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광복군 (문단 편집) === 제 3징모분처(1941.3.1.)→제 2지대 제 3구대 제 3분대[* '강남분대'라고도 불렀다.](1942.10.1.)→[[한교전지공작대]](1944~1945.8.15.) === 제 3전구 공작대는 국민혁명군[* 장제스의 핵심부대로 수도 난징에 있어서 중앙군이라 불렀다.] 제 3전구 지역에서 활동하던 징모처 제 3분처를 일컫는 것이다. [[파일:구주통 장관.png ]] 중국의 제 3전구는 장쑤성(江苏省) 남부[* 난징일대], 안휘성(安徽省) 남부, 장시성(江西省) 동부, 저장성(浙江省), 푸젠성(福建省) 등을 관할하는 전구로 사령관은 [[https://zh.wikipedia.org/zh-tw/%E9%A1%A7%E7%A5%9D%E5%90%8C|구주통]](顧祝同)이었다. 이곳에 징모 제3분처가 파견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파일:제 3징모분처 발족식.jpg ]] > '''한국광복군 징모 제3분처 위원 환송기념식(1941년 3월 1일)''' >충칭시 허핑루(和平路) 우시예샹(吳師爺巷) 1 호에 자리 잡고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에서는 이날 오전 제23주 3·1절 기념식의 뒤를 이어, 오후에 김구(金九) 주석, 이청천(李靑天) 광복군 총사령관을 위시한 정부·군·정당 관계 요인들이 다수 참석한 가운데 임시정부 비서 실장 차이석(車利錫)의 사회로 한국광복군 징모 제3분처의 성립 전례식(典禮式)이 있었는바, 이 날 임명장을 받고 임지를 향하여 떠나게 된 제3 징모분처의 임원 명단은 아래와 같다.[* 김구(金九) 저 ≪백범일지(白凡逸志)≫ 기적(寄跡) 장강(長江) 만리풍(萬里風) 조, 김문호(金文鎬) 제공인 한국광복군 징모처 제3 분처 자료 참조] > >주임 위원 겸 선전 조장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690|김문호]](金文鎬) >위원 겸 정보 조장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296|이지일]](李志一)[* 이규학] >위원 겸 훈련 조장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723|한도명]](韓道明)[* 김응삼] >위원 겸 회계 조장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349|신정숙]](申貞淑) >위원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475|강정청]](姜正淸)[* 강치명(姜治明)] 1941년 3월 1일 임시정부 청사에서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690|김문호]](金文鎬를 주임으로 하여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723|한도명]](韓道明),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296|이지일]](李志一),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349|신정숙]](申貞淑)으로 편성되었다. 편성직후 중국군 제 3전구 사령부 소재지인 강서성 상요로 파견되었다. 제3분처 제3전구 지역으로 파견된 것은 김문호 주임이 제 3전구 사령부에서 복무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였다. 와세다 대학 출신인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8533|김문호]]는 중국으로 건너와 절강성 금화에서 간첩혐의로 국민혁명군에 체포되었다가 우연히 중국인 동창생을 만나 석방되어 국민혁명군 제3전구 정치설계위원으로 복무한 바가 있다. [* 엄항섭, 대한철혈남아사방에서 운집] 그는 임시정부를 찾아 중경으로 왔다. 이때 군무부에서 징모처를 설치하게 되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8533|김문호]]는 자기가 활동한 바가 있단 강남지역에서의 초모활동을 자원, 징모 제3분처의 임무를 맡아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다. [[파일:징모제3분처위치.png]] '''1941년 4월 10'''일, 장시성(江西省) 상라오(上饒)에 도착한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8533|김문호]]일행은 왕가원에 민가건물을 얻고 여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징모처 제 3분처''''와''''한국독립당 