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광복군 (문단 편집) === 징모활동(초모공작) === 광복군은 인원과 부대편제를 처음부터 갖추어 창설된 것이 아니었다. 원래는 1940년 9월 30여 명의 인원으로 광복군 총사령부만을 성립하여 창설하였고, 국무위원회의를 통하여 '창립 1개년 후 최소한 3개 사단을 편성한다.'는 것을 당면전략으로 하고 있었으나, 인원이 적은 관계로 우선 사단 대신 지대(支隊)를 편성하고, 각 지대 휘하에 구대와 분대를 편성하는 방식으로 계획이 변경되었다.[* 지대의 편성은 총사령부 창설 시점보다 늦은 1940년 11월, 총사령부가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으로 이전한 후에 이루어졌다.] 우선 가능한 인원으로 창군을 하고 이후 병력을 확보하여 부대 규모를 확대 강화해 간다는 기본 전략을 수립했던 것이다. 초모활동에 대하여 임정이 광복군을 창설에 대한 구체적 계획인 한국광복군편제계획대강에서는 징모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1. 동북방면으로부터 인관하여 화북 각지에 분포되어있는 한국독립군의 옛 군대 중에서 초모한다. >2. 윤함구(일본점령지역) 내에 흩어져 사는 한인장병을 초모한다. >3. 한국국내와 동북(만주/연해주)지방 각지에 있는 장병들에게 비밀리에 군령을 내려 그들로 하여금 징모하게 한다. >4. 적군내에 있는 한인무장대오에 대해 방법을 써서 무기를 가지고 귀순하게 한다. >5. 포로로 잡힌 한인을 수편(거두어서 편성)한다. 이와같은 초모계획이 수립될 수 있었던 배경은 중국대륙으로 이주해온 한국인들을 기반으로 한 적이다. 중일전쟁 이후, 중국대륙에는 한인들이 크게 증가하고 있었다. 일본군이 점령한 지역에 한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주계기는 다양하지만 대체로 일본군 군속 및 통역, 일본의 관공서 회사의 직원, 일본군 상대로 한 사업가들이었다. 당시 일제는 중국을 침략한 후, 그 점령지역에서 한인들을 이주시키는 이민정책을 추진하고 있고 이에 화중일대에 이미 20여만 명에 달하는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반면 일본군 안에는 한인청년들도 많았다. 한인청년들이 일본군으로 징집된 것은 지원병제도로 1938년 2월 칙령 제 95호로 공포된 육군특별지원병령을 근거로 지원병제도는 4월부터 모집하여 6개월간 훈련 후 전선으로 투입하기 시작하였다. 1943년 8월 해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 실시하고 반도인학도특별지원병이라는 명목하에 전문학교와 대학교 재학생 졸업생들을 소집하여 1944년 2월 전선으로 내보냈고 1944년 9월부터는 소위 징병이라고 하여 전선에 투입되기 시작되었다. 징모분처의 설치는 지대가 겸임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각 지대의 지대장을 징모분처의 책임자로 임명하고 지대의 창설요원들로 하여금 자체적으로 병력을 모집하여 지대의 규모를 확대 강화해 나가도록 했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4, 1975, p.910: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독립군항쟁사, 1985, p.226] 초모활동 전개되는 과정은 3단계이다. >1단계 : 적점령지역에 잠입하여 공작지점을 마련하는 것 >2단계 : 공작거점을 기반으로 하여 그곳에 거주하는 한인청년들을 포섭 >3단계 : 포섭된 인원을 광복군 지역으로 데리고 나오는 것 '''김천성 동지의 초모공작''' >1940년 5월, 청년전지공작대 제 1분대의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476|김동수]](金東洙) 분대장,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494|이재현]],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3008|김천성]],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309|박영진]],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232|김용주]],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564|이월봉]][* 여군], 이삼녀 등은 중국군 제 34집단군 타이항산 유격대(太行山 遊擊隊)에 배속되어 본격적으로 적지공작(敵地工作)에 나섰다. 이들은 황허(黃河)를 건너 타이항산 주변에 공작 거점을 설치하였다. 이 중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494|이재현]],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3008|김천성]] 조는 일본군 제 36사단 주둔지인 산시(山西) 루안(潞安)에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309|박영진]](朴永晋),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232|김용주]](金容珠) 조는 신샹(新鄕)에 침투하였다. > >김천성은 루안 성내에 찹쌀떡 가게를 차려 놓고 여기서 일본군 내의 한국 사병 및 한국 거류민단[* 한국교민] 유지들과 접촉하였다. 먼저 일본군 군납업을 하던 김형철(金亨澈)을 포섭하고 다시 그를 통하여 일본군 제 36사단 통역관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733|이도순]](李道淳)에게 접근하였다. 