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후연 (문단 편집) === 긍정적 평가 === 부정적 평가의 내용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우선 [[관도대전]] 이전에도 [[오자양장]] 중 [[우금]]과 [[악진]], [[서황]]은 이미 조조군에 있었으며 [[조조]]를 수행하여 여러 전쟁에서 공을 세운 바 있다. 동 시기에 조조의 친족 장수들은 맡은 역할이 다른 무장들과 상이한 부분이 있다. 하후돈은 동군 태수이자 복양의 수비를 맡고 있었고, 하후연은 진류와 영천 태수였으며 조인은 광양 태수를 맡고 있었다. 이는 군재의 문제를 따지기 이전에 조조는 자신의 영지의 태수 자리를 친족들에게 맡기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으며, 친족 무장 4명 중 조홍만이 태수를 맡지 않고 있었다. 이중 조인의 경우는 조조가 용략을 높이 평가하여 태수로서 군에 두지 않고 기병을 지휘하게 하였기 때문에 하후연보다 조인의 군재가 뛰어났음은 알 수 있지만 그것이 하후연이 군재를 뽐내지 못했다는 평가로 이어질 수는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태수로써의 역할은 직접 공격전에 나서는 무장의 역할 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 없으며 이를 잡다한 일을 맡아 수행한 것으로 이야기할 수도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동 시기 [[하후돈]]의 전투 관련 기록이 더 많은 것도 이해할 수 있는데 [[장막(삼국지)|장막]]과 [[여포]]가 기습한 곳이 다름 아닌 복양이었기 때문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 [[관도대전]] 시기의 하후연이 후방 안정과 보급을 주로 담당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선 후방 안정과 보급이 중요하지 않다는 발상 자체가 잘못된 생각. 특히 보급의 경우 하후연이 보급을 보내 군이 분발할수 있었다는 기록이 남았을 정도로 잘 되었는데, 상당한 공으로 볼 수 있다. 참고로 관도대전 당시 원소군 내부에서 장수로서 가장 급이 높았던 순우경이 했던 일이 군량고 호위이며, [[제갈량의 북벌]] 때 보급을 전담했던 것은 2인자인 [[이엄]]이었다. 그만큼 고대의 전쟁에서 보급은 중요한 문제였다. 물론 하후연이 관도대전의 보급의 총책임자는 아니었으나, 관도대전 이후 연주, 예주, 서주 3개주에서 군량을 징수해서 전방에 보급했을 정도로 큰 영역을 담당했고, 이를 아주 원활하게 해냈다는 것이 별도로 기록되어 있었을 정도. 적어도 상당 수준의 통솔력과 업무능력은 갖춘 인사였다는 뜻이다. 따라서 하후연을 단순히 용맹에만 의존한 무부로 보는것도 지양해야 할 사고 방식이다. 하후연은 내정관으로서도 일했다. 반란군 토벌을 다른 [[명장]]들은 (반란군이 질이 낮아)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야기 역시 사실이 아니다. 주로 후방 수비와 보급을 맡았던 하후연이 처음 공격전에 활약한 것이 다름 아닌 [[창희]]의 반란인데, 원래 창희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장수는 우금이다. 우금은 이미 여포, 장수, 원소와의 싸움에서 전공이 많았는데 이러한 우금이 투입되었다는 것 자체가 반란군 토벌을 별 것 아닌 수준으로 폄하할 수 없는 부분이다. 더욱이 이 전투에서 우금이 이기지 못하자 추가로 투입된 것이 하후연이었다. 그 다음 공격전은 여강의 [[뇌서]]와 이어서 [[상요]]를 토벌한 것이었는데, 정사의 기록에서는 하후연이 제장들을 거느리고 공격을 했다고 나오며 그 제장 중에는 오자양장의 일인인 [[서황]]이 포함된다. 