광복군 제8지구특별당부''''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파일:387209244_1004532817494482_8756502138793239070_n.jpg ]] 상라오(上饒)·옌산(鉛山) 등지 일대 건물 벽에 >‘중·한 양대 민족 연합 기래(起來) 타도 일본 제국주의’ >‘군사 제일, 승리 제일’ >‘국가 지상(至上), 민족 지상’ >‘유전 출전(有戰出戰), 유력 출력(有力出力)’ >‘중·한적 제형 휴수기래(携手起來), 분쇄 일본 제국주의’ 이를 본부로 하여 3분처에는 선전, 초모활동과 함께 제 3전구 특무단본부에 수용되어 있는 일본군 포로들을 심문하여 적정보를 수집하는 활동을 전개하였고 이를 통해 확보해갔다. 이곳에 전시간부훈련단에서 활동하고 있던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513|김형석]](金亨石),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475|강치명]](姜治明), 전복근, 유상공, 유상운, 정봉수,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356|김운경]](金雲慶)을 편입시켰다.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etId=27&totalCount=27&itemId=ij&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types=&searchSubjectClass=&position=10&levelId=ij_011_0010_00380&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6%9D%8E%E8%98%87%E6%B0%91&searchKeywordConjunction=AND|한국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 제3분대 공작인원 명단(1943년 7월)]]''' || 직책 || 성명 || 연령 || 적관 || 출신 || 비고 || || 대장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690|김문호]] || 29 || 황해 해주 ||해주보통학교, 해주중학교, 와세다 대학 법학과 졸업 || || || 대원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356|김운경]] || 27 || 경성 ||경성 매동공립보통학교 ||제 3전구 포로/ 광복군 편제에 제외 보안처에서 관리 || || 대원 || 왕영일 || 32 || 함남 원산 ||일본 다이인 고급중학 졸업||제 3전구 포로|| || 대원 || 마춘림 || 31 || 황해 해주 ||해주중학 졸업 ||제 3전구 포로|| || 대원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349|신봉빈]] || 31 || 전북 ||전주고등과 ||여성, 신정숙으로 김문호의 내연녀 || || 대원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296|이지일]] || 28 || 평북 ||신견중학 교사 ||가명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723|전선학]][* 본명은 김응삼, 일명 한도명으로 알려져있는 평북 선천 출신 인물로 1942년 6월에 [[https://zh.wikipedia.org/zh-tw/%E6%B5%99%E8%B5%A3%E6%88%98%E5%BD%B9|절감회전]](浙贛會戰) 난계역에서 총상을 입고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이규학(이지일)이 동료의 별명을 문서에 적었는지는 모르는 일이다.] || || 대원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513|김형석]] || 25 || 전북 ||농림학교 졸업, 측량기사 ||이소민 부대 편입 || || 대원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3029|이명식]] || 24 || 황해 해주 ||고등학교, 장사 ||이소민 부대 편입 || || 대원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0799|한진원]] || 24 || 경기 ||경기 숭실중학 졸업, 교사 ||제 3전구 포로, 현재 항저우에 있음 || || 대원 || 유명경 || 26 || 강원 ||강원농업학교 졸업, 농림기사 ||펑텐 거주 || || 대원 || 유상운 || 27 || 황해 해주 ||옥산여고 졸업, 교사 ||여성, 상하이 거주 || || 대원 || 이기심 || 27 || 경기 ||인천중학 졸업, 기사 ||제 3전구 포로, 항저우 거주 || || 대원 || 진몽각 || 35 || 평북 ||신의주 중학 졸업, 제지회사 사원||상하이 거주 || || 대원 || 증 명 || 24 || 경기 ||경기고등직업학교 졸업 ||난징 거주 || || 대원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58245|조동걸]] || 28 || 함북 ||청진고등중학 졸업. 