했는데 했다고 부정직한 답변한 경우도 상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반면, 수술을 했는데 안 했다고 거짓말한 경우는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본다면 실질적으로 전체 포경수술률이 90%을 넘었을 거라는 일부의 주장은 극심한 포경수술 붐에 영향을 받은 주관적인 체감에 불과한 것이다.][* 이보다 앞서 1997년에는 포경수술에 다소 긍정적인 견해를 지닌 다른 연구가 있었는데, 초등학생들의 40% 이상, 고학년(5-6학년)에서는 80% 이상이 포경수술을 받아서 위의 86%에 근접하는 결과가 나타났었다.]이라는 충격적인 기록을 달성하게 되었다. 이는 포경수술로 돈을 벌기 위한 비뇨기과 의사들의 농간[* 2002년 당시 한국인 의사들을 대상으로 한 영국의 설문조사[[포경수술#s-4.2|(한국 의사의 포경수술 설문조사)]]를 보면 단순히 의사들의 의도적인 농간만은 아니고, 포경수술을 당연시 해온 분위기에 의해 의사조차 포경수술에 대해선 맹목적으로 수용한 나머지 기본적인 상식이 결여되거나 무지했던 탓도 있다]이 큰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래서 80년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유아,아동기나 학창시절에 많이 받은 반면 70년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은 고등학교 이상~성인 시기에 받거나 군복무중에 군대에서 많이 받은 세대 차이가 나타난다. 관련된 내용은 [[포경수술#군대에서의 수술|군대에서의 수술]] 항목을 참고하자. 최근 들어선 포경수술에 대해 부정적인 연구와 여론이 높아졌다. 한국의 포경수술 인구는 급격하게 감소 중이며, 2002년에 발표된 통계 이후 2011년에 이르기까지 10년 내에 포경수술을 시술한 남성은 겨우 25%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자세한 것은 [[포경수술#s-10.4.1|2010년대 근황]]을 참고. 서울대 교수도 직접 포경수술의 필요성을 부정했다.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7071579&cloc=olink|신문기사 '선진국은 위생 위해 포경수술? 틀린 말이죠' ]] 한편 역사적으로 포경수술을 해야 했던 이유가 '''[[모래]]''' 때문이고 이 때문에 [[사막]] 지대에 위치한 이집트나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문화권에서 발생했다는 설도 등장했다. [[https://www.dogdrip.net/500272350|#]] 고대 이집트의 신성한 할레 의식에 영향을 받은 유대인과 달리,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귀두 노출을 야만인 또는 노예나 하는 짓이라며 천시했고, 나체로 경기할 때도 귀두가 노출되는 일이 없도록 끈이나 고리로 포피를 묶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당대 유대인은 탄압을 피하기 위해 원시적인 포피재건술을 연구 실행하기도 했다고 한다.[[https://m.mk.co.kr/amp/10604862|#]]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