따라서 원소와 비교하면 당연히 이러한 반란군들이 처지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하여 우수한 장수들을 투입하지 않고 그저 그런 장수들로 토벌을 한 것은 아니다. 거기에 당시 조조군은 풍부한 장수 인력층을 가지고 있었고 이런 인재들을 지속적으로 지원해주고 보급해주어 승리를 거두거나 조조 휘하에서 조조의 통솔을 받는 경우가 많았는데 하후연이 장합과 서황을 지원받았다고 해서 하후연의 군재 자체가 폄하받을 일이 아닌 것이다. 또 하후연의 전사 당시 상황을 옹호할 수 없는것은 아니다. [[한중 공방전]]에는 군주 [[유비]], 참모 [[황권]] + [[법정(삼국지)|법정]], 장수 [[황충]] + [[조운]] + [[장비]], 군수 담당 [[제갈량]], 후방 책임 [[이엄]] 등 촉의 초호화 공격진이 투입됐으니, 하후연으로선 변명의 여지가 있을만도 하다. 또한 장합 역시 한중 공방전 당시 장비에게 대패를 당하는 등 전반적으로 촉군의 기세가 매우 강성했다. 당시 상황은 녹각 하나가 불타서 고치러 간 것이 아니라 유비군이 돌아다니면서 사방팔방 공격하며 여러군데서 녹각을 불사르며 날뛰고 있던 상황이었고 하후연 뿐만 아니라 장합도 동원돼서 여러 군데서 치고 들어오는 유비군을 방어하며 녹각 수리와 방어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적군을 상대하려면 실시간으로 정보를 취합하고 합당한 명령을 내려야 한다. 멀찍이 떨어진 안전한 곳에 있다면 위험부담은 적었겠지만 효율은 나쁘고 가까이 있다면 위험부담은 올라가지만 효율이 나쁘다. 게다가 하후연같이 조조군 초창기 거병 시절부터 함께 했던 장수는 당연히 솔선수범 하며 바쁘게 뛰어다녀야 했을거고 이렇게 쌓인 경험과 습관을 나중에 부대 규모가 커진 뒤에도 버리기는 쉽지 않았을것이다. 당시 지휘관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전장에서 목숨걸고 앞으로 나서야만 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는 경솔한 행동이 아니라 합리적인 판단인 경우도 있었다. 하후연이 녹각 보수한다고 나섰던 것도 매우 혼전인 상황이라 총사령관으로 전황을 파악하고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서였다. 하후연에게는 불행하게도 촉군이 그점을 정확히 노리고 있었기에 마지막 전투가 되어버렸지만. 거기에 하필 유비가 장합에 싸움을 걸었는데 장합군이 불리한 상황에서 하후연이 지휘하던 병력의 절반을 나누어 장합을 돕게 한 직후 하후연이 기습을 당한 것이다. 하후연의 패배는 단순히 하후연만 아니라 당시 위군 전체가 얼마나 수세의 입장에 몰려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고, 실제로 정사에 기록된 정군산 전투의 전황을 보면 당시 위군은 [[성동격서]]의 계략에 알면서도 당한 것일 가능성도 있다. 일단 화공으로 적의 주의를 흐트려 놓은 후 정예 단병으로 기습한 것 자체가 법정의 뛰어난 계략으로도 볼 수 있으며, 무엇보다 이 야습으로 인해 장합이 하후연의 본영에 도움을 요청할 정도로 밀리기 시작한 시점에서 이미 위군은 외통수에 몰리고 반대로 유비군에게는 적이 어떻게 나와 주든 그만인 상황이 주어진 것이다. 하후연이 장합에게 구원군을 보내면 실제 역사대로 하후연을 잡을 수 있는 것이고, 보내지 않아서 하후연 기습에 실패해도 그냥 '''고전하고 있는 [[장합]]을 계속 몰아쳐서 패퇴시키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하후연이 장합의 위기를 보고받자 곧바로 자기 병력의 '''절반'''을 원군으로 파견한 것에서 알 수 있다시피, 당시 장합 쪽을 공격했던 촉군의 전력은 단순히 장합의 구원요청을 이끌어내기 위한 수준을 넘어서 하후연의 원군이 없었다면 장합을 충분히 격퇴할 수 있었을 정예들이었다. 만약 하후연이 성동격서 계략에 걸리지 않을 경우, 장합을 격파하여 우위를 점하는 플랜B가 있었음을 어렵잖게 짐작 가능하다. 다만 하후연 대신 장합을 전사시키는 것이 가능했을지는 의문. 