교원 ||상하이 거주 || || 대원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58246|최일영]] || 29 || 경기 ||경성 숭실중학 졸업, 운전수 ||상하이 거주 || || 대원 || 김운정 || 33 || 전남 ||하포중학교 졸업, 장사 ||난징 거주 || || 대원 || 사중득 || 24 || 전남 ||부산중학||여성 이소민 부대 편입 || || 대원 || 유증영 || 26 || 중국 산시성 ||간이사범학교 졸업 ||여성, 중국인, 이소민 부대 편입|| || 대원 || 정봉수 || || || ||제 3전구 포로, 횡령 도망하여 붙잡혀 처벌됨. || || 대원 || 김 의 || || || ||제 3전구 포로, 정봉수와 도망 ||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제 1지대가 되고 개편되는 과정에서 징모 제 3분처는 1942년 10월 1일[* 나월환 제 5지대장 암살사건은 1942년 3월 1일이었으나 총사령부와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7개월 걸렸다.]부로 '''제 2지대 제 3구대 제 3분대[* 하지만 제 3분처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출처 : [[https://search.i815.or.kr/dictionary/detail.do?searchWord=&reSearchWord=&searchType=all&index=1&id=447]]]'''로 개편되었다. 1943년 7월까지 인원은 약 20여명 정도였다. 이들 가운데 1명은 중국인이고 7명은 제 3전구에서 포로출신이다. 중국군사위원회 점검결과 포로출신에 대하여 상당한 경계를 하고 있었다. 제 3분처는 전선의 변동에 따라 푸젠성 젠양, 난핑, 연산 등지를 거쳐 1945년 8월 장시성 상라오에 정착할때까지 여러차례 본부를 옮겨 다녀야 했다. [[https://zh.wikipedia.org/zh-tw/%E6%B5%99%E8%B5%A3%E6%88%98%E5%BD%B9|절감회전(浙贛會戰)]](1942년 5월 15일~ 9월 4일)으로 자주 옮겨다녀야 했다. 절감회전으로 인하여 잠시동안만 상라오, 옌산이 일본군에 점령이 되었고 나중에 전선 유지를 못해 일본군이 철수했다고 한다. 1943년, 한국광복군 제1지대 제2구대 이소민 구대장과 제 2지대 3구대 3분대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690|김문호]] 분대장의 파벌투쟁으로 인하여 서로 마찰을 벌여 초모공작이 중단되는 일이 발생되자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73|정화암]]의 주선에 의하여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1099|유기석]]이 중재에 나서게 되면서 제 3전구 한교전지공작대로 통합이 되어 유기석 부대장이 된다. >[[파일:한국광복군 공작지휘 처리방침.png]] > 한국광복군의 공작 지휘 처리 방침 요청에 대한 답전(答電) [*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etId=27&totalCount=27&itemId=ij&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types=&searchSubjectClass=&position=9&levelId=ij_011_0010_00350&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C%9D%B4%EC%86%8C%EB%AF%BC&searchKeywordConjunction=AND|#]]] >"내가 건양에 도착하기 전부터 파견되어 있었던 김문호는 중국 관청이나 중국군의 신임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이소민과 알력도 알력이려니와 그 성과도 별로 없었다.[* 정화암, 어느 아나키스트의 몸으로 쓴 근세사, 자유문고, 1992, pp.221] >三. 이번 점검 결과에 의하면 현재 남평에 주재하고 있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 제3분대 대원은 대장과 대원 4명에 불과합니다. 