그는 패기 넘치고 통쾌한 사나이였다. 김천성의 신분과 사람됨을 간파하고는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적극적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우선 자신이 속해있는 일본군 제 36사단의 각종 군사기밀을 제공하고 또 사단 산하 각 부대의 한국인 통역을 포섭하여 그들을 수차례에 걸쳐 시안(西安)으로 후송하였다. 1941년 6월,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733|이도순]](李道淳) 자신도 신변의 위협을 느껴 긴 칼을 찬 채 일본군 점령 지구를 벗어났다. > >이에 앞서, 1940년 9월 충칭에서는 광복군 총사령부가 설립되고 그 후 총사령부는 전략 요충인 시안으로 이전하였다. 전투부대로서 제 1, 2, 3지대를 창설한 외에,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흡수하여 광복군 제 5지대로 편성하였다. 제 3전구에는 제 3징모분처를 두고 이어서 조선의용대를 흡수 통합하였다. 이에 따라 광복군의 편제를 대폭 수정하여 새로 편입된 조선의용대를 제 1지대로 하고 종전의 제 1, 2, 5지대를 제 2지대로 통합하였다. 제 3지대는 그대로 존속시켰다. > >한편, 루안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여 온 김천성은 점차 그 공작이 노출되기 시작하였으므로, 부득이 조장 이재현과 의논하여 공작 거점을 쟈오쭈어(焦作)로 옮겼다. 여기에서는 루안만큼 큰 수확을 거두지는 못하였으나 당지 사정에 익숙한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232|김용주]], 이지홍, 이욱성 등의 도움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자오쭈어에서 포섭된 동지들 역시 시안으로 후송되어 광복군으로서의 정신적 군사적 훈련을 받았다. > >이들 중 특히 적구 사정에 정통한 백정현은 김천성과 같이 전방공작을 하라는 지시를 받고 다시 산시(山西)로 떠났다. 둘은 서로 도와가며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389|장덕기]](張德祺),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315|김용]](金湧), 유덕량을 포섭 시안으로 후송하였다. 이어어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995|이해순]](李海淳),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329|황삼룡]](黃三龍),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473|이우성]](李宇成) 등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이리하여 1940년 이래 이재현, 김천성 조를 중심으로 포섭된 동지는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720|김유신]](金有信),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303|최철]](崔鐵),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256|이원범]](李元範), 정일명,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337|박영섭]](朴永燮),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357|박영만]](朴英晩) 등 50여명에 달하였다. > >얼핏 생각하면 50여명 인원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당시 젊은이들이 금싸라기처럼 귀하던 우리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이들의 입대가 백만대군을 얻은 것처럼 고무적인 일이었다. > >그러나 1943년 제 2지대의 산시공작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서서히 그들에게 손짓하는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희생의 신"이었다. 1943년 8월 이래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117|김성률]](金聲律), 이한기,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132|문학준]](文學俊)은 중국군 제 27 집단군 파견 공작 중,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117|김성률]]은 링촨(陵川)을 침범한 일본군과 교전하다가 장렬히 순국하였으며, 이한기, 문학준은 린센(林縣)전투에서 우세한 적에게 포위되어 적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고 전사하였다. > >1943년 9월,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720|김유신]],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127|김운백]],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153|정상섭]]은 타이항산에서 활동 중 적의 기습을 받고 반격에 나섰으나 불행히 적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같은 시기에 산시 까오핑(高平) 전투에 참가한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137|안일용]]은 전투 중에 입은 상처가 도져 순사하였다. > >1944년 3월 지난(濟南)일대에서 지하 공작을 벌여 온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831|백정현]],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995|이해순]]은 적 헌병대의 감시를 눈치채고 텐진(天津)으로 이동하였으나 끝내 적 헌병대에 체포되어 타이위안(太原)헌병대에 압송되었다. 