하지만 하후연의 병력 절반이라는 기록을 신뢰할 경우 그 정도 규모의 구원군이 가야했고 또 그만큼의 구원군이 빠진 상태에서 싸운 하후연은 패사했을 정도로 상황이 급박했고 난전에서 화살은 상대가 지장인 장합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피해가는게 아닌지라 장합이라도 위태로웠을 것이다. 수년 후 실제로 장합의 사인은 매복에 걸린 결과이긴 했지만 당시 병력의 질이 한중 공방전 당시 패퇴당하는 수순의 위군보다 못하다고 하기 무리인 위군을 이끌고서도 멀리서 쏘는 촉군의 화살을 당시 기준 고령일 때 허벅지에 맞아서였다.] 때문에 이 상황에서 하후연이 유비의 계략을 간파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겠으나, 어쨌든 하후연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결국 장합에게 구원군을 보낸 뒤 자신을 노린 기습을 어떻게든 자력으로 막아내는 수 밖에 없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결과가 좋지 않았으나, 적어도 하후연이 한중공방전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를 골라 고군분투했다는 점은 인정받아야 한다. [[한중공방전]] 문서나 그와 대적했던 [[마초]], [[한수(삼국지)|한수]] 문서를 보면 사령관으로서 하후연이 단순한 용맹만이 아니라 장수로서 예민한 전략, 전술적 감각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장합]]이 사령관이 되자 안정되었다는 부분도, 장합의 능력이 우수했다는 근거는 될 수 있어도 하후연의 존재감이 미미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당장 장합전의 기록을 보더라도 하후연의 전사로 인해 조조군의 사기가 크게 흔들렸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하후연의 사망이라는 것이 분명히 조조군에 영향을 줬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곽회가 장합을 언급하며 군을 수습한 것은, 유비의 언급과 더불어 그만큼 장합의 존재감이 컸다는 것이지 하후연의 존재감이 없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또 [[유비]] 역시 하후연을 잡아다가 어디다 쓰겠느냐면서 투덜거렸지만 정작 [[황충]]은 이 공으로 [[사방장군]]으로 임명되었다. 참고로 하후연은 황건적이나 지방군벌 수괴가 아니라 유비가 주력군을 이끌고 무려 1년간 대치한 조조군의 사령관인 만큼 그냥 넘어갈 전공이 아니다.[* 애시당초 군재가 없었다면 전력도 부족한 상황에서 유비 상대로 이렇게 버티지도 못한다. 조조의 상장들 가운데 단독으로 유비를 감당해서 승리를 거둔 경험이 있는 장수는 조조 친족라인 최고 장수인 조인 정도뿐이다. 그리고 조인도 유비가 온전히 지휘하는 직속 병력이라고 하기는 힘든 여남에서 조조의 배후를 어지럽히기 위해 여남에서 일어난 친 원소 세력 한 갈래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원소와 교감을 갖고 반란을 일으킨 여남 토착세력이 주축인 병력을 격파한 것이다.] 유비가 저렇게 말한것은 아직 한중에서 위군의 세력이 남아 있으니 분발해서 당시 한중에 있는 위군에서 하후연 다음가는 위치이자 위군에서 가장 위협적인 장수인 장합을 잡아야 한다는 독려의 의미로 쓰였다고 보는 게 더 맞을 것이다. 간단하게 생각해서, 정군산에서 하후연이 살아남고 장합이 전사한 상황을 가정했을 때 유비가 과연 '더 무서운 장합을 잡았으니까 하후연 놓친 거는 괜찮다'고 말했을까? 당연히 '부장 따위 죽여서 어디다 쓰겠냐, 총사령관이 아직 멀쩡히 살아 있다'는 식으로 얘기했을 것이다. 조조가 백지장군으로 부르며 하후연의 군재에 대해 비판했단 것도 정도 이상으로 비판한 경향이 있다. 