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필리핀/역사 (문단 편집) ===== [[마닐라]]-톤도 왕국 ===== 북부 [[루손]]섬의 [[마닐라]](톤도)왕국은 그 시작은 인도계 국가였으나 중국과의 많은 교류를 통해 중국문화의 영향도 많이 받았으며 오랜 전통을 가진 국제중계무역항 이었다. 스페인인들이 도착했을때 도시의 화려함에 감탄했던 기록이 있다. 필리핀 제도 지역내에서 중국과의 정기무역(공무역)권을 오랜시간 독점하고 있었고 중국정부와의 무역이 2년에 1회로 허락되었다.[* 일본 막부가 대략 11년에 1회였던 것에 비하면 꽤나 준수한 편이다.] 이곳은 중국이 혼란스러웠던 당나라 이전시대부터, [[당]],[[송]],[[원]],[[명]] 등의 통일국가들이 들어서서도 무역권을 갖고 있었다. 이후에는 [[이슬람]]과의 무역을 확대하고자 [[브루나이]]의 영향을 받아 마닐라국왕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기도 한다. [* 마닐라는 [[남중국해]]의 여러 상업,해적 세력들중 [[베트남]] 등과 함께 중국과의 정기무역권을 가진 몇 안되는 세력이었다.] 톤도 왕국과 나마얀, 카인타 등 규모있는 [[공방]]들을 가진 부유한 바랑가이들이 영향권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왕도 아닌 일개 바랑가이 지도자들로 추정되는 유골들이 각종 귀금속 공예품들과 함께 발견된다.] 아시아 각국에서 명나라로 [[조공]] 무역을 할 때 마닐라-톤도는 [[유교]] 문화권이 아니여서 황실 알현 순위는 결코 높지 않았다. 1371년부터 1567년까지 명나라에서 조공무역 이외의 사무역을 금하는 [[해금령]]이 있었고 대부분의 다른 아시아의 상인들이 거대 시장인 중국과의 무역로가 차단되어 포기할때 마닐라-톤도는 팡가시난과 함께 밀무역로를 개척했던 거의 유일한 세력이다. 마닐라-톤도는 팡가시난 즉, 오늘날의 일로코스 지역과 영향권이 겹쳤고 이들과 결탁하여 [[광동성]],[[취안저우]],[[푸젠성]] 등 남방 거대도시들과 교류한 전문 밀수업자들이였다. 그로인해 스페인이 오기전부터 [[중국]]과 [[동남아시아]] 시장, 스리랑카, 벵골 만 까지를 잇는 이른 바 '향신료 루트'의 무역 헤게모니를 장악하였다. 특히 이들은 해금령이 내려진 후 동남아, 남아시아 무역시장에서 중국 상품들을 대규모로 공급하고 남방의 무역품들을 중국에 밀수출하던 유일한 세력이였고 동남아 여러 도시들에서 얼굴은 다르지만 '중국인들'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실제 이들과 결탁한 일부 일로코스인들은 중국인과 외모가 흡사하거나 많은 이들이 혼혈이다. 필요할땐 일본 왜구들을 스폰서하였는데, 금이나 은을 주고 고용하여 사략함대를 보내거나 직접 일본계 갑옷으로 무장하고 '가왜'라 불리는 일본 왜구인척 하는 해적이 되어 적은 병력으로 명나라 국토를 유린했던 대해적들이였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히 [[영락제]] 시대 [[정화(명나라)]]의 필리핀 원정 이후에 있었던 일이다. [[중국]], [[중동]], [[인도]], [[미얀마]], [[크메르]], [[말레이]], [[인도네시아]],[[베트남]],[[캄보디아]],[[브루나이]],[[일본]] 등과 광범위한 무역루트를 형성했을 뿐 아니라 해외 각국에 상인들을 진출시켜 영주하게 하여 무역 카르텔을 형성시키고 동남아 전역의 왕실들 그리고 각국의 민간 상단들에서도 항해사,관료,용병,상인,해적,선주,지주로써 활동하였다. 특히 중국으로 가는 길목이자 루손인들의 아지트인 [[루손섬]]을 주요거점으로 하여 [[말라카 해협]]에 대규모 상단을 영주시키고 [[스리랑카]]와 깊이 교류하여 인도-중국 시장 사이를 잇는 중계무역에 종사하였다.