이 무렵,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3297|한휘]](韓輝)도 스좌장(石家莊)에서 적군 내 한적사병의 초모공작 중 적 헌병에 탐지 검거되어 재판없이 스쟈장 헌병대에서 총살당하였다. > >이 무렵 타이위안 지구에서 유격활동을 하면서 애국청년의 규합에 전력을 다하던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3008|김천성]]은 스쟈좡에서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3158|이서룡]],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301|정기주]],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280|차영철]], 권혁상,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277|정태희]] 등과 새로운 공작방향을 논의하였는데, 우군의 전우로 믿었던 왕모의 밀고로 적 헌병대에 포위되어 한 그물에 몽땅 잡히게 되었다. 용케도 김천성은 그 포위망에서 솟구쳐 나와 간신히 화를 면하였다. 다른 동지들은 타이위안 헌병대로 끌려가 가혹한 고문을 받고 그들은 소위 순회재판에서 이서룡 무기징역, 차영철 15년, 권혁상 10년, 정태희 5년, 정기주 2년의 유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이들은 그립던 고국으로 개선용사가 아닌 죄수인의 몸으로 압송되어 공주형무소에 복역 중 해방과 동시에 자유를 찾았다. > >일시 적의 체포망으로부터 탈출한 김천성에게 사신(死神)은 짓궂게 쫒아 다녔다. 그러나 그는 생명을 거는 모험없이는 공작성과는 오르지 않는다는 신념 하에, 항상 칼날과 같은 생사의 경계를 밟고 다니며 결사적 활동을 감행하였다. > >1944년 그는 자기가 포섭한 동지들을 안전한 후방으로 옮기기 위하여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944|이호길]],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3033|이동학]], 김두환,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477|박수덕]],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269|이지성]],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442|신덕영]], 최복련 등을 인솔 시안 지대본부로 귀대하였다. 휴식을 취하라는 지대장과 동지들의 권고를 뿌리치고 그는 다시 서북으로부터 휘몰아치는 몽고의 사진(砂塵:모래먼지)을 받으며 산시성 타이꾸(太谷)로 향하였다. 출발에 앞서 그를 포함한 적구 파견 공작원들의 엄숙한 선서식이 펄럭이는 태극기 아래 거행되었다. > >이것이 김천성과 광복군 제 2지대 동지들의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이야..타이꾸에 도착한 김천성은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831|백정현]],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150|전일묵]],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743|김찬원]],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2823|정윤희]]와 연락하여 대단한 적군 침투 계획을 세우고 자금 조달을 위하여 따로 이길룡, 송병희, 정윤희,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785|정영순]], 최송림과 빈번히 접촉하였다. 그러나 타이꾸 주둔 적 헌병대 정보원의 밀고로 계획이 실천에 옮겨지기 직전에 관련자 전원이 적 헌병대에게 체포되었다. > >타이위안 헌병대로 압송되는 도중, 이미 죽음을 각오한 김천성은 함께 묶여가던 정영순에게 "정동지, 광명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소. 동지들은 조국 독립을 위하여 끝까지 싸워 주시오. 내가 죽으면 유골은 조국땅 의주군 송정면에 묻어주시오."라고 유언하였다. > >김천성은 타이위안 헌병대의 조사를 받은 후, 일본 제 3001부대 임시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17일 타이위안 헌병대 광장에서 그에 대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백정현, 전일묵, 김찬원도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총살당하였다. > >1944년 4월에 텐진 헌병대에 체포된 이해순, 정윤희는 이보다 조금 앞선 1945년 4월에 적 타이위안 헌병대에 의하여 처형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