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필리핀/역사 (문단 편집) === [[필리핀 제도 도민정부|필리핀 제도 도민정부 (1901~1935)]] === 아기날도 체포를 기점으로 필리핀의 저항은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미국은 필리핀에서 실시하던 군정을 민정으로 전환하여 [[필리핀 제도 도민정부]]를 수립하였다. 도민정부가 수립된 이후 미국은 1907년 의회 선거를 실시하고 1914년 양원제 의회를 도입했으며 [[영어]]를 널리 보급했다. 그 의도에 관해서는 민족의식 희석을 위한 것이라는 말이 있다. 혀튼 현재 필리핀에서도 스페인어는 거의 안 쓰이는 편이라 한다. 스페인어의 잔재는 사람 이름과 숫자, 지명 정도이다. 1902년 [[미국-필리핀 전쟁]]이 끝난 후 필리핀은 신흥강자인 미국의 영향 아래 완전히 놓이게 되고 필리핀에 정국혼란이 찾아와 정치구조가 지방 대지주들 중심으로 개편되기 시작한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유럽]]이 쑥대밭으로 변하고 영국을 위시한 유럽 또한 혼란스러운 상황이 지속되다가 [[2차 세계대전]] 또한 발발하면서 필리핀에 많은 이익을 가져다 주었던 중요한 무역파트너를 잃어버린다. 1912년 [[우드로 윌슨]]이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고 여러 이익 관계와 세계 정세가 변하면서 필리핀을 대하는 미국의 정책도 변화하게 되었다. 윌슨의 민주당 정권은 필리핀 독립에 긍정적이었다. 필리핀을 관할하는 공공업무를 빠르게 필리핀인들로 대체하는 한편, 필리핀 상원을 발족시켜 입법권한을 나누어주었다. [[1918년]]에는 필리핀 독립위원회가 수립되어 필리핀인들이 미국을 상대로 로비를 벌일 수 있게 되었다. 1934년에 자치법안이 통과되었고, 1935년 [[필리핀 자치령]]이 수립되었다. 자치령 대통령 선거에서 첫 대통령인 에밀리오 아기날도와 케손이 맞붙는 구도였는데 선거에서 케손이 압승을 거두었다. 케손은 타갈로그어를 영어와 함께 공동 공용어를 지정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고, 1941년 대선에서 81.7%라는 압승을 거두어 재선에 성공했다. 이후 세계 [[대공황]]까지 발생되면서 중계무역로로써 기능하던 필리핀 경제도 영향을 받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