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폭염/사례 (문단 편집) ==== [[1900년대]] ==== 이 시기는 그럭저럭 더운 해가 많았던 것으로 보이는 1880년대와 1890년대랑 다르게 유독 서늘함이 늘었다. 1901년을 제외하곤 전부가 눈에 띄는 더위가 없었고, 오히려 1902년과 1905년에 저온 현상이 가장 강력하게 두드러졌으며, 1903년과 1906년도 그렇게 높다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한편 이 시기에 유독 여름철 강수량이 많이 부족한 현상도 두드러졌다. 여름이 서늘하다고 꼭 좋은 것임이 아님을 증명하는 사례라 할 수 있겠다.] * '''[[1901년]] 8월''', [[대한제국]](중부): 역시나 또 [[https://blog.naver.com/hahnsudang/20029238080|기상학 역사를 다루는 그분의 블로그]]에 의하면 인천의 8월 평균기온이 7년만에 '''또''' 역대 2위 급인 '''27.4°C''' 를 기록했다. 게다가 가뭄도 비상식적으로 심했던것으로 보인데 월강수량이 7월 38.1mm, 8월 32.0mm 로 그 어느해보다 심했다.[* 월강수 200mm 여도 마른장마인데 30mm 대라는 것은 정말 너무 비정상적이다. 1901년 문서의 링크를 타고 가면 알겠지만 서울 연강수량이 '''고작 370mm'''에 불과했다고 한다.~~스텝기후?~~] 다만 7월은 24.5°C로 평년보다 조금 높은 수준이었고 무엇보다 부산은 1901년 8월이 25.5°C 로 평년 수준이었다.[* 부산은 인천에 비해 그 해 봄부터 꾸준히 비가 내렸는데, 강수량 탓도 큰것으로 보인다.] 그 해는 중부지방 한정으로 엄청난 폭염+비상식적인 가뭄이 찾아온 모양이다.[* 정작 [[1902년]]은 1980년 수준으로 어지간히 쌀쌀한 여름으로 기록된 듯 하다. 이러한 관계는 [[1939년 폭염]] 이후 역대 최대 강수량으로 홍수가 잦았으며 평년보다 기온도 낮았던 [[1940년]]과도 비슷하다.] 해관자료를 보면 7월 말에 기온이 점점 높아지더니, 8월 3~5일간 최저기온이 25 °C 이상인 열대야와 함께 인천이 '''37.5 °C를 연속으로 기록했다고 한다.'''[* 4일 최저기온이 25.5 °C로 가장 높아서 이날이 폭염의 정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마 37도 중후반대인데 더 가까운 37.5 °C 정도로 최고기온을 맞춘 듯하다. 약 37.3~37.7 사이였을듯.] 그리고 8월 상순에 인천이 이 정도로 기온이 올라간적이 '''공식 기상관측이래 전무하며''' 이 기록은 '''[age(1901-01-01)]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다만 역대 최고는 아니다. [[1949년]] 8월 16일의 '''38.9 °C'''가 1위 자리를 지키고 있고 8월 하순에서도 [[1943년]] 8월 21일이 '''37.7 °C'''로 살짝 더 높다. 그래도 전체에서도 최고 3위라 순위권 안에 충분히 들어가며, 8월 상순에는 37.5 °C 기록이 '''역대 1위이다.'''] 이 정도로 강하게 지속되었던 폭염이면 서울은 '''38 °C를 넘을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으며'''[* 평균적으로 서울이 인천보다 2도 정도 높아서 이 경우 2018년 8월에 맞먹는다. 다만 1949년, 2002년 등 드문 사례이지만 인천이 더 더운 적도 있기 때문에 인천이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더우면 서울은 인천과 비슷하거나 조금 낮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거의 후술할 [[1943년]]에 맞먹는 8월 중심으로 유난히 중부 지방이 더운 여름이었을 듯 하다. 8월이 지나갈수록 폭염은 진정되는 추세를 보였지만 8월 하순까지 가서도 쉽게 더위가 식지 않아 인천의 최저기온이 20 °C 이상인 날이 많았다. 블로그의 평균기온이 다소 높다곤 하지만 1901년 8월은 실제로도 거의 비슷한 값을 나타냈을 것으로 보인다. * [[1907년]] 여름, [[대한제국]]: [[대구]]에서 관측을 시작한 해부터 뜨거운 여름을 맞이했다. 구체적인 일별 기온은 알 수 없으나, 8월 평균기온이 '''27.2°C'''[* 출처는 '''러시아''' 기상 사이트의 대구 항목이다. 우리나라 기상청에선 1907년 8월의 대구 날씨가 거의 공백인데, 어째서 '''러시아'''에서 이렇게 표기했는지 의문. 아무튼 이 사이트 특유의 오차를 고려할 때 27.1°C~27.4°C 정도.] 를 기록했으며, [[인천]]은 '''25.2°C'''를 기록했고, [[부산]]은 '''26.1°C''', [[평양]]은 '''24.8°C''', [[목포]]는 '''26.0°C'''를 기록했다. 인천의 경우 7월 5일과 6일에 30°C를 기록한 뒤, 18일에는 33°C를 기록했으며, 8월 2일~4일에 31~32°C, 5일에는 '''34.6°C'''를 기록하여 연중 최고 극값을 기록했다.[* 서울도 인천과 비슷했다는 가정 하에 이날에 최고 극값을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다.] [[서울]]은 아쉽게도 '''10월''' 1일부터 기상관측이 시행되어 8월의 날씨는 영영 알 수 없다.[* 서울의 기상 관측소 자체는 '''2월''' 1일에 신설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준비가 꽤 오래 걸린건지 8개월 동안 소식이 없다가 10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그저 옆의 인천 날씨를 간접적으로 참고하는 것과, 이 해 8월의 서울은 절대 시원하지 않았다는 것일 뿐이다. 게다가 일본 본토나 홋카이도 등의 지역 기록에 의하면 8월에는 '''최저기온 평균'''마저 다른해에 비해 유달리 높게 기록되어, 7월은 몰라도 8월에는 북태고가 동북아시아 일대를 강하게 장악한 것으로 판단된다. 역사적으로는 이해 8월 1일부터 [[대한제국]]의 [[대한제국군 해산|군대가 일본에 의해 강제 해산]]되어 이에 항거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일국의 군대가 강제 해산되는 상황이 당시 무더운 여름 날씨와 겹쳐 긴장감은 상당했을 듯 하다. * [[1909년]] 여름, [[대한제국]]: 서울에서 8월 4일에 34.7°C를 기록했고 8일에는 '''35.6°C'''를 기록해서 1909년 연중 극값을 세웠다. 그리고 이 날 서울의 최저기온은 '''25.3°C'''로 열대야를 기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