여기에 김문호의 내연녀인 신봉빈(신정숙)과 잡일하는 사람과 취사원을 포함한다 해도 모두 7명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김문호는 처음에는 매달 21명분의 군량을 꼬박고박 지급받았다가 나중에는 18명분으로 줄였습니다.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 제3분대의 매달 경비는 2천 원으로, 대원 1인당 매달 월급과 식비 보조금으로 80여 원씩 계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실제 대원에 대한 지출과 소액의 판공비 · 잡비 지출을 제외하고도 매달 1천 원 정도를 남길 수 있습니다. 여기에다 매달 군량국에서 18명분의 군량을 수령하고, 합작사에서 구매하는 기름 · 소금 등 물품도 공정가격으로 구매하기 때문에 여기서도 상당한 차액이 남을 것입니다. 제3분대 대원인 김운경의 말에 의하면 실제 인원보다 부풀려 수령한 군량과 기타 물품들은 모두 분대장인 김문호가 시중에 내다 파는데 구체적인 액수를 공개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용처도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있다 합니다. 이는 김문호가 중간에 사욕을 취하고 있음이 분명한 것입니다. > >四.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 제3분대가 성립된지 이제 1년이 다되어 갑니다. 그러나 제3분대는 내부적으로 구성원이 복잡하고, 김문호는 상급자인 제1지대 제2구대장 이소민(李蘇民)과는 계통이 달라 평소 의견충돌이 빈번합니다. 김문호는 공산당 계열이라고 분류되는 이소민과 서로 한인을 받아들이기 위해 치열하게 경합하고 있어 이 지역 한국광복군의 내홍이 심각합니다. 그 결과 한국광복군은 조직이 흐트러지고 실제 공작에는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김문호는 사욕을 채우기 위해 대원 숫자를 허위로 보고하는 등 오직 자신의 이익을 챙길 기회만 엿보고 있습니다. > >五. 제3분대 대원인 김운경은 원래 제3전구의 포로입니다. 고집불통인 김운경에게서는 전혀 감화훈련의 성과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또한 이소민에게 이용되어 수시로 김문호와 충돌을 빚고 있습니다. 이번 점검 시 점검단은 김문호와 이소민에게 자제를 부탁하였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습니다. 만일 한국광복군 내부의 갈등과 내홍을 속히 치유하지 않는다면 장래 더욱 갈등의 골이 깊어지게 될 것입니다. 비록 강박에 의해 일본군에 끌려오기는 하였지만 그간 행적과 사상으로 보아 김운경은 언제고 기회가 된다면 다시 적진으로 도망할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따라서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격리 차원에서 점검조의 명의로 김운경을 잠시 보안처에 구금하고 한국광복군총사령부의 처리를 기다리기로 하였습니다. > >이번 점검과 각 방면의 관찰 결과를 종합적으로 분석해 볼 때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 제3분대 분대장 김문호는 비록 한국혁명에 대한 열정은 그런대로 간직하고 있지만 학식과 경험 및 능력이 모두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김문호는 한인들로부터 전혀 신망을 얻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제1지대 제2구대장 이소민과의 깊은 불화로 서로 배척이 심하여 전혀 혁명공작을 전개하지 못하고 있으니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이번 점검 결과에 의하면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 제3분대는 성립 당시부터 중국인을 대원으로 편제하는가 하면 억지로 인원을 부풀리기 위해 감화의 성과도 보이지 않는 한적 포로들을 대원으로 편성하였습니다. 더구나 이들 한적 포로 출신 대원들에 대한 관리와 교육이 엉망이었던지라 내부적으로 대원들의 구성이 복잡하고 사상이 분열되어 효과적인 통제가 불가능하였습니다. 