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후연 (문단 편집) === 관중 평정 === <무제기>에 따르면 [[건안]] 16년([[211년]]) 봄, [[장로(삼국지)|장로]]가 [[한중]]을 점거하니 3월에 [[종요]]를 보내 장로를 토벌했다. 조조가 하후연 등에게 [[삼국지/지명/사례교위부#s-4|하동]]에서 나와 종요와 합류하게 했다. 이때 관중의 제장들은 종요가 습격하고자 하는 것으로 의심하니, 마침내 [[마초]]가 [[한수(삼국지)|한수]], [[양추]], [[이감(삼국지)|이감]], [[성의(삼국지)|성의]] 등과 함께 모반했다. 한수를 정벌하는데 수행하여 위남에서 싸웠으며 [[주령]]을 이끌고 유미, 견저를 평정했다. 조조와 [[삼국지/지명/옹주#s-7|안정]]에서 만나 [[양추]]를 항복시켰다. [[건안]] 17년([[212년]]), 조조가 [[업성|업]]으로 돌아갈 때 하후연을 행 호군장군으로 삼아 [[주령]], [[노초]] 등을 지휘해 장안에 주둔케 했다. 남산의 도적 [[유웅명]]을 격파하고 그 무리들의 항복을 받았다. [[한수(삼국지)|한수]], [[마초]]의 잔당인 [[양흥]]을 [[삼국지/지명/사례교위부|사례]] [[삼국지/지명/옹주#s-3|좌빙익]] 호현에서 포위하여 무찌르고 양흥을 참수하고 박창정후에 봉해졌다. [[마초]]가 [[삼국지/지명/량주|양주]][[자사(관직)|자사]] [[위강]]을 [[삼국지/지명/량주|양주]] [[삼국지/지명/옹주#s-9|한양군]] 기현에서 포위하자 하후연이 위강을 구원하려 했는데, 도착하기 전에 위강이 패했다. 기성에서 2백 여 리 떨어진 곳까지 마초가 와서 이에 맞서 싸웠는데 군이 불리했고 [[견저]]가 모반하자 하후연은 군을 이끌고 퇴각했다. [[건안]] 19년([[214년]]), [[조앙(조위)|조앙]], [[조구(후한)|조구]], [[윤봉]] 등이 마초 토벌을 도모하자 [[강서(삼국지)|강서]]가 노성에서 군을 일으켜 이에 호응했다. 조구 등이 마초를 속여 성을 나가 강서를 공격하게 한 뒤 마초의 처자를 모두 죽였다. 마초는 한중으로 달아났다가 다시 돌아와 기산을 포위했다. <무제기>에 따르면 [[마초]]가 [[삼국지/지명/옹주#s-9|한양]]에서 다시 [[강족]], 호인에 의지해 해악을 일으키자 저왕 [[양천만|천만]](양천만)이 모반하고 마초에 호응해 흥국에 주둔했다. 하후연을 시켜 이를 토벌하게 했다. 강서 등이 급히 구원을 요청했는데 여러 장수들이 의논하기를 조조의 절도(節度)를 기다리자고 했다. 하후연이 말했다. >공(조조)께서는 [[업성|업]]에 계시니 왕복하는 데 4천 리 길이오. 회답에 따르려 하다가는 강서 등은 필시 패할 것이니 급히 공격해야 하오. 마침내 이를 실행해 [[장합]]에게 [[보병]]과 [[기병]] 5천을 주어 선두에 서서 진창의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게 하고 하후연 자신은 군량을 감독하며 후미에 있었다. 장합이 위수 가에 도착하자 마초가 강족과 저족 수천 명을 이끌고 장합에 맞섰다. 싸우기도 전에 마초가 달아나니 장합은 진군하여 마초군의 무기를 거두었다. 하후연이 도착했을 때는 여러 현들이 이미 다 항복한 상태였다. [[한수(삼국지)|한수]]는 [[옹주(중국)|옹주]] [[삼국지/지명/옹주#s-9|한양군]] 현친현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하후연이 공격하려 하자 달아났다. 