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교전지공작대 (문단 편집) ==== 환남사변(皖南事變) ==== 일명 신쓰준 사건(新四軍事件)으로도 불린다. 1940년 공산당 군대의 세력이 급속히 팽창하자 그 해 12월, 장제스(蔣介石)는 신쓰준(新四軍)을 안후이 남부(皖南)지구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공산당은 이에 동의하고 병력을 양쯔강 이북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처음에 신쓰준(新四軍) 공산당 장교들은 이 명령에 반발했으나 결국 병력 이동에 합의했다. 예팅(葉挺)이 이끄는 신쓰준(新四軍)의 정예 병력 9,000명은 3개 방면으로 나눠 양쯔강을 도하하기 시작했고 1월 5일 도하를 마치고 집결하였다. 이때 갑자기 8만명의 국민혁명군이 나타나 이들을 포위하고 다음날부터 공격을 개시하였다. 숫적 열세에 밀려 신쓰준(新四軍)은 병력의 상당수를 잃었고 부대장 예팅(葉挺)은 부하를 살리기 위해 1월 13일 국민당군측과 협상을 시도하였다. 예팅(葉挺)이 협상하러 오자 갑자기 국민당측은 그를 체포해 버렸고 결국 신쓰준(新四軍)의 부대장도 전사하고 2,000명의 병사만 살아서 포위망을 돌파하였다. 1월 17일 장제스(蔣介石)는 신쓰준(新四軍)의 해체를 명령했고 예팅(葉挺)은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그러나 1월 20일 옌안(延安)의 공산당 군사위원회는 부대를 재건하기로 결정하고 천이(陳毅)가 새로운 부대장이 되었고 류샤오치(劉少奇)는 정치위원이 되었다. 신쓰준(新四軍)은 7개 사단 및 1개 여단으로 구성된 9만 병력의 규모로 재편되었다. 일본이 패망한 이후, 둥베이(東北)에서 작전하던 바루쥔(八路軍)과 합쳐져서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으로 재편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