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필리핀/역사 (문단 편집) ==== 군사 ==== || [[파일:Screenshot_20220102-003010_Quora.jpg|width=360]] || || 모로인들의 갑옷 || 7000여 개의 섬들 사이를 이어주는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한 나라가 나오지 않고 각 지역별, 혹은 섬들별로 여러 국가들이 할거하는 양상을 보였다. 또한 서로 [[해적]]질을 자주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 사이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전쟁이 있었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고, 이러한 점은 스페인이 도래해서 [[가톨릭]]으로 종교적, 사상적 구심점을 만들기 전까지 개선되지 않았다. 반면에, 필리핀 제도의 각 중소국가 간 회의 또는 연합체를 구성하기도 했다는 것으로 보아 서로 교류 내지 동맹을 맺기도 했다. 일본과 같은 섬나라이고 지방분권체제라는 공통점이 있음에도 차이점이 있다면 일본은 열도라 4개의 큰 섬들이 붙어있는 반면, 필리핀 제도는 크고 작은 7000개의 각 섬이 떨어져 있고 제각기 문화권과 [[언어]], [[종교]], [[민족]]이 다르고, 일본은 [[신토]]와 [[천황]]이라는 정신적, 명목상의 하나된 구심점이 존재하였고 [[유교]]의 영향을 어느정도는 받아 때때로 정국이 안정되고 평화기가 도래했던 반면, 필리핀은 이슬람,힌두교,불교 등 아시아의 메이저 종교들에다 애니미즘까지 난립하여 서로 상업, 전쟁 등으로 끊임없이 경쟁하던 상태라 그러한 중앙 집권적인 정부가 들어설 요인이 부족하였다. || [[파일:Screenshot_20211122-224340_Chrome.jpg|width=370]] || || [[스페인]]이 오기전부터 16세기 초중반에는 이미 필리핀 전역에서 [[컬버린]],란타카 등을 포함한 크고 작은 화포사용이 보편화 되어 있었다. [[화승총]]도 거래되고 있었고 일부는 화승총을 자체생산하기도 했다. 오래전부터 필리핀은 [[이슬람]] 네트워크, [[포르투갈]]과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었다. || 그러한 연유로 필리핀 제도 및 [[남중국해]], [[스플래틀리 군도]], 인도네시아를 거쳐 [[말라카 해협]]까지 이어지는 이곳은 다국적 해적들 사이의 전쟁이 일상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필리핀 해적들로 인해 포르투갈 상선들도 털린 기록이 남아있으며, 한 스페인 관료는 필리핀인들이 [[아이언 우드]]로 만든, 좌우에 윙을 달고 화포를 탑재한 가볍고 견고한 군선을 극찬한 기록이 있다. 또한 당시의 토착검술 중 [[이도류]]검술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스페인]] 검술가들의 손을 거쳐 변해서 오늘날까지 전해지며 [[칼리 아르니스]]라고 불린다. 서구에서는 인기가 높은 무술이다.[* 2010년작 영화 [[아저씨(영화)|아저씨]]에서 [[원빈]]이 사용하는 무술이다.] 사용되는 칼들은 인도와 동남아, 아랍식 등 다양하지만 검술 그 자체는 칼을 들고 싸우는 전통 [[무에타이]]인 [[크라비 크라봉]]과 비슷하다. 그 안에서도 실전적인 동작들만 가져온 것과 같다. || [[파일:20220107_115703.jpg|width=360]] || || 토착 아웃리거 군선들의 스페인측 기록화. [[아이언우드]] 재질이었고, 길이는 10m~30m.[* 길이가 30m, 폭이 6m 이상인 것들은 주앙가(Juanga)라 불렸다. 이런 것들은 첨저선으로 원양항해와 소규모 무역선으로도 많이 이용되었으며, 중동까지 갔다고 추정되지만 [[마다가스카르]]까지만 문헌으로 발견되었다.] 속력은 시속 15노트(knot)에 달했다.[* 높이가 낮아 군선이 가벼운데다 노가 많이 달려있고 큰 돛까지 달아 일본 [[세키부네]] 보다 1.5배~2.5배까지 빨랐다.] 화살을 막는 방어자재들을 달았고 승선인원은 40명~200명이었다. 속도가 빠르고, 선회력이 좋고, 높이가 매우 낮아 여러 척이 각자 변칙 각도로 빙빙돌며 적선에 접근하기 시작하면 원거리에서 정밀타격은 매우 어려웠다. 