하후연은 한수의 군량을 거두고 추격하여 [[삼국지/지명/옹주#s-9|한양군]] 약양현 약양성(略陽城)[* 후일 [[제갈량]]의 1차 북벌에서 촉군과 위군이 맞붙은 가정성이다.]에 이르렀고 한수와 20리 떨어져 있었다. 제장들이 한수를 공격하고자 했는데 어떤 이가 말하길 마땅히 흥국성의 [[저족]]을 공격해야 한다고 했다. 하후연이 말했다. >한수의 군사가 정예하고 흥국성이 견고하므로 공격하여 급히 함락시킬 수 없으니 장리의 여러 강족들을 공격하는 것이 더 나은 계책이오. 장리의 강족들 다수가 한수군에 있으므로 필시 돌아가 자신의 가족을 구원하려 할 것이오. 한수가 만약 강족을 포기하고 홀로 지키면 고립될 것이고, 장리를 구원하고자 하면 관병(官兵)과 들판에서 싸워야 하니 반드시 사로잡을 수 있소. 이에 하후연은 독장(督將)을 남겨 군수물자를 지키게 하고 경무장한 보병과 기병으로 장리에 이르러, 강족의 둔영을 공격해 불태우고 많은 수의 무리들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한수의 군중에 있던 강족들은 각기 자신들의 종족의 부락으로 돌아가니 과연 한수는 장리를 구원하였고 하후연 군과 진영을 벌여 대치했다. 제장들이 한수의 병력이 많음을 보고 이를 꺼려 영채를 구축하고 참호를 만든 뒤 싸우려 하자 하후연이 말했다. >내가 천리를 이어 싸워왔는데 지금 다시 영채와 참호를 만들면 병졸들이 피로해지니 오래 견딜 수 없소. 적이 비록 그 숫자가 많으나 쉬운 상대일 뿐이오. 그리고는 북을 울리며 진격해 한수군을 대파하고 대장기를 빼앗아 약양으로 돌아왔다. 진군하여 흥국성을 포위하자 [[저족]]의 왕 [[양천만|천만]]은 마초에게로 달아나고 남은 무리들은 투항했다. 한수는 [[삼국지/지명/량주#s-4|서평]]으로 달이났으며 하후연과 제장들은 흥국성을 도륙했다. 군을 돌려 [[옹주(중국)|옹주]] [[삼국지/지명/옹주#s-7|안정군]] 고평현의 도각([[흉노]])을 공격하니 모두 흩어져 달아났고 그들의 양곡과 우마를 거두었다. 이에 하후연에게 절(節)을 내렸다. <무제기>에 따르면 당초 [[삼국지/지명/옹주#s-8|농서]]의 [[송건]]이 하수 평한왕을 자칭하고 [[옹주(중국)|옹주]] [[삼국지/지명/옹주#s-8|농서군]] 포한현에서 무리를 끌어모아 연호를 고치고 백관(百官)을 두어 30여 년이 흘렀다. [[조조]]는 하후연을 보내 제장들을 지휘해 송건을 공격하게 했다. 하후연이 포한에 도착해 포위한 지 한 달 남짓 만에 이를 함락시키고 도륙하여 송건과 그가 두었던 승상 이하 관원들을 참수했다. 하후연은 별도로 [[장합]] 등을 보내 [[옹주(중국)|옹주]] [[삼국지/지명/옹주#s-8|농서군]] 하관현을 평정하고 황하를 건너 소황으로 들어가자 하서의 강족들이 모두 항복하여 농우가 평정되었다. 조조가 조령을 내려 말했다. >송건이 처음 반역한 지 30여 년인데 하후연이 일거에 섬멸하였고 관서를 씩씩하게 걸으니 그가 향하는 곳에 앞을 가로막을 자가 없었다. 중니([[공자]])가 나도 너와 함께 [[안회]]에 미치지 못한다라 한 적이 있도다. [[건안]] 21년([[216년]]), 식읍 3백 호를 더 늘려주어 [[이전(삼국지)|이전]]과 아울러 8백 호가 되었다. 돌아와 [[삼국지/지명/익주#s-15|무도]]의 [[저족]]과 [[강족]]을 [[삼국지/지명/량주|양주]] [[삼국지/지명/익주#s-15|무도군]] 하변현에서 공격하여 저족의 양곡 10여만 곡을 거두어들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