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필리핀/역사 (문단 편집) === 식민지배 후반기(18세기 후반 ~ 1896년) === 1815년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해 나왔다. 반면, 필리핀은 스페인 식민지로 남음으로써 정치외교적 문제로 인해 태평양으로의 바닷길이 적자가 나기 시작하였다. 250년 가까이 있었던 갈레온 무역이 쇠퇴해 가면서, 스페인은 이곳에서 아시엔다(Hacienda) 라는 [[플랜테이션]] 제도를 도입했다. 이는 이전시대의 엔코미엔다 제도 보다도 조금 더 민주적인 모양새로 변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토착 왕국들은 모두 도독령에 흡수되었고, [[노예제]]가 폐지된 이후 지배층들의 소규모 반란들이 모두 진압당하면서 기존 지배층들의 권력은 박탈되었지만, 대다수의 자영농들은 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고, 아시엔다 제도로 상품작물로의 전환으로 많은 소득을 얻게 되었다. 이전시대의 대농장들이 식량생산 위주 였다면, 이때부터는 주로 [[설탕]], [[담배]], 아바카, 직물 등 고수입 상품작물 위주의 대농장들이었다. 필리핀 식민지 초기와 달리 중후반이 되면서 세율이 올라가는 등 전형적인 착취가 강화되어가긴 했지만 당시 경제가 꽤 좋았고, 스페인 제국의 금화, 은화로 임금을 지불받았으며, [[사유재산]]은 어느정도 보장된 사회였다. 이렇게 18세기 말 플랜테이션이 시작되면서 스페인인[* 스페인인도 두 종류가 있는데, 본토 출신은 '페닌술라레스', 식민지 출신은 '인술라레스'나 '크리오요'라고 각각 불렸다.], 현지 인디오들과 스페인 혼혈인 [[메스티소]], 현지 인디오들과 중국 혼혈인 [[상글레이]] 중에서 부유한 사람들은 적게는 수 만평, 많게는 수억 평을 가진 대농장을 경영하게 된다. 대체로 이들은 대지주층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그 경제적 기반은 대개 지방에 있었다. 경우에 따라 사모작까지 가능한 기후로 인해 그 농업 생산량은 엄청난 것이었다. 20세기 초반 시작된 [[공산주의]] 열풍으로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대지주들이 [[토지개혁]]으로 모두 재산이 몰수된 반면, 이들은 스페인 제국시절 형성되어 21세기 초 현재까지도 명맥을 잘 이어나가고 있다. 또한 부패 수준이나 정치 비자금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후술될 일루스트라도스 지식인 계층을 겸하기도 했다. 또한 이들은 스페인 식민 말기에 다른 일루스트라도스들과 다르게 중남미나 스페인으로 떠나지 않았다. 또한 16세기부터 시작된 유럽식 대학설립의 결과, 여러대에 걸쳐 형성된 일루스트라도스(ilustrado. [[스페인어]]로 "배운 자들", "지식인들")라고 부르는 엘리트 지식인계층이 생겨나게 됐다. 18세기말에 전근대 치고는 나름 두텁게 형성되었고 이들은 대체로 중산층에서 상류층을 포괄했고 지방 지주들을 제외하면 대체로 기반은 도시권 있었다. || [[파일:Screenshot_20211120-194347_Facebook.jpg|width=400]] || || 선출된 일루스트라도스 대표들의 회의. 지주, 전문직, 상공업자, 자본가 등 다양한 직업군에 종사했고, [[크리오요]], 혼혈 및 인디오도 다수를 차지하는 등 인종적 다양성이 존재했지만 근대식 교육을 받은 대졸자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같은 제국 내의 [[라틴 아메리카]]지역과 인구 전출입이 적지 않았고, 필리핀에서 대학 졸업 후 멕시코에서 활동하기도 하고 역으로 이민오기도 했다. || [[파일:Mestizos and Indios.jpg|width=350]] || 이 무렵의 [[메스티소]], [[인디오]] 여성들 || 일부 일루스트라도스 계층은 자식들을 스페인으로 유학시켜가며 스페인에 대표를 보내 식민초기와 같은 폭넓은 자치권과 권한을 요구했으나, 식민지내 중앙집권화를 추구했던 스페인은 한결같이 그들의 의견을 무시할 뿐이었다. [* 스페인의 세계패권은 오래전 끝났고 바다에서의 해군력은 이전만 하지 못해서 영국 해군에게 마닐라가 몇 년간 점령당한일도 있었다. 애초에 영국의 마닐라 점령 의도는 아시아 태평양 무역로 장악이었다. [[라틴 아메리카]] 또한 그들의 독립 움직임들이 노골화된 상태에서 지구 한 바퀴를 돌아야 하는 갈레온 무역로 또한 필리핀인들 입장에선 매우 불안해 보이는 상황인데다 적자가 나는 등 이익이 시들해진 상황이었다. 스페인은 더이상 다른 열강으로부터 필리핀을 제대로 지켜 주지도 못하는 데다, 다음시대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지 못한채 고세율과 충성맹세만 강요하는 스페인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새로운 길을 열어야만 하는 필리핀간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결국 일루스트라도스 계층은 분노하며 '필리피노스'라고 자칭했는데, 이것이 필리핀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단어로 쓰면서 [[민족주의]]가 생겼다. 