각도 조절이 용이한 선회식 화포는 1~5문으로 달았는데, 빠르게 접근해 적선박 최하단부를 격발하면 침몰이 100%였기 때문에 [[네덜란드]][* [[술루 술탄국]]을 공략하다가 해전에서 패배. [[80년 전쟁]]때도 필리핀 도독령과 해전을 벌이다 토착 군선들에 호되게 당하고 5번 패배했다.],[[영국]][* [[술루 술탄국]]을 공략하다가 해전에서 패배.],[[스페인]][* 이슬람계 토착 상업왕국들과의 대규모 해전에서 패배, 필리핀 도독령 설립이전 5번의 원정 실패, 그 중 몇 번은 해전으로 추정] ,[[포르투갈]][* 필리핀 도독령 설립이전 루손인 용병단의 지원을 받은 남중국해 이슬람 함대와의 전투에서 격퇴당함.]함대들도 모두 여기에 당했다. 스페인은 필리핀을 정복하고나서 해안방어에 사용하였다. || 또한 필리핀 제도는 일본 열도에서 온 [[왜구]]들이 [[동남아]]로 갈 때 통과하던 경유지점이기도 했다. 지리상 필리핀은 동아시아에서 동남아로 가는 중간지점에 있고, [[대만]]은 중국정부의 일본인에 대한 [[쇄국]]정책의 입김이 미치던 곳이라 접촉하기 용이하지 않을 때가 많았고, 상대적으로 무역등에 있어 자유롭고 여러 민족에 개방적이던 필리핀 제도에서 중국 [[화교]]들이 많이 거류하던 팡가시난에 옛날부터 일본인들도 거류하고 있었다. 실제 후기 왜구들은 중국인, 동남아인, [[포르투갈인]] 등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 활동무대가 [[동남아]], 중국 해역, [[한반도]][* 한반도 왜구들은 열도와 가깝기 때문에 대체로 일본인들로만 구성되어 [[대마도]]를 경유해 왔었다.]까지 기록이 다양한 곳에 드러난다. 다만, 일본 왜구들또한 개방항구인 필리핀 마닐라를 경유해 동남아에 진출한 아시아의 여러 용병집단 중 하나였을뿐 유럽의 [[바이킹]],[[카탈루냐 용병]] 마냥 압도적인 위용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어느 지역을 점령하여 영토로 삼지도 못하였고 동남아산 보물들을 악명높게 잘 약탈하고 다니는 집단들도 아니었다. 유럽 또는 동남아시아 기준으로 특출날 정도로 우수한 검객집단들도 아니었다. 일본 왜구들은 [[베트남]], [[마카오]], [[필리핀]] 등에서 쉽게 제압 당한 바 있고 [[말라카]],[[마닐라]]등 개방 무역항에서 아시아의 다른 다국적 용병들을 누르고 호위병으로 발탁된다거나 하는, 알려진것 보다는 강한 포스가 발견되지 않는다. [[시암]] 왕가에서 고용한 바 있는데 이 또한 왕실에 고용된 여러 아시아의 다국적 용병들 중 하나였을 뿐이고 [[바랑기안 가드]] 마냥 독점 고용의 형태는 아니었다. [* 당시 기록에 성질은 대체로 모난 편이라 물불 안가리고 다른 다국적 용병들과 매번 부딪히는 경우가 많아 매번 항구에 입장할때 [[카타나]]를 미리 압수해두면 얌전해 졌다고 한다.] || [[파일:Philippine Blades_Google.jpg|width=370]] || ||개개인의 검술 스타일에 따라, 전장에서의 포지션에 따라 선호도에 맞춰 검의 모양과 크기를 맞춤 제작하던 전통이 있었던 전문 칼잡이들이였다.|| 해적활동 이외에도 각 국가들의 군대는 [[말라카]], [[동티모르]], [[시암]], [[미얀마]], [[브루나이]] 등에 금전을 지불받고 [[용병]]으로 고용된 기록이 남아있다. 군사 활동영역은 동남아 최서단, 최남단, 중국남부 등 동남아 전역과 동아시아 일부에 걸쳐 있었다. 일본 [[왜구]]들과 활동을 같이 하기도 했으며 마닐라, 톤도 왕국 군대가 왜구들과 함께 태국 [[시암]] 왕가와 [[미얀마]] 사이에 전쟁이 있을때 [[용병]]으로 고용된 기록도 있다. 일본 본토의 [[아시가루]]들의 월 봉급이 1칸 55유이었고 필리핀은 금,은,보석을 지급하고 이외의 다른 금속화폐는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당시 화폐차이를 가늠할 수 있다. 또한 일본 무사계층들이 당시 목숨을 걸고 동남아에서 지속적으로 용병으로 활동한것은 돈을 얻기 위함이었다. 각 왕국의 군사동원력은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나 당시의 기록을 토대로 추정하면 막탄 섬의 소영주였던 [[라푸라푸]]가 [[마젤란]]의 200여 명의 스페인군을 상대로 막탄섬 방어에 동원된 병력이 대략 1000~1500명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중근세 스페인 군인들은 유럽 최강이라 불렸고 최소 100여 년간은 패배가 거의 없었다. 그리고 때때로 두 배에서 10배에 가까운 적을 상대로도 승리하였다. 