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기 이전의 포르투갈 기록에 루손인(Luzones)들은 동남아시아 각국과 상업적 이해관계와 군사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나 많은 이익이 몰리는 길목인 [[말라카 해협]]의 대규모 무역업자이면서도 그곳의 정치 및 경제,군사 문제에 루손인들이 외국인으로써 깊숙히 개입하고 있었음을 목격하였다. 또한 당시 보고서 기록에 루손인들은 '가장 호전적이고 용감합니다.' 및 '선구적인 항해사들' 라는 묘사가 있고 실제 포르투갈 본국에 보고된 문서에도 기록되어있다. 포르투갈은 많은 루손인들을 고용한 기록이 있다. 서양사 학자들은 루손인들이 [[대항해시대]]때 동남아의 무역허브인 말레이 제도에 진출한 모든 동양 문화권의 상인들 중에 실력으로써 가장 높이 평가되는 용병이자 상인이었다고 여러 번 제안하였다. [[고대]] [[타갈로그어]]는 무역허브이자 당시 다문화 국가였던 [[말라카 술탄국]]에서 쓰이는 80여 개의 언어 중 하나였고 포르투갈은 루손인들로부터 가장 깊은 인상을 기록하고 있다. 포르투갈은 스페인 도래이전에 루손인들의 해양 활동상의 증인이자 직접적인 수혜자였다. [[말라카 술탄국]]에 루손인(Luzones) 출신의 선구적인 [[항해사]]들과 상인,관료,지주들이 많이 존재했고 말라카(말레이시아)가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고나서도 루손인들은 말레이에서 주요관직을 차지하고 행정을 담당하였다. [* 많은 루손인들이 포르투갈의 항해사 또는 선원으로 활동했고 포르투갈이 중국에 최초로 사절단을 보낼때 루손인들과 그들의 배도 동행하였다. 또한 이것은 현지에 파견된 포르투갈인들이 직접 본국에 루손인들을 추천한 결과였다.] 루손인들은 많은 말레이 배들의 선주들이기도 했다. 또한 포르투갈 식민지인 말레이에서 땅을 임대하여 지주로 활동하기도 했다.[* 단적인 예로 Surya Diraja라는 한 루손인 상인은 포르투갈에게서 임대한 땅으로 경영을 하여 중국에 매년 175톤의 후추를 수출했고 포르투갈에 9000 cruzados 금화를 지불했다. 즉, 포르투갈 영토의 식민지 경영자로 고용된 셈이다.] 포르투갈이 중국으로부터 [[마카오]]를 하사받고 일본과의 교역을 트는데 루손인들이 항해사와 상인, 교섭자로 도움을 주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여 포르투갈은 16세기 중반 마카오에 기반을 세우고 나서 루손인들에게 감사를 표한 기록이 남아있다. 용병활동 또한 광범위하여 [[미얀마]],[[태국]]이 서로 전쟁을 벌일 때 양측 왕실에서 이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였다. 포르투갈이 필리핀 해적 또는 이슬람 함대와 해전을 벌이고 패전했을때 적선에 많은 루손인 용병들이 타고 있었다. 말레이시아가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었을때 전 말레이 왕족이 루손인 용병단을 고용하여 함대를 이끌고 나타나 말레이를 탈환하려고 했다. 브루나이 함대를 이끌던 사령관도 루손인이었고 [[이집트]] [[카이로]] 총독이 인도네시아 [[아체]]를 점령하려고 [[수에즈]]에서 출항시킨 함대로부터 아체를 방어할때도 용병으로 구성되었다. 이처럼 대항해시대 이전부터 루손인들은 국제적으로 활동한 상인이자 용병단이었다. 활동 반경이 넓었으며, 실력으로 인정받아 일단 돈이 되면 진영과 종교,국가를 가리지 않고 고용되었다. 스페인측 기록에는 이전에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금을 정교하게 다루는 상인들이라 기록되어 있다. [[말라카 해협]],[[남중국해]],필리핀 제도, [[벵골 만]], [[스리랑카]] 까지 주요활동 무대가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