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갤럽 (문단 편집) == 연혁 == 설립일은 1974년 6월 17일이다. 다만 [[10월 유신|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지금 같은 정치 관련 조사는 못 했었고, 처음 한 여론조사는 [[금성사]](현 LG전자)의 [[가전제품]] [[소비자]] 조사가 시초였다. 다시 말해, 이 가전제품 조사를 하기 위해 회사가 설립된 날짜가 곧 창립일인 셈. 처음 명칭은 KSP(Korea Survey Polls Ltd.)였다고 한다. 1978년에는 <갤럽의 여론조사>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는데, 이 책은 조작설 등으로 여론조사 결과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들을 위해 갤럽 인터내셔널의 설립자인 조지 갤럽[* 미국의 여론조사 통계가로 1936년 대통령 선거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당선을 예측·발표한 것이 적중함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오늘날 실시되는 여론조사, 즉 ‘갤럽여론조사’의 선구적 역할을 하여 세계에 보급시켰다. 출처: 두산백과.]이 쓴 책을 번역한 것이다. 참고로 2002년 초판까지 나온 책으로, 마케팅계에서는 레전드급으로 통용되는 서적이다. 구해서 읽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 다만 번역본이 아닌, 원문판은 나온지 벌써 수십년도 더 됐다. 1979년에 갤럽국제조사기구(Gallup International Association)에 가입하면서 정식으로 회원사가 되었다. 상호명도 현재의 '한국갤럽조사연구소'로 바뀌었다. 그리고 12월에는 갤럽 인터내셔널의 End of Yeal Poll(연말 조사)에 참여하게 된다. 첫 옴니버스 조사인 셈. 1980년에 6대 도시에 실사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매월 옴니버스 조사를 실시했으며, 언론사 의뢰로 국내 최초로 전국 규모의 여론조사를 실시하였으며, 심지어 보도까지 됐다. 첫 의뢰한 언론사는 다름 아닌 [[한국일보]]. 1981년에는 대기업 이미지를 조사했다. 이것 또한 국내 최초. 그러면서 사직동의 고려빌딩으로 사옥 이전. 1984년에는 갤럽 인터내셔널 설립자인 조지 갤럽 박사가 84세를 일기로 타계했으며, [[문화공보부]]의 의뢰로 정치의식조사를 최초로 실시했다. CAT System(광고시안테스트) 모델을 개발했으며, 이 또한 최초로 기업에서 실시하는 마케팅 조사는 CAT 시스템을 베이스로 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1985년에는 표본추출 프로그램을 국내 최초로 개발한다. 엑셀에 들어가있는 데이터 기술을 뽑아낸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이 때는 당연히 컴퓨터가 보급되기 직전이니. 1986년에는 소매점 지표 조사 프로그램을 개발한다. 1987년에는 POS System을 개발하는데, 흔히 [[포스기]]라고 하는 시스템을 국내에서 최초로 개발한 것이다. 판매시점 정보관리 시스템이라고 하는 것으로 이 시스템의 도입은 현재의 편의점과 대형마트를 양산했고, 이는 기업들이 유사제품을 만들어서 경쟁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골목상권 등이 으레 그러하듯이, 일일이 다 세서 재고 분석을 했으니 유통업계에서는 가히 혁명에 가까웠던 셈. 무응답계층 분석을 위한 판별분석 모델도 여기서 개발한 것. 대통령 직무수행 평가, 정당 지지율, 선거 예측과 같은 정치 관련 여론조사는 1987년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13대 대선]] 여론조사에서 존재감을 드러내었는데 이 당시 대선은 4자 구도라는 정치적 특수성이 주목도를 높이기도 했거니와,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정권의 입김이나 압력에서 벗어난 사설 선거 여론조사의 장이 열린 측면도 있었으며[* 이전에도 [[안기부]] 차원에서 따로 조사를 하기는 했지만, 그 외 사설 여론조사 기관들은 대놓고 지지정당이나 지지후보를 묻긴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다만 비공개로 분류되기는 했지만 외신을 통해서 이러한 비밀 여론조사가 흘러나오는 경우도 종종 있었기 때문에 관련 종사자라면 알음알음 어느 정도 추정은 할 수도 있었다. 예를 들면 전두환 정권 비지지율이 60%대이고 지지여론은 30%대였다든지 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 특히 민주화 이후 신문이나 방송 등의 미디어 수요의 증가로 '여론조사'라는 흥미로운 기법에 대한 관심이 언론사들 사이에서도 커졌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적 변화를 타고 한국갤럽은 정식으로 사설 정치 여론조사 시장에 뛰어들었고, 13대 대선에서 국내 최초로 투표가 끝난 후 내부적으로 선거 예측 조사 결과를 계산하여 오차범위 이내로 최종 득표율을 적중시키면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다만 최초의 시도였던지라 선거 후 즉각 발표하진 못했고, 언론사 공유 및 회사 내부 참조용으로만 쓰였고, 일본언론을 통해 공개되었기는 했지만 국내에서 이러한 예측조사가 공개된것은 아니었다. 예측조사가 방송에서 풀리기 시작한것은 [[14대 대선]] 개표방송 때부터였지만, 이 역시 예측조사를 개표가 중반일때 발표한 것인지라 그 의의는 떨어진다 할 수있다. 방송사에서 개표 전에 예측조사를 발표하기 시작한것은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시초이다.[* 참고로 이후 대선 때도 대부분은 적중했는데, 다만 2017년 19대 대선의 경우 주요 후보들이 꽤 많다보니 당선자만 맞췄고, 3위 미만 후보들의 순위는 실제와 엇갈렸다. 참고로 대선의 경우 지역 제한이나 후보자 난립 등 상대적으로 조사에 한계가 있는 다른 선거에 비해 여론조사 적중률이 더 높은 편이긴 하다. 대선은 선거 자체가 전국 단일 선거구 형식의 선거이기 때문에 결과 예측이 다른 선거보다는 수월하기 때문이다.] 1989년에는 TV 시청률 측정을 위한 DB를 구축하게 된다. 이 또한 현재의 방송계와 광고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 물론 이전에도 시청률 조사를 하긴 했지만 대부분은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졌으며 그다지 체계적이라고도 볼 수 없었는데, 이 시기부터 시청률에 대한 세밀한 조사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소위 "황금시간대"라는 말도 이 시기부터 쓰였다. 동시에 1990년부터 오디미터식으로 시청률 조사를 했지만 시청률 조사는 1993년에 포기했고, 이후로 1999년 TNS에서 시청률 조사를 하기 이전까지 MSK(現 닐슨 코리아)이라는 회사에서 한 동안 시청률 조사를 독점하게 되었다. 1993년에는 중국 조사시장에도 국내 최초로 진출했다. 1994년에 강남구 신사동 두원빌딩으로 이전한다. 1995년에는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예측을 했고, 이 또한 적중한다. 1996년에는 다시 사직동으로 사옥을 이전했다. 2000년에는 사직동 사옥을 매입한다. 2004년에는 30주년 기념 설문조사를 했다. 2006년 홈페이지가 리뉴얼됨과 동시에 1992-1997 갤럽리포트 30권의 전자파일이 무료로 공개되었다. 2017년 4월 19일, 창립자인 박무익 회장이 별세하였다. 2019년 9월 16일, 창립 45주년을 맞아 CI를 개정했다. 이에 따라 홈페이지 디자인도 대대적으로 개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