이번 점검 시 점검단의 명의로 김운경을 보안처에 이송한 것이 제3분대의 어지러운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라 하겠습니다. > >물론 지금까지는 제3분대 대원이 적을 위해 간첩행위를 한다든지 하는 불법적인 행위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사례는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근본적으로 혁명정신이 결여된데다 지휘부도 사욕을 채우는데만 혈안이 되어 대원들이 하나로 뭉치지 못하여 공작에 전념하지 못하고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상태로 내버려둔다면 장래 이들 가운데는 분명 적진으로 도망하는 자가 나올 가능성이 있을 것입니다. > >결국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 제3분대는 현재 그 이름은 있으나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상태입니다. 만약 적시에 효과적인 개선책을 내놓지 않으면 이 부대의 존재는 한국혁명의 위업에 커다란 악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또한 항전건국의 전도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상 한국광복군 점검에 나섰던 점검단 제2조의 공작 상황과 결과를 보고 드리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 >職 우젠(吳貞) 올림. ○○○ 남평에서.[* 한국광복군 점검 결과에 관한 代電(1943. 7)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etId=27&totalCount=27&itemId=ij&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types=&searchSubjectClass=&position=10&levelId=ij_011_0010_00380&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C%9D%B4%EC%86%8C%EB%AF%BC&searchKeywordConjunction=AND|#]]] >1943년 나는 쑤베이으로부터 완난 툰시(屯溪)를 거쳐 장시성 상라오에 도착했다. 당시 상라오에 있던 한국 동포는 십 몇 명이 있었으며, 푸젠 젠양(建陽)의 조선인은 7~8명이 있었다. 상라오 한국 동포는 한국광복군 제 1지대 2구대로 편성되었다. 젠양의 한국 동포는 이 군대 제 2지대 제 3분대로 편성되었다. 이렇게 되었는데, 충칭(重慶)방면의 이 군대 제 1, 2지대가 파벌투쟁으로 말미암아 합작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지방의 구대와 분대가 각각 배경이 달랐기 때문에 서로 마찰을 일으키고 모든 사업은 다 멈추게 되었다. 실질적으로 소위 마찰이나 투쟁은 역시 이소민 구대장과 김문호 분대장 두 사람 사이에 반목에 불과하며, 그들의 지도 아래 일반 한국 동포 대원들은 이유없이 두 적대적인 조합으로 분열되었다. 나는 상라오로 간 이후에 그들과 함께 있었고, 두 곳의 한국 동포의 연합을 위하여 몇 개월 동안 작업을 벌였으며, 후에 또 젠양에 가서 상당히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었다. 1944년 젠양(建陽)과 상라오 두 지역의 한국 동포는 옌산(鉛山)으로 집중되었는데 사업상으로부터 출발하여 다시 하나의 공작대를 조직했으며''' '제 3전구 한교전지공작대''''라고 명명했다. 원래의 광복군의 한 구대와 한 분대는 잠시 활동을 멈추기로 결정하고, 모든 성원을 다시 공작대에 편입하여 내가 부대장의 직무를 맡았다.[* 유기석, 삼십년방랑기-유기석회고록, 국가보훈처, p. 305 ] 제 2지대 제 3구대 제 3분대로 개편된 징모 제 3분처는 1943년 이후, 정화암, 유기석 선생의 도움으로 공작을 다시 피게 된다. 당시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의 기록을 대조해보면 제 3징모분처(제 2지대 제 3구대 제 3분대)와 제 1지대 2구대 이소민 부대와 정화암의 전시공작대, 유기석의 한교전지공작대를 혼용해서 사용하는 분도 있다. 이들 부대는 전부 제 3전구 소재에 있었으니 대원 소속 상관없이 서로서로 도운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야기는 [[한교전지공작대]]에서 후술하기로 한다. '''정화암의 전시공작대와 미 공군 사령부와 영/미 조종사 합동 구출 작전''' 태평양 전쟁의 격화와 함께, 1942년 여름부터는 미국 공군기가 일본의 요코하마(橫濱)·오사카(大板)·고베(神戶) 등 공업 지대를 폭격하는 등 공중전이 치열해졌는데,[* [[둘리틀 특공대]]] 대륙 방면의 적군은 제3 전구내에 있는 미국 공군 기지를 점령하기 위하여 일본군 5만여명과 [[왕징웨이]](汪精衛) 군 10여만 명을 동원, 기동 부대를 앞세우고 금화(金華)·상요(上饒) 지구로 진격을 개시하였다. 