정사 기록에 따르면 강족이나 호인을 접견할 때마다 조조는 하후연을 대동하여 그들을 두렵게 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당장 서북 방면에서 용맹에 의존한 용병술이었다고는 해도 큰 공을 많이 세운 만큼 서북이나 서북의 이민족들에게 충분히 위협적인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총사령관으로써의 군재는 아닐지 몰라도, 위협적인 장수가 아니었다거나 장수로서의 위용을 알 수 있는 부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의 사례로서는 충분하다. 또한 우금이나 악진과 같은 경우도 인물에 대한 칭찬은 조조 본인이 남긴 것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데, 그렇다고 위협적인 장수가 아니었다고 할 수 없다. 이미 여러 전공이 있었던 우금, 악진과 마찬가지로 서북에서 충분히 공을 세운 하후연을 단순히 타인의 평이 적다 하여 위협적인 장수가 아니었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되는 평가라 하겠다.[* 오히려 사방에서 만인지적이라고 칭송받은 촉의 관우와 장비, 손권이나 유비가 걱정하고 꺼렸던 위의 장료와 장합, 조조더러 '저놈이 죽지 않는다면 내가 묻힐 땅이 없겠구나'로 말하게 했고 유비에겐 '마초를 얻었으니 익주는 이제 내 손에 들어왔다'라고 기뻐하게 만든 마초처럼 타국에도 명성이 널리 알려진것이 특이한 경우다.] 사실 이 난리가 날 때까지 조조 본인은 후방에서 한중을 구원하는데 미적거리고 있었고 유비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전력을 투입한데 반해 하후연은 파군에서 장합이 장비에게 궤멸적인 패배를 당해 이미 병력이 부족해진 상황이었음에도, 조조는 218년 9월 이런 사태를 파악하고[* 사실 이미 탕거전투까지 치면 216~217년 사이에는 조조도 상황을 다 파악하고 있었다고 봐야하니 년도수로 따지면 훨씬 더 전에 알았다.] 한중으로 유비를 공격하기 위해 친정을 결의한 후 반년을 장안에서 하후연이 싸우는걸 관망만하며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따라서 분명히 한중전 패배는 하후연에게도 책임은 있는게 사실이지만 이렇게 악조건 속에서 분투한 하후연을 상대로 조조가 하후연이 무조건 잘못했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것 역시 어느 정도는 가려서 들을 필요가 있는것도 사실이다. 물론 조조가 당연히 친인척인 하후연을 아끼기야 했겠지만 그러나 오히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조조는 자기의 실책 일정부분을 오랜기간 같이 다녔던 숙장 하후연에게 떠 넘기고 '걔는 원래 그랬는데 내 말을 듣지 않아 이렇게 된 것이다' 라며 자기 책임을 면피하려 했다는 의구심을 지우기 어렵다.[* 비슷한 예로 [[유비]]가 형주에서 [[손권]]의 뒷치기와 [[미방]]의 배신으로 형주를 잃고 [[관우]]가 전사했을때 관우, 미방의 형 [[미축]]을 책망했는가? 오히려 유비는 배신자 미방의 형인 미축이 자신의 몸을 묶고 죄를 청했을때 오랜 공신인 미축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며 위로하고 존숭하여 대우하길 처음과 같이했다. 그리고 30여년간 같이 다니던 숙장 [[관우]]의 죽음에 울분을 금하지 못하여 [[이릉대전]]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의 냉정한 처신에는 조조가 더 나았을 수도 있지만 인간적인 도리로서 따지면 조조는 평생 자신을 따른 숙장이자 친족이 그를 위해 분투하다 죽었음에도 냉혹하게 그의 죽음을 비하하고 깎아내린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유비가 오와 싸운 건 단순한 감정적 행동이라고만 볼 수 없다. 