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광복군 (문단 편집) ==== 철기 이범석 장군 암살 미수 사건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494|이재현]]의 광복군 제2지대사에 따르면 나월환 암살사건 직후 이범석 암살 미수 사건이 벌어졌다고 한다. >어떤 사건이란 철기 장군에 대한 총격 미수사건을 말하는데, 후일 알게 된 일이지만, 철기 장군은 제 2지대장으로 부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배아민(裵亞民)이라는 대원으로부터 피격당할 뻔 했었다. 배아민은 제 5지대 시절의 지대장 [[송호성(군인)|송호성]]과 매우 돈독한 사이였는데, [[송호성(군인)|송호성]]이 지대장 직을 물러나게 된 데 대한 불만이 있었는지 아무튼 배아민(裵亞民) 대원은 철기 장군을 암살하려 했다. >이 사건 이후, 배아민과 송호성의 밀접한 관계, [[송호성(군인)|송호성]] 등이 간 4단 특무대에 선물까지 하며 우리 동지들의 사형 집행을 촉구한 것 등이 백일하에 밝혀지자. 철기 장군은 우리 동지들의 문제에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재현, 한국광복군 제 2지대사, 선인, 2022, pp. 164~165] 철기 이범석은 자신을 암살하려는 사건의 배후에 송호성이 있다고 보았다. 나월환 암살사건 직후 1942년 4월~7월, 광복군 제 5지대 대원들이 제 2지대에 흡수되는 과정에서 당시 제 2지대장이던 [[송호성(군인)]]이 광복군 장악을 위해 1942년 10월[* 문서상에선 1942년 8월 1일]에 새로 제 2지대장으로 부임해온다. 추측컨데 1942년 후반부터 1943년 초 기간 동안 철기 이범석 장군 암살 미수사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배아민(裵亞民) 대원을 송호성 편으로 끌어들여 이범석을 암살하고자 했다고 한다. 이범석 암살 미수 사건으로 인하여 1944년 봄,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476|김동수]],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594|이하유]],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2048|박기성]],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494|이재현]] 나월환 암살사건 연루자들이 중국 감옥에서 석방되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한국광복군 제 2지대 대원들이 이범석 지대장에 반대하여 소동을 일으키는 등 많은 갈등이 있었던 것이 중국군 군사위원회 보고가 된다. [[파일:한국광복군 제 2지대 소동상황을 보고.png]] '''결과''' 이범석은 같은 독립운동가 이면서도 [[송호성(군인)|송호성]] 등 기존 임정 세력과 특히 김구 선생과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창군기 시절 장교들의 증언에 따르면 [[송호성(군인)|송호성]]은 한독당 계열에 가깝다고 했지만 이범석은 그렇지 않았다. 김승곤 지사는 1934년 7월 15일 민족혁명당에 가입, 남경에서 석문룡(石文龍), 최성장(崔成章), 하동진(河東振) 등 동지들과 함께 동 당 특무부 간부가 되어 일본 밀정을 조사·보고 하는 등 비밀정보활동에 종사해서 김구와 지청천, 이범석에 관련된 관계를 잘 알고 있다. >Q : 동아일보 신문이라고요? 아, 그 신문이 중국으로도 왔습니까? >김승곤 : 상해로. 남경 본단에서 우리에게 신문 한 부를 보내줘요. 신문에는 암호 글자가 있지. 암호. 암호글자를 써서. 신문에 있는 암호는, 소다물로 닦으면 뻘건 글씨가 나와. 그러면 신문을 보고 지령을 받는거지. 그런데 남경서는 사건 사고가 나지 않았겠어요. 배반을 했거든. 김구 선생을 이청천이, 이범석이가 배반을 했어. > >Q : 배반을 했단 말입니까? 누가 말입니까? >김승곤 : 이청천이 하고 이범석이 하고. > >Q : 두 사람이 사이가 갈라졌단 말입니까? >김승곤 : 배신을 했지요, 배신을. 김구 선생을. > >Q : 아, 김구 선생을 배신했다는 말씀입니까? >김승곤 : 두 사람 다 김구 선생이 데려다 놨거든. 그런데 그 사람들이 김구 선생을 반대했단 말이야. 그래갖고는, 그래서 쫓겨났어. 낙양사관학교에서 쫓겨났지. 이범석이가. > >Q : 그러면 그 두 사람은 어디로 갔습니까? >김승곤 : 그 둘이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지. 그 후 상해학교 졸업하고 남경에 오니까, 이청천이도 남경에 와있고. > >Q : 이범석은요? >김승곤 : 이범석은 … > >Q : 모르시구요? >김승곤 : 떠돌이 군대. 이범석이는 떠돌이 군대에 들어갔어. 단의 지시를 받아가지고 재무장을 한대. 상해, 남경서. 그 당시에는 일본놈들이 남경에 쫙 깔렸어. 상해에는 말할 것도 없고. 상해는 일본놈 세력 뿐이여. 다른 나라 군대 있지마는 별로 활동이 없는데 일본놈들은 우리 한국 독립운동원들을잡기 위해서 눈알이 빨개 가지고 쫙 깔렸어. >그런데, 그러는 중에 (19)37년에 중일사변이 터졌어. 중일사변이 터져가지고, 그래 인자 한국청년이 한 120명이 있었어요. 상해에. 그래 단장 김원봉이 장개석에게 교섭을 해가지고, 훈련을 받게 해달라. 훈련을 좀 받게 해달라. 전선에 나갈려니 군사훈련을 못받았으니 어떻게 나가겠나. >최소한 군사훈련은 6개월을 받으라. 그 훈련반에 가서 특별훈련을 받으라. 그래서 6개월 우리가 훈련받았어요. 받고 조선의용대를 만들었어요. 1938년 10월 10일날 조선의용대가 창립되었어요. 보훈처에서 실시하는, 뭡니까, 공적심사위원. 독립운동한 사람 뽑는데 나를 심사위원 맡겼거든요.[* 공훈전자사료관 원문사료실 독립유공자증언자료집, 제 1권 김승곤] 이범석은 광복군 시절에도 총사령관 지청천과 사이가 좋지 않아[* 광복 후, 이범석은 민족청년단을 조직하고 지청천 장군도 대동청년단을 따로 조직하게 된다.] 참모장에서 지대장으로 보직을 바꿨었고 광복 이후, 이범석 장군은 김구 보다는 이승만과 더 가까웠다. [* 청산리 전투에서의 승리 소식을 접한 이승만은 이후 매년 이범석과 서신 연락을 주고받았고, 선물과 피복을 보내 왔다. 1920년 이승만은 그에게 파커 만년필을 선물로 보내왔는데, "이제는 나도 전 세계를 향해 자랑할 밑천을 얻었소. 청산리 전투의 대승리로 거짓말을 하지 않고도 외교를 펼칠 수 있는 중요한 선전자료를 얻게 된 것이요. 청사에 길이 빛날 대첩을 이곳 동포들과 함께 충심으로 축하하는 바이오."라며 격려하였다.] 송호성이 육사의 전신[[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7913|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南朝鮮國防警備士官學校) 교장으로 재임 중이던 1947년 12월, 생도 분열식 중 이범석이 연설 직전 사관생도들이 보는 앞에서 '''"송호[* 송호성의 별칭]는 단을 내리라(연단에서 내려가라)!"'''고 할 정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