800여 년간 이슬람군을 상대로 [[레콩키스타]] 전쟁을 수행하여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전략,전술 뿐 아니라 병사들 개개인의 전투능력도 유럽 최강의 기량을 드러냈다. [[테르시오]],[[카탈루냐 용병]],카가얀 전투, 안드레 페소아(Andrea Pessoa) 선장의 해전 등 당시의 군사적 활약상을 엿볼 수 있는 기록들이 많다.][* 무엇보다 스페인 [[콩키스타도르]]들은 필리핀에 오기전에 신대륙에서 고작 몇백명으로 무쌍을 찍고 인디언 문명 3개를 정복, 멸망시킨 군인들이었다. 이는 단순히 전투력이 뛰어난 것을 넘어선 것이다.][* 스페인은 마젤란의 첫번째 원정 실패를 포함하여 50년간 공식적으로만 6번의 필리핀 원정대를 파견하였다. 포르투갈도 필리핀 지역의 이슬람 함대에 격퇴당한 적이 있는 것을 보아 이는 신대륙과 달리 필리핀 정복과정이 꽤나 어려웠음을 뜻한다.] 막탄섬은 매우 작은 섬인데, [[세부]] 왕국 전체의 군사 동원력은 막탄 보다 최소 몇 배에서 십수 배 이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대략 [[센코쿠 시대]] [[다이묘]]들과 비슷한 병력동원력을 유지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금전을 더 많이 사용시 정글에 사는 [[네그리토]] 궁수들 까지도 추가로 고용할 수 있었다. 각 왕국들의 용병활동 기록이 동남아 역사 전체에서 발견되지만 전면전 기록은 별로 드러나지 않는데, 국제 무역관계로 인해서인지 전면전은 지양하는 경향이 컸던것으로 보인다. [[용병]]업,해적 활동 이외의 방어전에서는 군사력이 온전히 발휘되는 [[병영국가]]의 모습이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상업왕국인 [[술루 술탄국]]의 군사동원력은 식민통치 말기 기준으로 15만명이었다. 330여 년간의 인구증감율을 감안하더라도 일개 지방으로써는 큰 수치이다. 1405년 [[영락제]] 때 [[명나라]]가 군대를 파견해 침략을 시도한 적이 있다. [[정화(명나라)]] 수군 도독의 대규모 해상원정 시기와 일치한다. 확실한 것은 [[마닐라]]지역이 일시적으로 함락되었고, 점령후 얼마간은 지방관을 파견했다고 되어있다. 이후에 대한 역사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십수년 뒤의 기록을 살펴보면 힌두교 세부왕국과 마긴다나오 사이에 전쟁을 계속 하고 있는 등(...) 건재한 모습을 보여준다. [[바이바이인]] 문자는 계속해서 사용되고 있었고 필리핀의 여러 왕국들의 해상활동도 꾸준하게 발견된다. 150여 년 후, 스페인 도래시기에도 상업으로 번성하여 건재함이 발견되는 바. 즉, 명나라의 필리핀 정복 시도는 실패하였다. || [[파일:Visayan armors.jpg|width=370]] || 대부분의 바랑가이들은 무기 이외의 방어구는 각종 재료들을 가공한 갑옷들을 제작했다. 스페인 원정대 생존자인 [[안토니오 피가페타]]의 기록엔 다양한 재료[* 상어가죽, 코끼리 가죽, [[흑단]], [[대나무]], 밧줄, [[아이언우드]] 껍데기 등등]와 여러 방식으로 가공을 거친 갑옷들은 상상외로 단단하고, 창이나 단검으로 찔러도 꿰뚫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유럽 최고의 스페인산 강철이 필리핀 갑옷에 통하지 않았단 얘기. 갑옷들은 철이 아닌 만큼, 뜨거운 햇빛에 거의 가열되지 않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중갑옷은 팔꿈치와 무릎까지 내려온다고 되어있다. 현재 대부분 썩어서 남아있지 않으며, 경갑옷은 일부 몇개 남아있다. 스페인 [[마젤란]] 원정대가 왔을때 모두 오지 원주민 마냥 헐벗은채로 싸우는 것으로 묘사된 기록화들은 모두 허구이다. 다만, 실력 좋은 자신감있는 전사들은 더 큰 민첩성을 위해서 갑옷을 벗고 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투 이외의 평상시에는 금으로 만든 칼집이나 손잡이, 각종 장신구를 착용한 평상복 차림으로 외국 무역선들을 [[의전]]하였다. 금으로 장식된 필리핀 [[검]]은 당시 필리핀과 무역을 하던 일본에서 골동품 유물로 발견되기도 했다. || [[파일:Gift for masamune_Chrome.jpg|width=440]] || || [[센다이]] 지방 [[다이묘]]인 [[다테 마사무네]]의 [[유품]]으로, 이 금 장식이 된 검들은 필리핀에서 센다이 사절단에게 판매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