기세가 솟던 촉이 갑작스럽게 관우와 형주를 잃고 그 기세가 꺾이며 동요가 일자 이런 기색을 가라앉혀야 했고, 공적으로도 형주 탈환 및 오나라의 노골적인 도발을 그냥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이릉대전 결과만 보고 유비가 감정적인 면을 앞세워 부른 화근이라고 무작정 여길 수 없는 일이다.]] 그 하후연을 한중 지역 사령관에 임명한게 조조이고, 더군다나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평소에 하후연이 너무 용맹에만 의지한다고 조조가 충고했다는데, 하후연의 단점이 사실이라고 하면 조조는 이런 단점을 알고서도 임명한 셈이다. 하후연이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조가 "나는 예전부터 현덕이 이 같은 일을 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으니 필시 남의 가르침을 받았을 줄 알았다." 정신승리를 했다는 기록을 보면 조조에게 하후연의 전사는 보통 충격이 아니었던게 분명하고 핑계를 대거나 정신승리를 할 재료가 필요했을 것이다. 용병에 능하지 못하다거나 백지장군이라는 좀 너무한 평은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또 무성왕표나 십칠사백장전과 광명장전 평가도 그렇다. 여기에 나오는 삼국지 시대 인물이 30명도 안되고 무성왕묘엔 중국 4천년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들만 들어가서 훌륭한 공적을 쌓았지만 여기에 못 들어간 장수들도 수두룩하기 때문에 재평가의 기준이 너무 높다. 무성왕묘에 분봉된 인물들만이 명장이라는 논리라고 하면, 삼국시대 인물 중에서는 오로지 제갈량, 관우, 장비, 장료, 주유, 육손, 양호, 왕준, 육항, 두예, 여몽, 황보숭 정도만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절대적인 기준이 아님은 물론이고 이 기준을 적용하면 흔히 삼국시대의 명장으로 이야기되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제외되며 위에서 칭송한 장합도 여기에는 들지 못한다. 광명장전의 경우도 장합, 서황이 들어가는 것은 맞지만 삼국시대 인물은 후한말 이민족 토벌에 공을 세운 단경을 포함시켜도 19명만이 이름을 올리고 있으며 십칠사백장전에도 역시 19명만이 등재되어 있다. 따라서 이는 대단히 불공정한 주장이다. 참고로 이론의 여지 없이 위의 명장이라고 할 수 있는 조인 또한 위에 언급된 무성왕묘 분봉, 광명장전, 십칠사백장전 모두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그리고 이후에도 이전에도 사령관으로서 죽은 건 하후연 뿐이라지만, 당장 조조 자신도 여러 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죽을 뻔한 일이 많았고,[* 우선 동탁을 혼자 추격했다 매복하여 기다리던 서영에게 전멸당해 본인은 조홍의 목숨을 건 호위로 겨우 도망쳤으며, 완성에서는 장수의 숙모 추씨를 함부로 취하고 이를 원망하는 장수를 오히려 죽이려들었다 먼저 선빵을 날린 장수 때문에 아들과 조카, 호위장수를 잃고 도망쳤다. 적벽대전에서는 대패하여 필사적으로 화용도에서 길을 만들어 퇴각했고, 관중 군벌들과의 전투 때는 마초의 급습을 받아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하후돈은 연주 방면의 후방 방어를 맡았다가 [[여포]]에게 [[포로]]로 잡혔으며, 조조의 정예 7군을 사령관으로서 이끌었던 [[우금]]과 [[방덕]]도 관우에게 사로잡히거나 죽임을 당하였고, [[장합]]도 [[사마의]]의 명령을 받고 목문도 전투에서 촉의 복병들이 쏜 화살 세례를 받고 전사했다. 이런 사항을 빼놓고 하후연만 그랬다고 하는 것은 사실에 대한 호도에 가깝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