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푸쭤이 (문단 편집) === [[중일전쟁]] === ||[[파일:부작의.jpg]]|| || 중일전쟁 시기의 푸쭤이 ||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2전구 산하 7집단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15개 사단, 9개 여단을 지휘하여 차하얼 성에서 하북을 병탄하려는 일본군의 측면을 위협, [[베이핑 탈환전]]에 시도했으나 7집단군 전적총지휘 겸 13군 군장 [[탕언보]]의 중앙군이 패퇴한 이후 [[쑹저위안]]과 함께 싸우지 않고 퇴각했다. 이후 수원성과 차하얼이 함락되면서 산서성으로 퇴각했다. 1937년 9월, 일본군이 [[옌시산]]의 산서성을 공략하기 시작하자 산서성 방위를 위한 좌익군에 배치되었고 [[평형관 전투|평형관 함락]] 이후 예비대로 편성되어 타이위안 방어를 시도했지만 [[한푸쥐]]의 적전도주로 낭자관이 함락되고 11월 8일 타이위안이 일본군의 손에 함락되었다. 푸쭤이는 2천명의 잔존병력을 거느려 퇴각했다. [[1939년 동계공세작전]]에서 [[주사오량]]의 8전구에 소속, 8전구 탈환에 참가했으나 일본군의 강렬한 저항에 퇴각했다. 일본군이 여세를 몰아 오원을 점령하자 1940년 3월 20일, 35군을 지휘하여 일본군 마즈카와 고레오 중장을 포함 4천명의 일본군을 전멸시키고 3월 22일 오원을 점령했다. 이에 주몽군 사령관 오카베 나오자부로 중장의 지시로 일본군 26사단과 2개 기병대대가 오원을 점령했으나 푸쭤이는 이들을 재차 격퇴하고 오원을 탈환했다. 1939년 청천백일장을 수여받았고 종전 이후 4개군을 지휘하여 수원성과 차하얼의 구이쑤이, 지닝 등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고 장자커우에 이르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