한편으로는, 일루스트라도스들이 정치를 주도하던 필리핀은 19세기 초중반 특수를 누렸고 아시아에서 가장 근대화된 국가에 속했다. 18세기 말, 스페인 제국이 세계적으로 힘을 점점 잃어가던 시점 [[대영제국]]은 [[산업혁명]]을 성공시키며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영국 및 유럽에서 원자재 수요가 급증하자, 당시 필리핀 53대 도독이었던 바스코 총독과 일루스트라도스들은 마닐라를 아시아 지역의 원자재 중계무역로 및 화물집산지로 영국과 연결시킨다. [[대서양]]과 [[태평양]] 루트를 모두 열고자 했던 영국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영국의 [[광저우]]를 통한 중국과의 무역에 있어서 필리핀이란 중계무역로는 중요한 곳이었다. 1834년, 필리핀은 스페인에 의해 막혔던 나머지 필리핀 항구들 또한 모두 개항해 필리핀을 공식적인 [[자유무역]] 지대로 설정하면서 아시아, 유럽, 북미에게 모두 개방한다.[* 19세기 초부터 많은 청나라 사람들이 이민을 오기 시작한다.] 그렇게 유럽보다 값싼 아시아 전역의 원자재들이 통과하는 중계역할을 하게된다. 또한 필리핀은 여러 서구자본 및 서양기술들을 유치시키며 초기 산업화를 성공시켰고, [[설탕]], [[커피]], [[섬유]], [[담배]], 직물 등 고수익 상품작물들을 공업화된 플랜테이션에서 재배하여 유럽에 대량 수출하는 공급자 역할을 했다. 커피는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생산을 했고, 담배는 필리핀이 [[전매]]에 들어가 많은 수입을 얻었다. 필리핀은 유럽으로부터 생산된 여러 제품들을 수입했고 또는 이를 다른 동남아,중국,일본 등 아시아 국가들에 중계무역을 함으로써 차익을 남겼다.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가 열리며 [[아편전쟁]]에서 완전히 승리하여 중국시장의 각종 규제가 철폐되어 무역이 확대되고 곧이어 [[수에즈 운하]]가 완공되면서 무역거리와 시간이 단축되자 수출입이 더욱 촉진된다. 필리핀에 건축붐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철도]],[[증기선]],[[트램]] 등 여러 운송수단과 [[사회간접자본]]이 많이 확충되면서 당시 유럽언론으로부터 '동양의 [[프랑스 파리|파리]]' '아시아의 [[진주]]' 라는 수식어구가 따라다녔다. 이 시기에 유럽,미국,스페인,필리핀,라틴 아메리카에서 발행한 다양한 종류의 금화,은화가 필리핀에서 통용되었다. 1865년 설립된 영국계 다국적은행 [[HSBC]]은행은 1875년에 필리핀에 지점을 설립한 이후 지금까지 영업하고 있다, 1851년 필리핀 현지 자본에 의해 설립된 BPI은행 또한 당시 많은 자본을 운용하였고 필리핀이 몰락한 현재도 아얄라 가문[* [[메스티소]] 계통이다.]이 대주주인 필리핀 내 주요은행이다. 18세기 말부터 [[미서전쟁]]까지 필리핀은 [[유럽]]과 [[동남아]], [[중국]], [[북미]] 사이에서 120여 년간 [[자본]], [[원자재]], [[소비재]], [[사치재]]와 여러 밀무역품의 중심적인 중계무역로였다.[* 당시 중국은 혼란스러웠고, 조선은 쇄국상태였으며 일본은 이제막 [[메이지유신]]에 접어들어 아시아 경제의 중심축은 아직 서구자본이 많이 미치지 않은 내륙보다는 대륙에 가까우면서도 해양 한가운데 있던 필리핀이었다. 이 당시의 [[지하경제]]와 밀무역은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고 어떤 물품들이 세세하게 오갔는지도 전부 파악 할 수 없다. 지금처럼 투명한 [[세관]]도 아니었었고 [[금융실명제]], 실시간 시스템 전산화를 바탕으로한 [[자유무역]], 시장경제체제가 이루어진 시대도 아니기 때문에 얼마만큼의 자본이 거쳐 갔는지도 알기 어렵다.] [[파일:Screenshot_20211121-224237_Google.jpg|width=400]] || 19~20세기 필리핀에서 발행된 금화 || 식민지시대 중반을 넘어가며 필리핀은 치안을 위한 보병위주의 군대 이외에는 고급무기를 대량으로 보유할 수 없었던, 식민지로써 군사력이 엄격히 약화된 상태였기 때문에 경제력에 비해 군사력이 비대칭 상태였다. 특히나 해군력은 이 시기까지도 스페인에 완전히 의존한 상태였고, 독자적인 해군력을 보유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태는 미국 식민지를 거치면서 반세기 이후 [[태평양 전쟁]] 시기 까지도 이어진다.[* [[진주만]]의 [[미군]]들이 [[선전포고]]도 하지않은 [[일본제국]]에게 기습공격 당해 궤멸당한 후, 미국 식민지라는 구실로 9시간 후에 필리핀도 공격 당한다.] 세계패권이 스페인에서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넘어가고,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하게 되면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구화된 필리핀이 무역로의 희소가치를 점점 잃어가게 되고, 또한 20세기가 가까워 지면서 [[미서전쟁]] 등 세계 정국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등 외교적으로 여러 복잡한 과정을 겪게된다. 이러한 과정속에 여러대에 걸친 아메리카 및 스페인으로의 일루스트라도스 고급인력과 자본유출은 뼈아픈 과정이었다. 현 [[스페인]] [[왕비]]인 [[레티시아 오르티스 로카솔라노]] 또한, 외할머니가 스페인으로 역이민한 일루스트라도스 계층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