이 때 금화·상요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제3전구내에는 구주 총참(衢州總站), 옥산(玉山) 28참(站), 여수(麗水) 27참·공주(贛州) 비기참(飛機站), 강신(康信) 비기참, 광풍(廣豊) 비기참, 건구(建甌) 비기 총참 등 많은 비행 기지가 있었으며, 그 중에도 절강성(浙江省)과 강서성 경계이며 상요 북동방 약 50km 지점에 위치한 옥산 28참은 산악 지대로 화강 암산을 뚫노라 막대한 인력 동원과 물자를 투입하여 건설하였던 미 공군의 최전방 동굴 기지이며, 많은 군용기와 폭탄·탄약 등 군수 물자가 비치되기도 하였던 곳이다. 따라서 이러한 요새지를 중심으로 하는 절강성·강서성 일대에 걸친 전투는 미·중·일이 공중 전력까지 동원하는 대규모의 격전이었으며, 광복군 제3 징모분처에서도 제3전구 장관 사령부의 정치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금화(金華)에 있는 [[https://zh.wikipedia.org/zh-tw/%E5%9C%8B%E6%B0%91%E9%9D%A9%E5%91%BD%E8%BB%8D%E7%AC%AC%E5%8D%81%E8%BB%8D|중국 제 10집단군]](國民革命軍第十軍) 총사령부와 협조하여 이 작전에 협력하게 되었다. 김문호를 위시한 전복근(全福根)·강치명(姜治明)·조명(曹明)·조동걸(趙東傑) 등의 대원은, ‘대한민국임시정부’ ‘한국광복군 징모처 제3분처’ ‘한국독립당’ ‘제3 전구 정치부’ 등의 명의로된 반전 비라, 염전(厭戰) 사상 고취 전단, 일군 귀순 통행증 등을 화물차로 싣고 야전 방송기 등을 휴대하고 금화 지구로 출동하여 선전물의 살포, 일선 방송을 하며, 한편으로는 선전물을 미군 비행대에 공급하여 적군 점령 지역에 공중 살포하게도 하였다. 미국 항공모함에서 출발한 미국 B-25/B-26중거리 폭격기 50대가 적 수도 도쿄를 폭격을 감행하고, 중국의 강서성 모 비행장에 착륙하려고 하다가 기름부족으로 적 점령 지역인 상하이(上海) 장완(江灣) 비행장에 불시착하게 되고 대부분 조종사들이 상해에 있는 적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944년 11월,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73|정화암]](鄭華岩)[* 전시공작대를 운영하고 있었다.] 김문호 대장과 함께 비밀 간무 회의를 열고 주중 미 공군 사령부에 포로수용소의 소재지 확인, 보고함으로서 포로수용소 소재지 폭격 중지하게 하게 했다. 김문호가 미 공군에서 제공하는 비밀 통신문과 공작금을 가지고 분처로 돌아오자, 이강(李剛)·[[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73|정화암]](鄭華岩)·[[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349|신정숙]](申貞淑)·전복근 등과 함께 간부 회의를 열고, 공작 업무 수행에 관한 방안을 토의하였다. 그 결과 비밀 통신 연락 공작은 수년간 상하이 방면에서 잠복 활동하여 온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73|정화암]](鄭華岩)이 현지 임무를 책임지고, 김문호를 일반적인 정보 수집 등을 담당하기로 하여, 주중 미 5공군 사령부에 미·영 포로수용소의 소재지를 확인 보고함으로써 수용소 소재지에 대한 폭격을 중지하게 하는 등 한·미 합작의 성과를 거두었다. 1945년 3월, 분대장 김문호 및 전복근(全福根)·[[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58246|최일영]](崔日英)·[[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58245|조동걸]](趙東傑) 대원과 함께 전선 각지에 파견 공작 중인 대원들을 순방 격려하였다. 특히, 절서(浙西) 지구에 중점을 두고 중국 제 1유격정진종대사령부 및 미 5 공군 파견대 등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한·중, 한·미 합동 공작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징모 제3분처의 이러한 활동은 중국 측의 관심을 유도하였으며, 중국 군사위원회에서는 제3전구 사령장관 구주통(顧祝同)에게 한국광복군의 반정(反正) 공작에 협조하라는 명령을 하게 되었다. 이에 구주통(顧祝同) 사령장관은 다시 제 1유격정진군 사령관 겸 제 5군장 타오광(陶廣)에게 한국광복군에 대해 물심양면의 지원을 명령하니, 여기서 한·중 양국 현지 장병들은 협동 합작으로 더 유리한 대일 항전 활동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pp. 440~442]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