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광복군 (문단 편집) ==== 광복군 지대장들의 수기 ==== '''지청천, 「인생회고록: 광복군과 나의 투쟁」, ≪희망≫, 1953년 2월호'''. 광복군에 관한 지청천의 회고는 단행본으로 간행된 것이 아니라 1953년 잡지에 실린 회고록 성격의 글이다. 관내로 들어온 후부터 낙양군관학교 및 광복군에서의 활동을 회고했는데 전체적으로 내용이 짧고 간략한 편이다. 광복군 창립에 대해서는 계획 수립 및 중국과의 교섭 등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하지 않고 광복군 초기 편제에 대한 서술에서 오류가 없지는 않다. 전란 때문에 참고자료를 확보하기 어려웠던 상황에서 빚어진 기억의 오류로 짐작된다. '''이범석, 「3·1운동 59주년 기념 시리즈, 광복의 증언②,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성립과 그 활동: 광복군」, ≪신동아≫, 15권 56호, 1969, 188~202쪽''' 광복군 제 2지대장 이범석 장군의 회고 ‘국민당 직업군인 시절’, ‘낙양군관학교이야기’, ‘국민당 중앙훈련단 중대장으로’, ‘광복군의 출범’, ‘공산분자들의 책동’, ‘중국병졸을 꾸어오기도’, ‘중국 측의 인사간섭’, ‘미국과의 합작’, ‘연합군에의 작전건의’, ‘중국에서의 광복군의 전공’, ‘난민선 타고 영광의 환국’, ‘김포공항에서 일본군사령관과 담판’의 제목으로 본인의 중국군대 경력, 낙양군관학교 및 광복군에 대한 상세한 증언을 남겼다. 전체적으로 본인 및 제2지대의 활약을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보이고 오류도 있지만 광복군에서 이범석 및 제2지대의 역할이 가장 컸던 것은 사실이므로 이범석의 이 회고는 광복군 연구에 필요한 적지 않는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 '''김학규, 「백파 자서전」, 독립운동사연구 1,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1988, 583~613쪽.''' 광복군 제 3지대장 김학규의 자서전으로 몇개의 기억 혼돈 흔적을 제외하곤 창립 초기부터 한국청년전지공작대로 편성된 제5지대가 존재한 것처럼 기억했다. 하지만 5년 동안 제3지대의 본부인 부양에서의 초모, 훈련 활동 및 立煌에서 미국 OSS과의 연합훈련 등을 상세하게 기술하여 광복군 연구에 있어서 귀중한 사료임은 틀림없다. '''박영준, 한강물 다시 흐르고 박영준(朴英俊) 자서전, 한국독립유공자협회, 2005.''' 김학규의 휘하에 활약했던 박찬익의 아들인 박영준(1915~2000)의 자서전은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의 지하공작, 광복군 제3지대에서의 사병 모집 및 훈련, 광복군 총사령부에서의 활동을 기록하였다. '''김홍일, 대륙의 분노: 노병의 회상기, 문조사, 1972.''' 김홍일의 회고록은 출생부터 해방된 조국으로 귀국하기 까지의 긴 역정을 기술했다. 김홍일은 일찍이 1918년 9월 상해에 도착한 뒤 바로 귀주군관학교에 입학했고 3·1운동 이후 독립군에 동참하고자 하여 만주로 떠났다가 1926년경 다시 관내로 넘어왔다. 그 뒤부터 해방이 될 때까지 관내에서 중국 군인으로 있으면서 한국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래서 그의 회고록은 만주와 관내지역 독립운동 연구에 많이 활용되는 회고록 중의 하나이다. 특히 상해 병공창의 병기창 주임을 맡으면서 이봉창 의거, 윤봉길 의거를 위한 수류탄을 제작하고 제공한 내용, 조선혁명군정치간부학교와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 학생대의 조직 경위 및 자신의 역할 등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했다. 광복군에 관한 기술도 있지만 광복군 참모장에 취임한 시기가 늦었던 관계로 간략한 편이다. 김홍일의 회고록에는 본인의 항일투쟁 및 독립운동의 동향뿐만 아니라 귀주군관학교에 관한 이야기, 남경과 상해를 점령하던 당시의 상황을 상세하게 기록되어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